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너무 몰랐다. 김용옥
개인에겐 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인간은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등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하늘로부터 부여받았다고 하지 않던가? 인류의 역사는 생각할 자유, 철학할 자유를 포기하지 않은 댓가로 죽음의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원조’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우리 한국사에서 자신이 품어온 신념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바친 이의 이름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다 죽은 군인은드물다. 1948년 10월 19일 밤 10시, 제주도를 토벌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이 명령을 거부한 용기 있는 군인이 있었다.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장교, 김지회와 홍순석, 이기종이었다. 그들은 출병을 거부하는 뜻을 밝힌 한 장의 호소문을 뿌렸다.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동족상잔 결사반대
2.미군 즉시 철퇴
제주토벌 출동거부 병사위원회
제주토벌은 자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무장한 군인이 무장한 적군을 향해 전개하는 적대 행위가 전쟁이라면, 제주도 토벌은 전쟁이 아니었다. 선무를 전제로 하는 진압도 아니었다. 무조건 살상하는 토벌이었고, 이름 그대로 학살이었다. 따라서 제주도민을 토벌하라는 명령은 명백히 비인도적인 명령이었다. 1980년 5월 20일 전두환의 발포 명령을 거부한 용기 있는 계엄군이 있었던가? 1895년 곰나루 우금치에서 농민을 살해하라는 관군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군인이 있었던가?
포상을 해주어도 부족할 젊은 군인에게 이승만이 뒤집어씌운 올가미는 ‘반역죄’였다. 반역죄가 성립하려면 군인들이 새로운 정권을 세우고자 한 계획이 전제되어야 한다. 여순 항쟁의 어디를 보아도 권력 찬탈의 혐의는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남녀아동까지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해서…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할 것”을 이승만은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남학생이거나 여학생이거나 총살의 대상이 되었다. 15세 이상 45세 이하는 반란군 가담 조사를 받기 위해 초등학교마당에 수용되었다. 시월도 이미 기울어 찬 서리가 사정없이 내리는 밤, 꿇어앉은 무릎 밑에 모래알이 아프게 들어박히면서 사람들은 경각을 모를 위태로운 자기 생명을 조마조마 어루만지는 것이었다.“(<민주일보> 1948년 11월 3-5일)
우리는 너무나 오랜 시일 방관하였다. 그래서 하늘도 높은 10월 어느 날, 우리는 여수의 역사유적을 찾았다. 중앙동에 세워진 인민대회장소 안내판에 갔다. 슬픈 일이었다. 아직도 잘못된 역사는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때 궐기한 애국 군인들과 여수 민중이 여전히 “반군”(the rebel troops)으로 규정되었다. 순간 뚜껑이 열렸다. 나는 따졌다. 왜 이분들이 ‘지방좌익’이며, ‘반군’이냐고 항의하였다.
황정주, 그도 14연대에 소속된 애국 군인이었다. 그의 친가는 황정주가 여순항쟁 과정에서 죽은 것으로 알고, 해마다 10월이 오면 제사를 지냈다. 죽은 것으로 알았던 황정주는 해남 두륜산 속에 숨어 있다가 해남군 북평면 에 사는 형님(황길주) 댁으로 내려왔다. 1950년 봄이었다. 황정주의 조카 황승우(당시 12세, 혜당 스님)는 측간에 갔다가 손엔 총을 들고 있고, 수염이 얼굴을 뒤덮은 삼촌을 발견하고선 놀라 자빠졌다.
삼촌이 돌아왔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형님 황길주는 입을 앙당 물었다. 살아 돌아온 동생에게 ‘어디에서 지냈느냐, 밥은 먹었느냐’고 물어볼 것 같기도 하였지만 형의 입에선 무거운 명령이 떨어졌다. “그 총으로 우리 새끼들을 다 죽이고 가라.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총을 버리라.”
동생 황정주는 해남경찰서에 자수하였다. 이후 부모님이 사는 완도군 불목리 고마도에 가서 생환의 소식을 전한 후, 매일 완도와 해남을 왕복하며 경찰의 조서를 받았다. 노래를 잘 불렀던 삼촌 황정주는 12살 조카 황승우에게 “목포의 눈물”을 가르쳐주었다. 조사가 끝나고 보도연맹원으로 편입되었다. 1950년 6월 26일 황정주는 완도 앞바다에 수장(水葬)되었다.
비극은 대물림하는가? 1950년 아버지와 삼촌의 비극은 1980년 황지우와 나(필자)의 비극으로 재현된다. 1980년 6월 황지우 시인은 성북경찰서에 끌려가 보름 동안이나 고문을 당했다. 이 비극을 예견이나 했을까? 황지우가 <연혁>으로 등단한 것은 1980년 4월이었다. 그 시는 슬픔의 이미지로 자수한 한 편의 환타지였다. <연혁>은 수장당한 삼촌에 드리는 헌시가 아닐까?
“삭망(朔望)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물가 사람들은 머리띠의 흰 천을 따라 내지(內地)로 가고 여인들은 환생(還生)을 위해 저 우기(雨期)의 청태(靑苔)밭 넘어 재배삼배(再拜三拜) 흰떡을 던졌습니다. 저는 괴로워하는 바다의 내심(內心)으로 내려가 땅에 붙어 괴로워하는 모든 물풀들을 뜯어 올렸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붙들었고 내지(內地)에는 다시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아버님이 끌려가신 날도 나루터 물결이 저렇듯 잠잠했습니다. 저는 어느 외딴 물나라에서 흘러들어온 흰 상여꽃을 보는 듯했습니다. 꽃 속이 너무나 환하여 저는 빨리 잠들고 싶었습니다. 아버님을 태운 상여 꽃이 끝없이 끝없이 새벽물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내륙(內陸)에 어느 나라가 망하고 그 대신 자욱한 앞바다에 때 아닌 배추꽃들이 떠올랐습니다. <연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