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정; 2019년 11월 16일(토)-17일(일)
- 여정; 광주-함양 동호정-화림교-농월정-안의초-허삼둘가옥-광풍루-승안사-정여창 묘-남계서원-청계서원-일두고택-상림-화수정-함양 교산리 석조여래좌상-학사루-오도재-벽송사-덕진리 마애여래입상
- 해설자; 허경도(문화재 복원 전문가)
- 함양답사자료.PDF
대숲을 일렁이다 휙 떠나는 바람처럼 우리는 늘 일상을 탈피하고 싶어 한다. 비라도 뿌릴 듯이 하늘은 잿빛으로 가라앉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허허로운 들판이 스산하다. 함양에 들어서자 먹구름 사이로 쨍하고 햇살이 발을 뻗었다. 곳곳에서 사과나무 과수원 은박지가 반짝거린다.
동호정 주차장에 도착하니 허경도 선생님이 먼저 오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 건너에 제법 규모가 큰 정자가 있고 뒤편에는 얼음을 쌓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보니 차일암 너럭바위가 가을 양광에 반사된 모습이 내 눈을 홀렸다.
암반 위 정자 기둥은 자연 그대로의 툭툭 자른 울퉁불퉁한 나무를 써서 멋스럽다. 왼편으로 돌아서니 결이 살아있는 투박한 통나무계단 두 개가 잇대어 경사가 급하게 놓여있다. 신발을 벗고 결의 감촉을 느끼며 계단을 오르니 단청이 화려하다. 둥근 모란과 연꽃, 국화 사이사이에 공자의 일생이 중국풍으로 그려졌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천장 가운데 여의주를 물고 있는 청룡과 통통한 물고기를 물고 있는 백룡이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호랑이, 학, 매화꽃 등 유불선(儒佛仙)의 정신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정자에는 뒷면을 막은 벽이 있는데 방을 들인 흔적이다. 이는 남부 지방 정자의 특징이라고 한다.
너럭바위 사이로 투명한 물이 흐르고 웅덩이처럼 패인 곳에는 시린 물이 자란자란 고여 구름이 쉬어가고 있었다. 바위에 쓰인 금적암(琴笛岩)과 영가대(詠歌臺)란 글씨를 보면 선인들이 풍류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가야금의 선율이 이 너럭바위에 가득 퍼졌을 것이다. 시를 읊고 탁족을 즐기며 옛사람들의 풍류를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은 어울리지 않은 나의 욕심이리라.
산기슭 데크를 얼마쯤 걸었을까.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동호정의 풍경이 운치있다. 허경도 선생님이 계곡 쪽으로 돌출한 평평한 바위를 가리키며 포토존이니 사진 찍고 가자고 해 옆에 있던 김용범 선생님이 섰다. 바위에 물기가 있었던지 순간 휘청 하더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순식간 일어난 일이라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바로 물위로 올라온 김 선생님은 괜찮다고는 하지만 많이 놀라고 그 상황이 실감나지 않았을 것이다. 추운 늦가을 날씨에 물기가 뚝뚝 떨어져, 서정휴 선생님과 함께 급히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경각심이 들어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함양군에 건의하여 위험을 알리는 팻말이라도 걸고 보호막을 만들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길을 벗어나 평길을 걷다보니 화림계곡으로 이어진 낙엽 쌓인 돌계단이 보였다. 계곡 쪽으로 비스듬히 서있는 우람한 소나무의 휘휘 뻗은 가지위로 투명한 가을 햇살이 솔잎 시소를 타고 있어 눈부시다. 마른 낙엽들은 발밑에서 여윈 몸을 부딪히며 보삭거린다. 계곡의 물소리도 귓바퀴를 돌아 내 무딘 감성의 비늘을 일으킨다. 기품 있는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들이 중간 중간 눈길을 붙든다. 갈색과 노란 계곡의 풍경에 초록 소나무와 길섶의 선홍빛 공작단풍이 구색을 맞춘다. 어느 결에 바람 건반을 타고 내려온 공작단풍잎이 은주 선생님의 까만 모자위에 붉은 가을을 빚어내고 있었다. 숲속 오솔길의 정취에 푹 빠져있다 눈을 드니 계곡, 기암괴석 위에 사뿐히 앉은 빼어난 절경의 거연정이 보였다.
오랜 수령의 나무들이 정자를 감싸 안아 얼핏 한 덩이의 섬 같기도 하다. 정자를 이어주는 화림교를 건너면 속세의 일은 흐르는 물소리에 다 잊을 것만 같다. 화림교 아래 계곡물은 담청색이다. 물길 맞닿은 바위 양쪽으로 하얀 줄이 이어져 있다. 오랜 세월, 햇빛과 바람과 물결이 만들어낸 색깔이리라. 굴곡이 심한 천연 암반에 맞추어 비스듬히 깎은 나무기둥도 있고 제각각 모양과 길이가 다른 기둥을 세워 자연에 동화된 건물을 지어낸 솜씨는 정말 훌륭하다. 정자 오른편에는 갈대와 억새가 무리지어 늦가을 양광에 손을 흔들고 있다. 김용범 선생님이 옷을 갈아입고 밝은 얼굴로 서정휴 선생님과 함께 돌아왔다. 차를 타고 농월정으로 이동했다.
계곡 쪽으로 고운모래를 밟고 지나니 넓디넓은 너럭바위들이 수없이 이어졌다. 그 사이를 맑은 물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세차게 흐르고 있다. 그 경이롭고 수려한 풍광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화강암 바위에 흰 줄이 쭉 나있는데 그것은 석영이며, 정으로 내리치면 선을 따라 바위가 일직선으로 갈라진다고 한다.
너럭바위 사이의 옥류를 뛰어넘어 건너편 농월정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물길을 건너려면 서로 손을 잡아주고 끌어줘야 했다. 운동신경 둔하고 짧은 다리를 가진 나 같은 사람은 눈을 질끈 감고 다리를 최대한 힘껏 뻗어야만 했다. 농월정은 2003년에 불타 새로 지어져 단청이 산뜻하다. 여기저기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시인묵객들의 시구가 바위에 새겨있다. 오른편에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 杖구之所)라는 음각이 보인다. 지족당 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노닐던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음풍농월 하기는 힘들겠지만 박전일 선생님이 왔다면 저 너럭바위에 질펀하게 앉아 단풍잎 띄워 막걸리를 마셨을지도 모를 텐데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다.
오후의 첫 여정은 안의초등학교에서 시작했다. 겨울 채비를 하느라 몸통만 남은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우리를 맞이했다. 교정 오른편에 연암 박지원의 사적비가 있다. 그 시대 대표적인 진보사상을 지닌 문사(文士)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이곳에 안의현 관아가 있었다고 하니 시대는 다르지만 연암 선생님이 머물던 자리에서 시간의 사슬을 이어, 애민정신으로 선정을 베풀었을 그를 그리며 교정을 둘러봤다.
초등학교에서 몇 걸음 걸으니 낮은 돌담 너머 허삼둘 가옥이 보인다. 사랑채 정면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니 북향의 솟을 대문이 나왔다. 이집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에 지어졌다. 그 시절 백두산 인근의 목재를 기차로 옮겨와 신의주에서 뗏목으로 또 기차로, 여기까지 가져와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 집의 백미는 안채의 부엌에 있다. 그 시절이 개화기이고 사대부가 아닌 부농의 집안이긴 하지만 가부장제로 남편의 권위가 대단했던 때, 허삼둘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손수 집을 설계 했다고 하니 놀라웠다. 그리고 집의 명칭도 남편이 아닌 안주인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다.
부엌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여성의 동선을 최소화하가 위해 요모조모 세심하게 설계된 집이다. “ㄱ”자 안채 모서리에 과감하게 부엌을 배치한 독창적인 구조다. 모서리에는 마당에서 부엌으로 바로 드나들 수 있도록 툇마루보다 낮게 작은 통로와 문을 만들었고, 통로 위쪽 좌우에 시렁과 수납장 설치되었다. 부엌 안은 중간에 기둥 둘만 서 있어 넓게 사용하도록 하였고 X형 널판 틈새로 햇빛이 들어와 환하다. 부엌 뒷벽에 판문을 달아 후원 텃밭에 편하게 다니도록 한 것도 인상적이다. 주택에 대한 전통과 경계를 무너뜨린 안주인의 호방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는 안행랑채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허경도 선생님의 설명도 듣고 질문도 했다. 몇 번 불이 난 흔적이 남은 이 집에 사람이 기거하여 좀 더 잘 보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호강을 따라 걸어 나오니 처마가 날렵한 제법 큰 규모의 광풍루가 보인다. 안의현 관아에서 공식적인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한다. 주변이 잘 정비 되어 있고 왼쪽으로는 소나무와 비석이 있다. 광풍루는 화림계곡에서 내려온 금호강의 물길을 내려다보고, 우리는 아래에서 광풍루를 올려다봤다. 정여창, 박지원, 조영석 등 안의 현감을 지낸 분들의 발자취를 느껴보려 했다. 항상 공재 윤두서와 함께 기억하는 관아재 조영석은 시, 서, 화에 능한 분이다. 영조가 숙종의 어진을 그릴 때 참여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관아재는 천한 재주로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관리보다는 화가로 우리와 더 친숙하다.
다음 답사지인 승안사의 절터로 이동했다. 채마밭 초입에 고려 초기의 탑인 삼층석탑이 있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상층 기단부 각 면에 입체감이 잘 드러나는 부처와 보살, 비천상 등이 새겨져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붕돌의 귀퉁이와 끝 부분이 많이 깨져있다. 탑의 꼭대기에 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이 이채롭다.
오른편 계단으로 올라가니 성리학의 대가인 일두 정여창 묘지가 나왔다. 묘지는 숲에 둘러싸여 아래에서는 묘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올라가는 돌계단은 마른 잎과 단풍으로 덮였고 양쪽으로 붉은 단풍나무 숲이 고즈넉하다. 정여창은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화를 입어 함경도 종성, 유배지에서 사망하고, 갑자사화로 부관참시 당했다.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복권되었다고 한다. 굴곡 많았던 삶을 이 안온한 숲 속에서 내내 위로 받고 있으리라. 묘 우측에 그를 기리는 신도비가 서있고 양쪽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있다. 위쪽에 정경부인 완산 이씨의 묘가 자리한다. 부부는 보통 합장하거나 나란히 묘를 쓴다고 알고 있는데 뜻밖에도 부인이 묘가 더 위에 있었다. 무덤 좌우는 계곡이고 좁은 능선이 길게 뻗어있는 형세다.
내려가는 길에 전각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앞에 섰다. 좌상이라고 했는데 상체만 서있는 모습이다. 왼팔은 부러졌고, 하체부분은 파손된 듯하다. 대부분의 고려 불상이 대부분 그렇듯이 몸과 머리의 비례가 맞지 않았다. ‘여래’라고 하지만 아직 용맹 정진해야 하는 비구의 모습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투박한 모습과 살짝 미소를 띠는 것 같은 표정이 이웃 청년처럼 친근해 보인다. 어찌 보면 절에 갓 들어온 불목하니의 서툰 몸짓 같기도 하다. 단체 사진을 찍고 남계서원으로 향했다.
정여창의 위패를 모신 남계서원은 1552년(조선 명종 7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건립되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서원 앞에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렸다. 홍살문을 지나 대문격인 풍영루의 퇴색한 단청은 세월의 무게를 더하여 고졸미가 있다. 왼편으로 묘정비각에 비석 지붕의 채색도 이채롭다. 양쪽으로 동재와 서재가 각각 방 한 칸과 누마루 한 칸으로 규모가 작다. 방은 두 사람 정도만 들어가 공부를 해도 꽉 찰 것 같다. 중심에는 강학 공간인 명성당이 위용을 드러낸다. 뒤편으로 가파르게 이어진 계단을 오르며 엄숙한 마음을 다잡는다. 사당 입구에 수문장처럼 단단한 근육질의 배롱나무가 등을 굽혀 우리를 맞이한다. 구릉에 위치한 서원은 자연에 순응하며 자리 잡았다.
우리가 사당까지 돌아보는 동안 황 선생님과 유미정 선생님은 비석 보호대를 두 손으로 붙들고 묘정비 쪽으로 머리를 디밀고 비문 해독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바로 옆 김일손 선생을 모시는 청계서원에 들렀다. 옆으로 누운듯하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사방으로 넓게 가지를 드리운 둥근 수형(樹形)의 소담스러운 노송이 사원의 풍치(風致) 를 더한다. 길을 재촉하여 개평마을로 갔다.
골목길에 깔린 박석을 밟고 가지런한 돌담길을 따라가니 일두 고택이 나왔다. 솟을대문 안쪽으로 홍살문과 함께 붉은색 목판의 편액이 눈길을 끈다. 솟을대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방이 두 칸 이어졌다. 사랑채에 일필휘지로 힘차게 써내려간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큰 글이 벽면에 붙어 있어 위엄이 느껴진다. 돌계단을 올라 마루에 앉아 하루 종일 지친 다리를 쉬었다. 누마루 앞 석가산에 아름드리 노송은 비스듬히 가지를 뻗어 누마루와 어우러져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사랑채 맞은 편 화단에는 교목처럼 키 큰 전나무가 서있다. 이 두 그루의 나무가 이 집의 당당한 기품을 더해준다. ㅁ자형 가옥에 정원을 만들면 困(곤궁할 곤)자가 되어 가난해진다고 정원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좌측에 있는 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갔다. 마당에는 나무 뚜껑을 덮은 둥근 우물이 있다. 뒤꼍으로 가니 굴뚝에서 연기가 난다. 아궁이 철문 사이로 장작이 타고 있는 정겨운 모습이 보인다. 사당은 공사 중이다. 조상에 대한 자부심이 없었다면 사적인 공간을 여행객들에게 개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두 고택 맞은편에는 솔송주를 상품화한 솔송주 문화관에 잠시 들렀다. 잘 가꾼 화단이 멋스럽다. 다시 고샅으로 나와 돌담을 따라 동네를 한 바퀴 돌다보니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윈 햇살이 뉘엿뉘엿 넘어가고 어스름이 내려앉으면 집집마다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골목에는 아이들 부르는 소리가 가득했던 그때가 그립다. 흙돌담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아치형 나무문이 사랑스럽다. 언덕배기에 있는 정일품 명가에 올라 바라보니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개평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마을이 오래오래 지금의 모습을 간직하기를 바랐다
밤에 일을 마친 고윤희 선생님이 합류해서 좋았다. 정일품 명가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몸을 구워가며 일숙(一宿)을 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인 상림 숲으로 갔다. 숲에 들어서자 저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다양한 수종의 잎새가 색색으로 물든 늦가을 정취가 천년의 숨결로 다가왔다. 고독한 조락(凋落)의 행렬은 이어지고, 수북이 쌓인 낙엽의 포근한 정적의 감촉이 감미로워 발길이 사붓이 떼어졌다. 세월은 점점 여위어 갈 터, 길 가장자리에 푸른 맥문동 잎이 시간을 역류하여 한때 은성했던 갈매빛 함성을 들려준다.
소리 없이 가을비가 내린다. 몇몇 회원들이 우산을 가지러 간 사이, 몇몇은 잠시 화수정에 올라가 비를 그었다. 앞쪽 연못에 연꽃은 벌써 이울고 갈색으로 부서진 흔적만이 황량하다. 비를 긋고 난 숲은 시간이 멈춘 듯 한결 고즈넉하다. 젖은 낙엽에서 황갈색 가을 냄새가 난다. 이 숲은 신라 진성여왕 때 함양태수 최치원이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조림한 것이라고 한다. 느티나무와 서어나무가 합쳐진 연리목을 지나 왼쪽 오솔길로 접어들자 이은리 석불이 있다. 양쪽 손은 사라지고 둥근 구멍만 남았다. 광배의 두광에 연꽃잎이 장식되었다. 머리와 몸의 비례가 맞지 않은 고려시대 불상이다. 옆으로 긴 반달 모양의 눈과 작은 입이 인자해 보인다. 사진을 찍고 숲 안쪽으로 가자 3.1 운동 만세 기념비, 4.19를 기념하는 비, 문창후 선생 신도비 등 역사 유적들이 있다. 문창후 최치원 신도비의 초석인 거북이 이빨 사이로 여의주를 물고 웃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찬란한 가을은 짙은 여운을 남기고 지고 있다. 가는 가을을 붙잡아 이곳의 추억을 두 눈과 가슴에 오롯이 담아두고 싶다.
다시 차를 타고, 고려 초기 불상인 ‘함양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을 보러 함양 중학교로 갔다. 학교 교실 앞에 거대한 불상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광배도 없고 머리 한쪽은 깨졌고 코도 없고 얼굴도 닳았다. 오른 손도 깨졌지만 땅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무릎에 올려 좌선하는 항마촉지인 자세이다. 긴 귀와 미소 짓는 듯 두툼한 입술을 지닌 부드럽지만 당당한 모습이다. 날마다 학생들과 함께하니 참 행복한 부처님이다.
함양 군청 옆 학사루로 이동했다. 김종직이 함양군수 재임 시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해 무오사화의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학사루는 한때 함양초등학교 교실과 도서관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누각위로 올라가니 한쪽에 교탁 같은 것이 놓였다. 용무늬 단청도 화려하다. 자연석 주추 위에 기둥을 올렸는데 연꽃무늬로 조각된 주추도 눈에 띈다. 점심을 먹으려면 시간이 좀 남아서 조선시대의 객사가 있었다는 함양초등학교 앞 공원을 천천히 산책하면서 허경도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함양 중학교에서도 그랬지만 곳곳에 유물 조각들이 흩어져 있어 이곳이 유서 깊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나 같은 문외한은 그냥 깨진 돌쯤으로 보아 넘겼을 것이다. 김종직이 심었다는 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가 함양의 역사를 알려준다.
점심을 먹은 후 허경도 선생님은 수리를 맡았던 산청 율곡사에 들러 가겠다고 길을 떠나셨다. 질문을 하면 바로 답해주고 답사의 묘미를 안겨주던 허 선생님이 가시자 가슴 한켠이 허전해진다. 일정이 바쁜 몇몇 회원도 먼저 돌아갔다.
지리산의 제 일문 오도재에 올라 차에서 내렸다. 속리산 말티고개처럼 구불구불 휘돌아 가는 길이다 중앙선을 중심으로 도로 양편의 색깔이 달라 더 아름다워 보인다. 얼마쯤 지나 지리산 조망공원에서 잠깐 내려 전망대에서 사진도 찍고 지리산의 전체능선을 한꺼번에 조망했다.
지리산 칠선 계곡 입구에 다다르니 좁고 경사가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나왔다. 험한 산길을 따라 단풍이 아름다운 비경 속으로 들어갔다. 길 끝에 제법 규모가 큰 벽송사(碧松寺)가 고요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누각도 없어 곧장 계단으로 올라갔다. 절 한가운데 대웅전이 아니고 선방이 있는 것도 색다르다. 단청도 없이 그냥 소박하고 단아한 절집이다. 원통전으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 도드라진 연꽃 조각이 탐스럽다. 벽송사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300년 넘은 수간(樹幹)이 곧은 우람한 교목이 고독한 수도승처럼 독야청청하고 있는 모습이다. 절집의 모든 건축물 끝에서 선을 긋는 다면 전부 이 소나무 우듬지에 귀결 될 만큼 벽송사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티베트의 순례자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청신한 기운을 느끼며 소나무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절의 맨 위쪽에 지지대에 몸을 의탁한 소나무가 서있고 삼층석탑과 부도탑이 있다. 이 삼층석탑은 신라의 형식을 충실히 계승한 조선시대 석탑이라고 한다. 석탑은 보통 대웅전 앞에 자리하는데 절의 맨 뒤쪽에 있는 걸 보면 이 자리가 원래 절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을 바라보니 지리산의 천봉만학(千峯萬壑) 산세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계단을 내려와 왼편 입구 전각으로 가니 두 목장승이 서있다. 여장승은 머리가 타버려 한쪽 눈도 반만 남고 코도 가운데가 사라지고 입까지 갈라진 참담한 모습이 애처롭다. 그 옆을 지키고 있는 호법대장군(護法大將軍)의 툭 튀어나온 왕방울만한 눈과 뭉퉁한 주먹코는 질박한 모습이다. 화가 난 듯 좀 무섭게 보이지만 친숙하다. 사찰에 들오는 악귀도 퇴치한다니 사천왕이나 수문장 역할을 대신하는 모양이다. 황 선생님과 세경 선생님, 윤희 선생님, 은주 선생님도 광주를 향해 먼저 떠났다.
현주 선생님 차에 남은 우리는 답사 일정을 마지막까지 완수해야 한다는 의무라도 진닌 양 당당하게 덕진리 마애여래입상을 보러갔다. 새로 단장한 계단을 오르자 커다란 화강암 암벽에 장대한 체구의 마애불이 서있었다. 다른 고려 불상은 머리가 컸는데 이 불상은 몸에 비해 머리는 작은 편이고 하체가 유난히 길다. 손도 큼직한 발등에 비해 작다. 왼손은 바위에서 돌출 되어 입체감을 드러낸다. 광배는 몸 전체를 감싸고 있다. 뭔가 고뇌에 찬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부처님의 고뇌를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삶의 괴리에 늘 갈등하는 나도 잠시 눈을 감아 본다. 이번 답사에서 본 여래 입상은 모두 고려 시대에 제작 된 것이지만 각각의 개성이 있다.
이틀 동안(11/16~11/17)의 짧지만 긴 여정을 마치고 다시 실팍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함양의 가을은 내 마음에 오래 오래 고여 있을 것이다. 함께한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보낸다.
김정희(고전공부모임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