[곽병찬] 주한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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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과 ‘주한명군’

[출처] 서울신문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21세기에 보기 드문 총독형 외교관이다. 그가 부임한 이후 한 말이나 행동은 해방 후 3년간 한국을 통할했던 미군정장관을 연상시킨다. 방위비 분담금, 한국군의 파병, 남북관계, 한일관계 등과 관련한 그의 언행은 늘 지시와 명령 투였다. 그의 눈에 한국은 주권국가가 아니라 식민지인 것 같다.

배경이 궁금하다. 물론 평생 군 생활에서 익숙해진 지시와 복종의 습관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군 출신이라도 콜린 파월 전 미국무부장관 등 경력자보다 더 유연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이보다는 그의 아버지는 미국인, 어머니는 일본인이라는 혈통적 배경을 먼저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두 나라의 공통점은 한국을 식민지 혹은 점령지로 지배했었다. 게다가 그는 일본 매니아로, 수출규제가 촉발한 지소미아 유예 사태 등에서 항상 일본 편을 들었다.

주한미군의 존재에 대한 과신도 그 배경이 될 것 같다. 식민지 체제가 그러했고, 군정이 그러했듯이 지배력의 토대는 군사력이었다. 해방 후 한국에서 주한미군은 정권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했다. 그는 툭 하면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며, 그 힘과 권위로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태평양사령부 통합사령관으로 주한미군을 통할했던 터였으니 한국은 변방의 B급 속국쯤으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입만 열면 꺼내는 한미동맹의 강화란 사실 미국에 대한 예속의 강화를 의미했다. 1년 1개월 전 방위비 분담금을 10억 달러 이상으로 증액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했던 그는 채 1년도 안 돼 분담금을 다섯 배는 증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거란 한미동맹 강화였다.

심지어 돈 오버도퍼 기자를 기리는 ‘오버도퍼 상’까지도 동맹 강화와 연관지었다. 그는 지난 12월 23일 이 상 시상식에서 “오버도퍼 상은 한미동맹 증진을 추구하는 저널리즘을 장려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해리스의 전임자인 마크 리퍼트 대사 시절 제정한 이 상은 공정한 사실 보도를 통해, 언론 표현의 자유와 시민사회의 역동성의 가치를 제고해 한미관계를 증진한 기자에게 주도록 되어 있다. 솔직히 말해 해리스처럼 억압적으로 군림하려는 행태를 공정하고 엄격하게 보도해, 한미관계의 퇴행을 막는 언론인에게 주어져야 하는 상이었다.

지난 7일에는 한국군의 중동 파병을 대놓고 요구했다. 사흘 전 미국이 콰셈 술래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의 정예부대 쿠드스 사령관을 살해해 조성된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충돌 속으로 한국군을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베트남전에 한국군 파병을 압박할 때보다 더 질이 나쁘다. 8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언급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답방이나 비무장지대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동등재 등의 추진 문제에 대해 ‘미국과 협의할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남북관계에서 한국의 자율성과 독자성 즉 주권을 부정하는 언사였다.

 

그런 해리스 대사를 보노라면 400년 전 조선을 쥐락펴락했던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이 떠오른다. 조선에 주둔하면서 군량과 은을 뜯어내고 명청전쟁에 조선군을 동원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가도의 명군은 양대 호란을 초래해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했다.

[출처] 구글 지도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는 2013년 펴낸 <역사평설-병자호란>에서 ‘주한명군’이라는 생경하면서도 아주 익숙한 표현을 선보였다. 1621년부터 평안북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주둔하던 명나라 군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른바 ‘주한명군’은 1637년 청군이 정벌하기까지 청(후금)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준다며 주둔비와 작전 비용은 물론 각종 상납까지 요구했다. 심지어 평안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노략질까지 했다.

중원을 노리던 후금(청)으로서는 ‘주한 명군’은 등 뒤의 칼이었다. 만주에서 중원으로 나아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 요동이었다. 요동은 대체 불가능한 병참선이었다. 가도는 그 병참선을 언제든 유린할 수 있는 요충이었다. ‘가도의 주한명군’의 존재는 요동이 후금에 복속된 뒤에도 한족의 동요를 부추기는 원인이었다. 한족들은 가도의 명군을 믿고 조선이나 가도로 도망쳐 활개를 쳤다.

모문룡이 군사작전보다는 조선을 등치며 ‘해상 천자’ 놀음에 빠진 것은 후금으로선 다행이었다. 하지만 놀고 있다 해도 칼날은 칼날. 그런 ‘배후의 칼’을 지원한 게 조선이었다. 조선은 기지는 물론 군량과 무기까지 제공했다. 후금이 1627년 중원 정벌에 앞서 조선을 침략한(정묘호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배후의 칼을 먼저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누르하치가 내세운 침략의 명분은 ‘주한명군에 대한 지원’이었다. 조선이 굴복하 뒤 인조는 누르하치의 요구에 따라 정묘조약에 ‘주한명군’에 대한 지원 중단을 명기했다.

가도의 명군은 애초 정규군이라고 할 수도 없는 패잔병 무리였다. 누르하치는 만주의 여진족을 통합하자 1618년 명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명은 후금의 요동 진출을 막기 위해 1619년 사르후에서 명군과 맞섰다. 명의 강요로 조선군도 참전했다. 그러나 극심한 권력투쟁과 부정부패로 쇠락하던 명은 후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명은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하고, 선양 등을 내줬다. 1621년엔 요동의 주요 거점마저 잃었다.

이때 명의 영관급 장교 모문룡은 패잔병 200여 명을 이끌고 신의주 건너편 진강(지금의 단둥)을 잠시 점령했다. 며칠 만에 쫓겨나긴 했지만 후금과의 전투에서 거둔 첫 승리였다. 명과 조선에서 모문룡의 주가는 단번에 상한가를 쳤다.

이후 모문룡의 병사들(‘모병’)은 지금의 평안북도 용천, 의주 등지를 떠돌며 노략질로 연명했다. 조선 조정은 ‘부모의 나라’ 군대라는 이유로 이들의 행패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다. 당시 광해군은 모문룡을 설득도 하고 어르기도 해 가도로 들어가도록 했다. 명과 후금을 동시에 자극하지 않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후금으로서도 모문룡이 조선의 청북(청천강 북쪽)에서 활개를 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시절 ‘찬밥’이었던 ‘모병’은 반정세력의 구세주가 되었다. ‘쿠데타’로 즉위한 인조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명나라의 책봉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책봉이 늦어지면 이괄의 난 같은 또 다른 반란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명은 책봉을 차일피일 미뤘다. 조카가 삼촌을 내쫓은 것이었으니, 책봉할 명분도 약한 데다 반정공신 내부에서 반란(이괄의 난)까지 일어날 정도로 정권이 불안했으니 섣불리 했다가는 망신만 살 수 있었다.

반정세력에게는 또 다른 어려운 점이 있었다. 명 조정을 구워삶기 위해 사신을 보내려 해도 육로가 막혀 있었다. 요동이 이미 후금에 넘어간 터였다. 해로로 가야 하는데 자칫 고깃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신료들조차 그 좋다는 ‘사신’을 기피했다.

북경으로 가는 가장 해로는 평안북도에서 산동반도로 가는 길이었다. 가도는 바로 그 길목에 있었다. 모문룡은 조선에서 명으로 가는 사신이나 상인을 모두 검열했다. 당시 조선 조정에 모문룡은 명의 전권대사이자 주한명군의 사령관이었다. 스스로 명의 실세를 자처하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북경에 가서 직접 책봉 로비를 하는 것보다 모문룡을 통하는 것이 더 손쉽고 효율적이었다. 게다가 후금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하겠다고 호언을 하였으니, 반정세력에게 모문룡은 명의 그야말로 황제의 특명대사였다. 인조와 반정세력은 모문룡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20세기 박정희나 전두환 등 한국의 쿠데타 정권이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 주한 미국대사에게 매달린 것과 같았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모문룡은 조선으로부터 군량은 물론 온갖 뇌물과 상납을 챙겼다. 그는 당시 명 조정의 최고실세였던 환관 위충현의 줄을 잡고 있었다. 조선에서 뜯거나 약탈한 재물을 꼬박꼬박 상납해 신임을 받았다.

당시 명의 조정에서는 모문룡을 여순 쪽으로 철수시켜야 한다는 소리가 많았다. 모문룡은 후금에 대한 군사작전은 하지않고 그저 사병만 늘려, 위세만 키우려 했다. 한때 전선이 수백 척에 이를 정도로 주한명군의 규모는 컸다. 군량의 일부는 조선에서 구한다해도, 명 조정에서 나가야 할 유지비도 컸다. 소환론은 피하기 힘들었다. 그때마다 이런 주장을 막아준 것이 뇌물을 꼬박꼬박 챙긴 위충현이었다.

문제는 모문룡의 입지나 군세가 강해질수록 조선의 부담은 더 커졌다는 사실이었다. 인조 즉위 원년(1623년) 조선은 ‘주한명군’에 쌀 6만 석을 지원했다. 이후 매년 규모는 늘어났고, 인조가 명의 책봉을 받은 이듬해(1626년)엔 16만 석이 되었다. 조선은 이 ‘모문룡 군량(모량)’을 채우기 위해 특별세를 신설했다. 토지 1결 당 쌀 1말 5되를 농민에게 부과했다. 모문룡은 이밖에도 수시로 평안도 일대의 수령들에게 은과 군량을 요구했다. 수령들이 거부하면 병사를 동원해 창고를 약탈했다.

당시 평안감사 윤훤은 ‘온 나라 식량의 절반이 모문룡 휘하에게 넘어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여기에 한족 유민 10만여 명이 ‘주한명군’을 믿고, 평안도를 쓸고 다니며 곡식은 물론 개 돼지 닭까지 노략질했다. 이정구는 이들을 가리켜 ‘조선의 홍건적’이라고 한탄했다. 오죽하면 조정의 일각에서는 ‘청북(청천강 이북 지역)’을 포기하자는 논의까지 나왔을까.

모문룡은 가끔 후금을 정벌하겠다며 원정군을 상륙시켰다. 물론 후금과 전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물자를 약탈하기 것이었다. 모병은 함경도까지 원정해 각 고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의주 부윤 이완(이순신 장군의 조카)은 약탈하던 모병을 체포해 곤장을 쳐 내쫓았지만, 모문룡으로부터 항의를 받은 인조는 이완을 강등시켰다. 인조는 나아가 김류로 하여금 평안도 안주에 모문룡 공덕비를 세우도록 했다.

정묘호란 때 모병은 가도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에서 군량과 인삼, 은을 뜯어내는 짓은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1628년 11월 명나라로 가는 조선의 동지사 일행에게서 명 조정에 보내는 은과 인삼 등 조공물을 빼앗았다.

그런 모문룡은 1629년 명의 병부상서 원숭환에 의해 제거됐다. 원숭환은 가도를 요동 수복의 전진기지로 구축하기 위해 부패하고 무능한 모문룡을 척살했다. 후금을 배후에서 치기 위해서는 조선이 든든해야 하는데, 모문룡처럼 뜯어먹다가는 조선이 망하거나 후금으로 돌아설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주한명군’의 ‘조선 벗겨먹기’는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이듬해 원숭환은 후금의 이간계와 부패한 관리들의 견제로 처형당했다. 가도 ‘주한명군’의 ‘조선 벗겨먹기’는 부활했다. 후임 손원화는 1630년 11월 조선 조정에 ‘군량과 전마가 부족하다. 가도의 명군에 균량과 전마 2천 필을 공급하라’고 재촉했다. 가도의 도독 유흥치는 툭 하면 평안도로 나와 접대를 요구했으며, 그 부하들은 관아와 여염집을 노략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기도 했다.

이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후금이 아니었다. 1631년 5월, 홍타이지는 사신을 보내 조선이 식량을 공급하는 바람에 명군이 유지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6월 10일엔 1만여 병력을 평안도 가산으로 보내 해안을 차단하고는, 조선에서 ‘주한 명군’의 철병을 요구했다. 조선이 철병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후금이 직접 하겠으니, 후금에 수군을 제공하라고 윽박질렀다. 바로 그날 손원화의 사절단은 한양에서 조총과 구리냄비와 배 1백 척을 요구하고 있었다.

인조는 후금의 요청은 거절하고, 명에는 조총과 구리냄비를 제공했다. 10월엔 가도의 도독 황용이 군량을 독촉하는 문서를 보냈다. 1633년 1월 후금은 다시 ‘가도 정벌에 필요한 전함 3백 척과 배를 조종할 수군을 의주 포구로 가져와라. 듣지 않으면 사신 왕래 끊겠다’고 통보했다.

인조는 선택해야 했다. 후금인가 명인가. 그러나 인조는 숭명배청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터. “오랑캐가 침략해 오면 자신이 전방으로 나아가 장사들을 독려하리라.” 단교는 물론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허황된 결단을 내렸다.

그해 가도의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압군을 파견했다. 반란군이 군선을 이끌고 후금으로 투항하려 하자 명군과 함께 이들을 추격하기도 했다. 1633년 6월 여순을 함락한 후금은 조선에 마지막 경고를 했다. ‘가도를 돕지 말라.’ 하지만 인조는 10월 ‘조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명군에 군량을 공급하라’는 가도의 부총병 정룡의 요구에 따랐다.

1636년 11월25일 결국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선포했다. 병자호란이었다. 홍타이지는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내며 정벌의 이유를 하늘에 고했다. 1619년 명을 도와 청을 공격하는 데 동참한 것, 1621년 요동의 한인들을 받아들여 명에 넘긴 것, 정묘년 맺은 맹약을 어긴 것, 후금으로 귀순하던 공유덕 경중명 일행을 공격한 것, 명에는 병선을 제공하면서 자신들의 임차 요구는 거부한 것, 인조가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유시문을 내려보낸 것 등이었다. 첫째와 마지막 이유 외에는 모두 가도의 명군과 관련된 것이었다. 요동에서 도망쳐온 한족들은 대부분 조선을 거쳐 가도로 넘어갔다. 정묘년 조약에서 가장 중요한 조항 가운데 하나가 가도의 명군에 대한 지원 중단이었다.

병자호란은 조선의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민생을 어육으로 만들었으며, 수십만 백성이 노예로 끌려갔다. 이와 함께 인조는 청태종의 ‘신하’가 되었고, 조선은 청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청의 신하로서 가도의 ‘주한 명군’ 정벌에 나섰다. 황해도의 병선 1백 척과 수군 3천여명을 징발해 편성한 조선군은 청군과 함께 16377년 4월 가도를 함락됐다. 당시 조청 연합군 지휘관은 1633년 반란을 일으켜 청에 귀순할 때 조선군의 추격을 받았던 공유덕이었다.

가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청군보다 오히려 더 극심한 살육과 약탈을 했다고 한다(<병자록>). 가도의 명군이 그동안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저지른 패악질에 대한 민중의 복수였다. 동맹이란 이름 아래 저질러진 ‘뜯어먹기’의 결과였다.

 

곽병찬
전 한겨레신문 대기자. 이 시대 인문의 승묵(繩墨), '향원익청(香遠益淸)'을 쓰다.

1개의 댓글

  1.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으며 머리 속을 맴도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재조지은(在造之恩)! 조선이라는, 거의 망해가는 나라를 다시 만들어 준 은혜!
    그런데 ‘재조지은’의 유래가 되었던 임진왜란 시절부터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처럼 명군의 수탈의 극을 달렸고, 호란 직전 명나라 사신이 오는 날이면 은을 모두 긁어가서 조선의 재정을 파탄내는데 일조하였으니…
    너무 오랜 기억인데, mbc 100분 토론이었을 겁니다. ‘한미관계’를 주제로 한 토론이었는데, ‘반미(反美)’에 반대하는 한 토론자의 입에서 똑같은 단어가 나오더군요. 재조지은! 대한민국이라는, 거의 망해가는 나라를 다시 만들어 준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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