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 전봉준과 을사6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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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과 을사6적

 

‘이희’라는 사람을 아시는지? 이희라는 이름은 몰라도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고종을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고종이 참 매력 있는 사람이던데요? 서양 외교관들이 고종에 대한 글을 봤는데 커피도 즐기고 농담도 잘 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대요. 아버지와 마누라에 치어 산 무능하고 불쌍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던데요?”

얼마 전, 후배 작가로부터 받은 전화다. 그딴 걸 대단한 발견이라고 놀라다니 한심하지만, 남 이야기가 아니다. 나 자신도 예전에 쓴 글에서 그런 식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안재성, <전봉준>, 아이세움, 2009.

고종 이희와 그의 8명의 부인 중 첫 아내인 민자영에 대해서 보다 냉정한 시각을 갖게 된 것은 <전봉준>을 쓰면서였다. 일반인용 평전이 아니라 청소년용으로 쓴 위인전이었는데, 들어가는 노력은 차이가 없어서 많은 자료를 탐독하고 전라도 일대를 뒤지고 다니는 동안 대원군 이하응과 그의 아들 부부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망해가는 약소국의 무능한 왕인 이희가 서양 외교관들에게 자상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는 여전히 생사여탈권을 쥔 절대 권력자였다. 민자영 역시 제국의 왕비들보다는 못해도 대단한 사치를 부리며 살았고 김옥균의 암살을 지시하는 등 왕과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했다. 신하들은 고종과 왕비를 무척 무서워해서 그 앞에서 고개도 함부로 들지 못했다. 조선이 아무리 신하의 나라라지만 왕은 왕이었고, 특정인에 대해 저 놈 죽이라는 한 마디만 떨어지면 바로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례로, 현대식 정치제도의 도입을 내세워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은 봉기에 실패하자 일가가 몰살되는데, 여동생 김균은 사약을 마시고도 양이 적었는지 운 좋게 살아난다. 김균 부부는 신분을 숨기고 충남 서천에 숨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오빠 김옥균은 얼마 후에 복권이 되었지만 김균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계속 숨어살다가 30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희는 전봉준이 만민평등을 내세워 농민봉기를 일으키자 청나라 군대를 끌어오라고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직접 명령한 장본인이었다. 소위 정사(正史)를 가르친다는 우파 역사학자들만 아니라 진보적이니 민족적 시각을 가졌다는 좌파학자들조차도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건 이희가 아니라 민자영이었다느니, 매국적 신하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명백히 고의적인 왜곡이다. 설사 왕비나 신하들이 자기 나라 백성을 죽이는데 외국군을 데려오자고 했더라도, 고종은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는 위치였음에도 거절은커녕, 자기가 앞장서 청나라를 끌어들인 게 분명한 사실이다.

무려 40년이나 왕으로 군림하면서, 백성의 요구나 안위보다 왕실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던 이희 일가의 패착은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상륙과 조선왕조의 붕괴를 불러일으킨다. 전봉준은 일본군에게 침략의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봉기군을 해산하지만 일본이 조선 왕실을 무혈로 장악하자 다시 농민군을 일으켰다가 처절히 패배하고 만다.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조약을 맺은 것도 이희였다. 이완용 등 을사5적들이 도장을 찍었고 이희는 끝까지 도장을 안 찍었노라고, 역사학자들은 좌우 할 것 없이 고종을 비호하지만, 이 역시 이중 잣대의 궤변일 뿐이다. 이희가 진정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나라를 지킬 의사가 있었다면 이완용 등을 척살하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었다. 아니면 적어도 조선인들에게 일본과 투쟁하자고 선언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구체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이희도 을사년 매국노에 포함시켜 을사6적이라 부르기도 한다. 실은 나도 그렇게 부르고 싶다.

냉정한 시각으로 역사 공부를 하다보면 우리 조상 못난 점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당대의 우리 조상이 아무리 못났더라도 그저 못난 것에 불과하다. 진짜 나쁜 놈들은 이를 기회삼아 침략해온 자들이다. 고종의 잘못이 1이라면 일본의 잘못은 100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못난 조상을 미화할 생각은 없다. 백성을 지배하려고만 했지, 백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라곤 없던 지배계급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일본에 저항했거나 피해를 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어떤 짓을 했더라도 받들어 모시는 얼치기 민족주의는 싫다. 식민지시대에 태어나서 일본인처럼 자라나 미국과 전쟁이 터지자 “미영제국 타도하자”는 시 몇 편 썼다고 지금까지도 친일매국노라 규탄 받는 시인도 있는데, 전쟁 선언 한 번 않고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고도 그 자손들까지 호의호식하고 사는 이희 일가의 ‘희생자 코스프레’를 들어줄 아량은 추호도 없다.

필자의 집에서 20여 킬로만 가면 명성황후 생가가 나온다. 마지막 호칭이 황후였으니 일본식으로 민비라 격하해 부르는 것은 나도 싫다. 클레오파트라나 마리 앙트네와트처럼 차라리 민자영이라 부르는 게 나아 보인다. 어떻게 부르든, 40년이나 민씨 일족의 부정부패 세도정치의 정점이던 그녀를 단지 일본인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슨 대단한 성인처럼 모시는 게 우스꽝스럽다. 입만 열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면서, 진짜 역사는 숨겨버리고 감정으로 채색한 엉터리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싫다.

아무튼, 전봉준을 쓰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전봉준은 샌님이고 진짜 동학의 지도자는 김개남이었다. 민요에 나오는 녹두장군은 전봉준이 아니라 김개남이다.”

이 역시 일면의 진실만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동학은 만인평등이 주된 구호였을 뿐 아니라, 봉기의 강령 중에도 ‘왕을 돌아가면서 뽑는다’는 내용이 들어있던 대로, 지도자도 여러 명이었다. 조정은 전봉준을 지도자로 지목하지만, 김개남이니 손화중은 중요 사안 때마다 전봉준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도보를 통한 인편 외에는 연락할 길이 없으니 분산되어 지도해야 했던 탓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전봉준의 사회사상이란 일종의 지방자치제였던 집강소를 빼고는 실체가 모호하다. 동시대의 지식인이던 김옥균과 개화당이 가졌던 구체적인 구상들에 비하면 원칙적인 선언들에 그치는 것 같다.

책을 쓰며 생각해 보기도 했다. 만일 중국과 일본의 방해가 없어 전봉준이 권력을 잡았다면 어떤 정부를 만들었을까? 마치 예수가 이스라엘의 권력을 잡은 것같이 되지는 않았을까? 서로 사랑하라, 만인은 평등하다 같은 대원칙만 있을 뿐, 새로운 사회구성체에 대한 구상이 없으니 결국은 폐쇄적인 종교국가가 되어 중세 유럽과 같은 암흑기가 도래하지 않았을까? 김옥균과 개화당의 실패가 더욱 아쉬운 이유이다.

역설적인 것은, 전봉준을 반역자 무리에서 끌어내어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킨 이가 박정희라는 사실이다.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함이었을까? 반일감정을 자극해 국민을 ‘한 다발’로 뭉치려는 파시즘 전략이었을까? 반일운동의 상징인 이순신, 유관순과 함께 전봉준을 위인으로 만들어 대대적인 성역작업을 한 게 희대의 파시스트 박정희라는 사실이 묘하다.

 

안재성
대한민국 일급 평전 작가. 이재유, 이관술, 이현상 등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모두 안재성의 손에서 평전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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