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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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놀이를 통해 철학이 사라졌다!
_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우리가 스마트폰을 안다고?

여행 중이던 주교가 어부가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주교가 가리키는 곳이 어디냐고 묻자 어부는 세 명의 은자들이 사는 섬이라고 했다. 주교는 어부에게 그곳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섬에서 주교는 세 명의 은자를 발견했다. 한 사람은 키가 작고 계속 웃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키가 좀 더 크고 힘이 세며 친절하고 명랑했다. 마지막 사람은 키가 크고 엄격했다. 주교는 세 명의 은자들에게 어떻게 하느님을 섬기는지 물었다. 그러나 은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들이 아는 유일한 기도는 “당신도 셋이요, 우리도 셋이니,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였다. 주교는 세 명의 은자들에게 열심히 주기도문을 가르쳤다. 주교가 배를 타고 되돌아가고 있는데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물위를 미끄러져 배로 다가오고 있었다. 세 명의 은자들이었다. 은자들은 주기도문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다시 가르쳐달라고 했다. 주교는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당신들의 기도가 주님께 닿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세 명의 은자들>의 내용이다.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 Wittgenstein, 1889~1951)은 이 작품이 철학을 잘 표현했다고 여겼다. 비트겐슈타인은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는 괴테의 말을 좋아했다. <세 명의 은자들>과 괴테의 말에 담긴 공통점은 행위가 먼저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식이 행위에 선행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개념과 지식은 어떤 행위가 일어난 후에 그 행위를 체계화한 것에 불과하다.
앎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스마트폰이 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스마트폰을 안다고 말한다. 우리는 스마트폰에 내재된 기술을 알지 못한다. 이때 우리는 앎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일상의 대화에서 당연하게 사용하는 말이지만 그 말은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 언어 놀이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의 대상을 다시 전환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서로 대조되는 두 시기로 나뉜다. 전기의 철학은 《논리철학논고(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로 대표되고, 후기의 철학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로 대표된다. 《철학적 탐구》를 이해하려면 《논리철학논고》에서 시작해야 한다. 《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우리 앞에 어떤 물체가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 물체 자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그 물체를 ‘책상’이라고 한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세계는 사물들의 세계가 아니라 사실들의 세계다. 세계를 알려면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사실들은 ‘이것은 책상이다’처럼 명제로 표현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 이렇게 썼다. “모든 참된 명제들을 드러낼 수 있으면 세계를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이 참된 명제인가? 명제의 참, 거짓을 알려면 명제를 분석해야 한다. 명제는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주어와 술어의 논리적 관계를 밝혀야 한다. 주어와 술어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 둘의 논리적 관계를 밝히는 일은 언어의 논리적 연관을 분석하는 일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대상을 언어의 논리적 연관 분석으로 전환시켰다.
비트겐슈타인의 전환은 칸트의 전환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철학은 ‘세계에 대한 탐구’를 주 대상으로 해왔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발전하면서 세계에 대한 탐구가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떨어져나갔다. 칸트는 철학의 대상을 ‘인식에 대한 탐구’로 전환함으로써 철학이 봉착한 위기를 해소하고자 했다. 그런데 칸트 철학의 주춧돌인 선험적 종합 판단이 의심을 받으면서 철학은 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철학의 대상을 전환시켜 철학을 구출하려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선험적 종합 판단의 자리에 명제의 분석을 세웠다. 사실들은 명제로 드러나므로 명제의 참, 거짓을 가리면 진리를 알 수 있다. 명제의 참, 거짓을 알려면 언어의 논리적 관계를 따지면 된다.

명제는 세계를 탐구해야 성립한다. 실제 세계와 관련 없는 명제, 예를 들면 ‘삼각형은 둥글다’와 같은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명제는 세계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에서 나와야 한다. 철학은 그 명제의 참, 거짓을 가린다. 자연과학에서 나오지 않은 명제는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면 말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자연과학의 명제 이외에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

1922년에 《논리철학논고》를 완성한 비트겐슈타인은 “문제들이 본질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생각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철학적 탐구》가 시작되었다.

 

철학의 왕국이 붕괴하다

비트겐슈타인은 무엇에 대해 회의했을까?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한 친구가 “밥 먹고 합시다!” 하고 말한다. 그 순간 여러분이라면 무엇을 떠올리겠는가? 쌀밥? 자장면? 라면? ‘밥’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시인 김지하는 “밥은 하늘”이라고 했다. 이쯤 되면 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이 이럴진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은 없다고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은 언어의 논리적 관계를 분석하면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언어의 뜻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의 언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같은 단어라도 뜻이 다르다. 그렇다면 언어의 논리적 관계를 분석하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기 철학을 부정했고, 나아가 전통적인 철학 자체를 무너뜨렸다. 철학자들은 주관과 객관, 우연과 필연, 존재와 인식 같은 언어로 세계를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철학자의 설명은 자신의 주관일 뿐, 객관성이 없다. 사람들은 철학자가 사용한 언어를 다른 뜻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철학자가 할 일은 없다.

그러면 비트겐슈타인은 무엇을 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자체를 탐구했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 속에서 언어를 배운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워가는 과정과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놀이’로 설명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언어 놀이의 예를 보자.

명령하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어떤 하나의 대상을 그 외관에 따라서 또는 측정한 바에 따라서 기술(記述)한다.
어떤 하나의 기술(技術)에 따라 어떤 대상을 제작한다.
어떤 하나의 사건을 보고한다.
사건에 관해 추측한다.
어떤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검사한다.
실험 결과를 일람표와 도표로 만든다.
어떤 하나의 이야기를 짓고 읽는다.
연극을 한다.
노래를 부른다.
수수께끼를 알아맞힌다.
농담한다, 허튼소리를 한다.
어떤 하나의 응용 계산 문제를 푼다.
어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
부탁한다, 감사한다, 저주한다, 인사한다, 기도한다.

인간은 이런 다양한 언어 놀이에 참여하여 언어를 배운다. 언어를 명확하게 하려면 언어 놀이에 참여하여 단어와 문장의 의미가 어떻게 생겨나고 사용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런 활동이 철학의 임무다. 이에 따라 인간과 세계의 심원한 의미를 파헤치고자 했던 철학은 막을 내린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철학의 왕국은 무너지고 일상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자는 깃발만 남았다.

 

생각을 생각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최면에 빠지지 말라고 한다. 삼각형의 예를 보자. 삼각형을 보면 우리는 무엇을 떠올릴까? 비트겐슈타인이 열거한 내용을 보자. “삼각 모양의 구멍, 하나의 물체, 기하학적인 도형, 바닥에 서 있는 것, 하나의 산, 쐐기, 화살, 화살표, 직각을 이루는 두 선 중에서 짧은 선을 바닥으로 하고 서 있어야 할 물체가 뒤집힌 모습, 평생사변형의 반쪽.” 우리는 삼각형을 보며 다양한 언어로 표현한다. 표현은 곧 해석이다. 그렇지만 해석을 통해 정확한 삼각형을 그려낼 수는 없다. 여기에 언어의 함정이 있다. 언어를 통해 모든 것을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생각’이라는 단어가 단지 생각함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함에는 여러 행위가 포함된다. 생각은 문맥에 따라 다른 행위를 표현하기도 한다. ‘생각하며’라는 말 뒤에 수없이 많은 말이 불을 수 있다. ‘생각하며 걷다’, ‘생각하며 울다’, ‘생각하며 밥을 먹다’ 등등. 또한 생각은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문제를 풀거나 책을 읽거나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생각한다. 이처럼 상황과 문맥에 따라 ‘생각’이란 말의 용법이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상황과 문맥을 떼어놓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유명한 로댕의 조각품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생각하는 모습일까?
그건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 맞을까?

우리는 로댕의 조각처럼 턱을 괴는 대신 웃고 노래하며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파괴하는 것은 단지 공중누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언어가 서 있는 언어의 기반을 파헤친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철학은 낱말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모든 설명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술이 들어서야 한다.”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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