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한비자 《한비자(韓非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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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지지 않는 원칙은 변칙일 뿐이다
_ 한비자 《한비자(韓非子)》

 

시기심 때문에 죽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했다. 중국 전국시대, 하루도 전쟁이 그치지 않았던 시대이지만 이번 전쟁은 목적이 별났다. 진시황(秦始皇)이 한나라의 학자 한비자를 만나고 싶어 전쟁을 일으켰다. 일전에 진시황은 우연히 한비자(韓非子, BC 280?~BC 233)가 쓴 <고분(孤憤)>과 <오두(五蠹)>를 보았다. “아아! 과인이 이것을 지은 사람을 만나 함께 사귈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구나!” 그래서 진시황은 즉각 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한나라 왕은 당초 한비자를 등용하지 않았으나 위급해지자 한비자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진시황을 설득하여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해서였다. 진시황은 한비자를 보고 무척 기뻐했다. 이때 한비자와 같이 순자 밑에서 공부를 했던 이사(李斯) 등이 진시황에게 말했다. “한비자는 한나라의 공자입니다. 지금 왕께서 제후를 병탄하고자 하시는데, 한비자는 끝내 진나라를 위해 일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람의 정입니다. 지금 왕께서 한비자를 등용하지 않고 오래 붙잡아두었다가 돌려보내신다면 후환을 남기는 일입니다. 죄를 걸어 처형하느니만 못합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한비자를 하옥시켜 죄를 묻게 했다. 그때 이사는 한비자에게 약을 보내 자살하게 했다. 한비자는 자신의 억울함을 개진하려고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얼마 후 진시황은 한비자를 하옥시킨 것을 후회하여 사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한비자는 죽은 후였다. 이렇게 대학자 한비자는 동창생인 이사에 의해 타국 감옥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자신이 품었던 웅장한 뜻을 한 번도 펼치지 못하고 말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한비자의 최후다. 사마천은 한비자를 한마디로 이렇게 평가했다. “말을 더듬어 자신의 주장을 말로는 잘 표현하지 못했으나 저술은 잘했다.” 글을 잘 쓴다는 한비자가 쓴 책이 《한비자》다. 한비자는 일찍이 이사와 함께 순자의 문하에서 배웠다. 그때 이사는 자기가 한비자만 못하다고 스스로 인정했다고 한다. 이사가 한비자를 죽인 것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난

한비자는 흔히 서양의 마키아벨리와 비교된다. 마키아벨리(Niccoló Machiavelli)는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현실주의 사상가로 유명하다. 마키아벨리는 다섯 개의 나라로 분리되어 혼란을 겪던 이탈리아의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방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보여준 관점과 실례들은 ‘도덕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마키아벨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배신도 잔인함도 필요하다고 했다. 나라를 위해서 악행을 서슴지 말라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수많은 학자들이 비판했다. 한동안 《군주론》은 금서가 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사상 뒤에는 암담한 현실을 타개해보려는 애국의 의지가 있었다.

한비자에 대한 평판도 마키아벨리에 대한 평가와 비슷한 점이 많다. 《한비자》는 조국 한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어떻게 조국을 강대국으로 만들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전국시대의 막바지에 한비자의 조국 한나라는 점차로 국력을 상실하여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국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방책을 내놓겠는가? 당연히 현실 인식은 냉정할 수밖에 없다. 위기에 처한 조국을 살리기 위해서는 ‘인의의 정치’, ‘예의 정치’를 주장할 수 없었다. 한비자 사상은 이런 객관적인 조건에서 나왔다.

 

법을 엄격히 펴나가라

한비자는 현실을 아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한비자는 일관되게 군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만물에 귀중한 것이 많지만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의 몸이 가장 귀중하다. 군주의 지위는 지극히 높다. 군주의 위엄은 매우 중요하다. 군주의 세력은 매우 융성하다. 이 네 가지는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없고 다른 곳에서 찾을 수도 없으며 다른 이에게 의지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잘 생각하여 분별이 생기면 군주의 지위를 지킬 수 있고 나라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

군주가 귀한 이유는 신하가 따르기 때문이다. 군주는 먼저 자신의 존귀함을 자각해야 한다. 군주의 명에 신하는 복종한다. 복종하지 않는다면 군주는 위엄을 잃는다. 군주는 신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등용하느냐 버리느냐는 군주에 달렸다. 그러므로 나라를 강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주체는 군주다. 그래서 한비자는 군주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럼 군주는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가? 참담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어떤 원칙을 세워야 하는가? 한비자는 객관적이고 포괄적인 법을 통치의 근거로 천명한다. 질서가 무너지고 자의적인 살인이 횡행하던 그때 사회를 유지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방법은 법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을 세움에는 원칙이 있어야 했다. 법은 성인이나 옛 제도에 근거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현재다. 법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누가 보아도 명확해야 하고 분명해야 한다. 법의 적용은 신분이나 직책에 구애받지 말고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 그래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한비자는 상앙(商鞅)의 예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폈다.

“진나라를 돌아보면 신하들은 법을 지키지 않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까닭에 나라는 황폐하고 군사는 약해졌다. 군주는 힘을 잃으니 신하들은 명령을 듣지 않았다. 까닭에 상앙은 군주인 효공(孝公)에게 나라의 법과 관습을 고치고 군주의 길을 바로 하며 죄지은 자를 발고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생업을 등한히 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고 농업을 장려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처음엔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때 진나라에서는 죄가 있어도 뇌물로 죄를 면할 수 있었고, 공이 없어도 힘 있는 신하의 비위에 들어맞으면 출세할 수 있었다. 까닭에 법을 무시하고 죄를 짓는 자가 많았다. 이에 상앙이 법을 어긴 자는 가차 없이 처벌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발고한 자에게는 상을 내리자 백성들이 감히 법을 어기려 하지 않았다. 엄격한 법 적용에 벌을 받는 자가 늘어나니 백성들은 상앙을 원망했다. 그 소리가 군주인 효공에게 이르렀지만 오히려 효공은 상앙을 더욱 신임하고 그 법을 엄격히 펴나갔다. 백성들은 죄를 지으면 벌을 받음을 알게 되고 간악을 발고하니 죄짓는 자와 벌 받는 자가 줄어들었다.”

 

군주의, 군주에 의한, 군주를 위한 나라

국가가 강해지려면 무엇보다 왕권이 강해져야 한다. 법도 실제로 강한 왕이 없으면 만들어질 수도 적용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한비자는 절대적 왕권을 주장한다. 또한 절대적 왕권의 실현을 위해 ‘형명동참(刑名同參)’과 ‘신상필벌(信賞必罰)’의 방법을 제시한다. 형명동참이란 신하들을 평가할 때 신하들이 말한 것과 실제 이루어놓은 것을 대조해서 평가한다는 뜻이다. 모든 신하들을 엄격하게 이 원칙에 근거해서만 평가하고, 그 평가에 근거하여 잘한 자는 상을 주고 못한 자는 반드시 벌을 준다. 이것이 신상필벌이다. 이렇게 하면 신하들은 함부로 말을 못하고, 또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하게 된다.

왕권을 유지하고 나라를 바로세우는 방법은 신하를 잘 부리는 것이다. 잘 부리려면 공정해야 한다. 그 시작이 죄를 지은 자에게 벌을 주고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이다. 공정은 말처럼 쉽지 않다. 때문에 한비자는 공정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명민한 군주는 그 신하를 기름에 반드시 법으로써 한다. 신하를 바로잡음에 책임을 묻는다. 때문에 아무리 어질고 평판이 높다 하여도 죄가 있으면 그 죄를 용서하지 말아야 하고, 큰 죄가 있으면 사형에 처하고 비록 작은 죄라 할지라도 벌을 내려야 한다. 형벌을 내림에 죽을죄를 면해주거나 용서해주면 군주의 힘은 약해지고 나라도 위험에 처하게 되며 나라에 권세를 잡는 자가 나타나게 된다.”

이밖에도 신하를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통제해야 한다. 왕은 자신의 의중을 철저하게 감추어야 하고, 시험하기 위해서 일부러 신하에게 아는 것을 물어봐야 한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을 서로 비교 평가하고, 가끔 거짓말로 신하를 떠보기도 해야 한다. 왕은 자신을 드러냄에 신중해야 한다. 왕이 자신을 드러내면 신하는 왕의 뜻에 영합하려 한다. 군주가 먼저 의견을 말하면 아첨하려 한다. 신하의 의견을 듣고 좋은 것을 쓰고 신하가 스스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왕의 도(道)다. 군주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신하는 그 마음을 몰라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학파의 장점을 취하다

한비자는 다양한 학설을 연구했다. 순자에게서 객관적인 현실 인식, 합리주의적 정신, 법에 가까운 개념으로서 예에 대한 인식 등을 배웠다. 노자, 장자의 사상에서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정치술’, ‘우민정치’ 등을 배웠다. ‘무위이무불위’란 하지 않지만 못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왕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지 못할 것이 없는 정치라는 말이다. 한비자는 ‘형명법술’의 학을 깊이 연구하고 좋아했다. 여기서는 부국강병의 정치술로서 엄격한 법에 의한 통치, 신하를 부리는 방법 등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한비자는 당시에 존재했던 다양한 학파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장점을 취했다.

한비자는 원래 ‘한자’라고 불렸다. 그러나 송나라 때 책 이름이 《한비자》로 바뀌었다.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필명이 높았던 한유(韓愈)가 ‘한자’로 불렸기 때문이다. 송나라 때 유학의 세력이 커지면서 법가였던 한비자가 한유에게 밀려 원래의 이름을 빼앗겼던 것이다.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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