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콘1] 8. 애덤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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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거지, 이타심에 의존하는 사람_ 애덤 스미스

 

토마스 모어가 근대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활동한 인물이라면 이제 만나게 될 아담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성장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아담 스미스는 1723년에 태어나 1790년에 세상을 떴다. 영국에서는 롯크(1632-1704)와 뉴턴(1642-1727)이 프랑스에선 볼테르(1694-1778)와 루소(1712-1778)가 출현하여 근대 합리주의 사상의 마차를 이끌어왔다면 산업혁명(1760)을 맞이하는 자유주의 경제사상은 이 사람, 아담 스미스의 손에 작성될 운명이었다. 조선 시대로 치면 영조와 정조가 마지막 왕조의 꽃을 화려하게 피우던 시기, 동시에 양반 사회의 고루함과 격렬하게 맞서 연암 박지원이 예리한 필봉을 휘두르던 시기와 때를 같이한다. 우리가 영국에 비해 200년 뒤늦게 공업화의 길을 걸었듯이, 200년 뒤늦게 아담 스미스의 리얼리즘을 공부하는 셈이다.

평생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병만 아니었다면 스미스는 매우 행복하게 살다간 학자였을 것이다. 지금 한 젊은이가 잠옷 차림으로 정원을 거닐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대로 집 밖을 나간다. 먼 길을 멍청하게 생각만 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타고나길 학자로 태어난 것일까? 한번 몰두하면 만사를 잊어버리는 이 젊은이는 길가다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차를 끓이다가 빵 조각을 집어넣고선 “누가 끓였는지, 참 맛 없는 차군” 투덜댄다. 이 젊은이가 아담 스미스이다.

아담 스미스는 1723년 스코틀랜드의 커콜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태어나기 전 두 달 전에 사망하였다. 커콜디는 스코틀랜드의 동해안의 작은 마을인데 소금, 못, 석탄 등 제조업이 흥성한 상업 중심지였다. 열네 살에 글래스고우 대학에 들어갔고, 3년 후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하였다. 1751년 28세에 스미스는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논리학 강좌를 맡게 되었다. 1759년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집필하여 일약 유명한 저술가로 등장했다. 재무장관을 지낸 적 있는 타운젠트가 스미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보시오, 스미스 선생, 나는 최근 당신이 쓴 <도덕감정론>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소. 나에게는 재혼한 아내가 있는데, 이 부인에게 전 남편의 아들한 명이 있다오. 이 녀석을 공부시켜야 하겠는데 선생이 내 아들을 담당해주었으면 하오. 선생의 실력이라면 아들을 훌륭하게 키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오. 내 아내는 전 남편 부르카치 공작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소. 대륙 여행을 하면서 아들을 가르쳐 주면 평생 동안 해마다 연봉 300파운드를 지급하겠소.“

아이 개인 교사로 들어갈까, 대학 교수로 남을까. 우리 같으면 당연히 교수직을 고집할 것인데, 스미스는 전자를 선택하였다. 1764년 대학을 사직하고 프랑스로 건너간 것이다. 하여 약속대로 스미스는 평생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스미스는 대륙 여행을 통해 18세기 유럽 지식인 사회를 휩쓸었던 자유주의, 합리주의 사상의 대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데이비드 흄, 튀르고, 콩디악, 기본, 케네, 그리고 볼테르. 1766년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스미스는 고향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10년 동안 집필에 몰두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온 책이 <국부론>이다.

우리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술집 또는 빵집 주인들의 이타심 덕택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때문인 것이다. 거지 외에는 아무도 시민들의 이타심에만 의존하려는 사람은 없다.”(It is not from the benevolence of the butcher, the brewer, or the baker, that we expect our dinner, but from their regard to their own interest. Nobody but a beggar chooses to depend chiefly upon the benevolence of his fellow-citizens.)

<왕의 남자>가 한국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데에는 주인공 이준기의 여성스런 외모가 한 몫을 했다고 한다. <국부론>을 쓰고 스미스가 ‘경제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데에는 인간의 이기심을 삶의 긍정적 요인으로 부각시킨 바로 이 대목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담 스미스가 살고 있던 18세기 영국은 의연히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던 나라였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 예수의 말씀대로 기독교는 공동체적 경제윤리를 고집하였다. 물건을 거래하면서 폭리를 취하거나,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는 행위는 공동체적 관계를 파괴하는 악행이었다. 에드워드 6세(1547-1553)의 치세에는 종교적 열정 때문에 모든 이자가 금지되었다고 <국부론>은 기록한다.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돈방석에 앉게 된 이탈리아의 부호들은 그들의 종교 생활을 어떻게 하였을까. 베니스와 피렌체의 거상들은 유럽 전역에 은행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부를 축적하여 갔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죄를 범하고, 일요일 날 신부 앞에서 죄를 용서받는 것도 한 두 해지 평생 이 위선적인 생활을 반복해야 했으니 말이다.

유럽의 신흥 상공업자들이 위선적인 종교생활을 하지 않으려면 낡은 기독교의 교리가 개혁되어야 했다. 종교 교혁은 신흥 상공업자들의 돈벌이를 축복해주라는 역사적 요구였다. 하나님이 사람을 내일 적에 맡아야 할 직업을 주었으니, 누구나 자신의 직업에 충실할 것이요, 검소하게 살면서 돈을 모으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는 신교가 출현하게 된다.

루터와 캘빈이 종교적으로 신흥 상공업자들의 이익을 대변하였다면 아담 스미스는 지금 경제 이론으로 그들의 이익을 옹호한다. 그런데 스미스의 논리는 아주 소박하다. 우리가 김치찌개를 끓여 먹을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의 호의 덕택이 아니요, 우리가 퇴근 후 생맥주 한 잔 마실 수 있는 것은 맥주집 주인의 봉사 덕택이 아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은 돈벌기 위한 가게 주인의 이기심 때문이다. 현실에서 타인의 호의에 의존하여 생계를 꾸리는 자는 오직 거지이다. 그렇지요?

현실의 삶을 이끄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스미스의 발견을 찬양하려 하니 입술을 삐쭉이는 철학자들이 있다. 그게 왜 스미스의 발견이어? 나 한비자는 이미 2천 년 전에 그렇게 말했는데?

“의원이 환자의 상처를 빨아 그 고름을 입에 담는 것은, 환자에게 혈육의 정을 느껴서가 아니라 이익을 보고 하는 일이다. 그렇게 병을 고쳐 주면 사레를 받고 많은 사람을 단골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싫지만 하는 짓인 것이다. 수레 제조자는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길 장의사는 사람들이 많이 죽길 바란다. 이는 수레 제조자가 인자하고 장의사가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부유하지 않으면 수레가 팔리지 않고, 사람이 죽지 않으면 관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장의사가 결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사람이 죽어야만 그에게 이익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길 바라는 것이다.”

명언이다.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가 그의 의식을 결정한다. 인간이 어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의 의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의원이 환자의 고름을 빠는 것은 그의 도덕적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이해관계 때문이란다. 장의사는 그의 이해관계 때문에 죽음을 바라는 악마적 심성을 갖는 것이고. 이렇게 한비자는 인간의 이기심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 섭섭해 하는 분이 있다. 스미스의 대선배격인 홉스가 한 마디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에는 투쟁을 초래하는 세 요소가 있다. 경쟁심과 소심함과 명예욕이 그것이다. 경쟁심은 타인의 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고, 소심은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도록 만들며 명예욕은 타인을 비방, 경멸하며 심지어는 폭력을 가하게 한다.”

만일 국가가 없다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홉스는 단언한다. 그야말로 인간을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이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이렇듯 홉스나 한비자나 모두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보았는데, 우리는 유독 왜 스미스의 이기심(Self-Interest)에 주목하는가? 홉스나 한비자 모두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전제로 전제군주의 강력한 통치를 역설하였다면, 이와는 정반대로 스미스는 ‘정부는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말라’, ‘각자 자신의 이기심에 충실하도록 자유방임(Laisses-faire)하라’, ‘그것이 공익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다’라며 자유주의 경제이론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는 공공의 이익을 추진하려 하지 않으며, 그가 어느 정도 공공의 이익을 추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외국 산업 보다 국내 산업을 선호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그가 국내 산업의 생산물의 가치를 극대화시키려는 것도 오직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많은 경우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가 전연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He generally, indeed, neither intends to promote the public interest, nor knows how much he is promoting it. By preferring the support of domestic to that of foreign industry, he intends only his own security; and by directing that industry in such a manner as its produce may be of the greatest value, he intends only his own gain, and he is in this, as in many other cases, led by an invisible hand to promote an end which was no part of his intention.)

저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이 구절에서 등장한다. 아담 스미스하면 떠오르는 이 ‘보이지 않는 손’은 1000쪽이 넘는 <국부론>에서 딱 한 번 출현한다. 아마도 스미스가 이 비유를 집어넣은 것은 기독교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라고 헤겔이 말하였을 때, 절대정신은 기독교의 신을 말바꾸기 한 것이다. 지금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을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흔들고 있다.

중국집 요리사가 최선을 다하여 자장면을 맛있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다. 옷가게 주인이 중심지에다 가게를 내는 것은 손님의 편익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업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요리사나 옷가게 주인은 공익을 추구하지도 않고, 또 자신의 활동이 공익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잘 나가는 중국집은 손님들을 끌어 옷가게에 가도록 도와주고, 잘 나가는 옷가게 역시 중심지 상권을 풍요롭게 하는데 일조한다.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는 활동이 어쩌다 공익의 증진으로 이어지는가? 웬 조화냐? 바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돌보고 있는 것이다. 아멘, 할렐루야.

아담 스미스는 토마스 모어를 비웃고 있다. 당신은 유토피아가 인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 장담하였지. 유토피아의 시포그란테스들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조정하고, 생산량을 파악하고, 물자를 배분하느라 밤잠을 설치겠지. 아마도 시포그란테스들은 자신이 인민들을 위한 선량이라는 대단한 자부심 속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야. 하지만 모어여, 당신의 가슴 속에 불타는 평등의 횃불이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할지라도 시프그란테스의 계산 능력은 런던 골목 시장의 분배 능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오. 공익을 위해 설치는 자들에 의해 어떤 좋은 일이 있었는지 나는 본 적이 없소.(I have never known much good done by those who affected to trade for the public good.)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사회를 자기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모든 전제군주들을 비웃어버렸다.

“그들은 자신의 이상적인 계획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계획이 조금이라도 수정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계획과 관련된 수많은 이해들은 아무 고려도 하지 않은 채, 계획의 모든 부문을 완벽하게 짜나간다. 그들은 장기판에서 말을 두는 것만큼 사회를 계획하는 일을 쉽게 생각한다. 장기판의 말은 손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지만,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사회는 저마다 자신의 독자적인 운동 원리에 입각하여 움직인다. 인간 사회가 독재자들의 의지대로 움직여 준다면 사회는 조화롭게 진행될 것이지만 독재자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경우 사회는 불행하게 된다.”

스미스의 신념은 확고하다. 경제 세계에는 자연스런 조화가 존재한다. 따라서 정부의 간섭은 불필요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정부 조직은 경제에 있어서 무능하다. 관료들이 무엇을 안다는 말인가. 국민이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선호하는 지, 국민 스스로가 자신의 이익을 가장 잘 안다.

스미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본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인간 이기적 본성에 그의 경제 분석의 토대를 놓고 있다.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의 심리에는 두 가지 타고난 특징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가까이 있는 것들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는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첫째 특징이다. 다음으로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욕구를 갖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욕구는 자궁에서 태어나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지속되는 욕구이다. 나며 죽는 동안 사람은 자신의 상황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경우는 단 한 순간도 없다.” (The desire of bettering our condition is a desire which comes with us from the womb to the grave. There is scarce a single instant in which any man so perfectly and completely satisfied with his situation.)

토마스 모어가 대중을 사회의 주체로 파악한 점에서 플라톤을 넘어섰다면, 아담 스미스는 대중을 역사 변화의 창조자로 파악한 점에서 플라톤을 능가하였다. 역사는 철인의 지혜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대중의 창의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다. 스미스의 사상은 이기심을 존중한 점에서 한비자와 유사하다면, 대중의 경제 활동을 존중한 점에서 맹자와 유사하다. 안정된 생산 활동이 안정된 심성을 낳는다.(有恒産 有恒心)

“백성의 생업은 쉴 틈이 없습니다. 시경에 말하기를, 낮에는 들에 나가 띠 풀을 줍고, 밤이면 새끼를 꼬아, 지붕을 이어놓아야, 백곡의 파종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삶은 이러합니다. 항산이 있으면 항심이 있고,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으니, 항심이 없으면 나쁜 짓을 하게 됩니다. 백성이 범죄를 저지른 연후에 형벌을 주는 것은 백성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개선하는가.

“ 나는 작은 핀 공장을 본 일이 있다. 겨우 열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우 가난하였고 기계류도 불충분하였다. 한 사람은 철사를 펴고, 한 사람은 철사를 똑바르게 하고 한 사람은 철사를 자르고 한 사람은 철사를 뾰족하게 하고, 한 사람은 철사의 끝을 간다. 핀 머리를 만드는 일도 두세 가지의 별개의 작업을 필요로 한다. 한 사람은 머리를 붙이고 한 사람은 핀을 희게 간다. 또 한 사람은 핀을 종이에 포장한다. 이리하여 핀 제조 과정이 18종의 세부 공정으로 분할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열 사람은 하루에 4만 8천 개의 핀을 제조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 사람 당 4천 8백 개를 제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서는 하루에 20개도 만들지 못하였을 것이다. ” <국부론>

핀 공장 노동자들은 무슨 힘으로 200배가 넘는 생산성 향상을 이루었는가? 그 비밀은 노동의 전 과정을 잘게 나누는 분업(Division of Labour)에 있었다. 한 나라의 생산력은 분업의 발전 정도에 비례한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분업의 결과 직공의 기능이 숙련되고, 작업 공정 간의 이동 시간이 절약되며, 분업 속에서 기계가 발명된다는 것이다.

호기심 많은 한 학생이 질문을 던진다. ‘샘, 고대에도 분업이 있었던 것 아니에요? 고대의 분업과 근대의 분업이 갖는 차이가 뭔가요?’ 똑똑한 학생이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고대에도 그릇 만드는 도공이 있었고, 조각가가 있었으며, 금속 주물공이 있었다. 잠시 고대 인도로 여행을 떠나 볼까? 그곳엔 수 천 년 동안 동일한 형태로 반복되어온 마을 공동체들이 널려 있다.

“토지는 공동으로 경작되며 생산물은 그 구성원들에게 분배된다. 실을 뽑고 옷을 짜는 일은 각 가정의 부업이다. 농삿일을 담당하는 대다수 주민들 옆에 전혀 다른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재판과 경찰과 징세의 업무를 맡는 공동체의 수장이 있다. 그 밑에 기후를 측정, 기록하는 천문가가 있다. 마을의 경계선을 경비하는 경비원이 있고, 저수지의 물을 분배하는 수문장이 있으며, 종교 의식을 주도하는 바라문이 있다. 이외 대장장이와 목수, 도자기공과 이발사, 세탁사와 은 세공인 그리고 교사와 시인이 산다. 공동체의 분업을 규제하는 법칙은 관습이다. 관습은 자연 법칙처럼 불가항력의 권위를 갖는다. 왕조의 교체도 경제의 기초를 흔들지 못한다.”(<자본론>, 455쪽-김수행 역)

고대 공동체 내의 분업과 근대 공업 내의 분업은 무엇이 다른가? 고대 공동체에서 생산물의 대부분은 공동체 자체의 직접적 수요를 충족하는 물품들인 반면, 근대 공업의 생산물은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상품이다. 고대 공동체에 있어서 생산물을 분배하는 원리는 관습인 반면, 근대 공업에 있어서 각 생산물의 가격을 매겨주어 적당한 보수를 받게 하는 것은 시장이다. 고대 공동체에서 작업자는 물품의 전 공정을 다루는 장인인 반면, 근대 공업의 작업자는 무수히 많은 공정으로 잘게 나누어진 부분 노동의 수행자이다. 요컨대 근대 공업 노동자 그 자체 기계의 부속품이다.

분업은 인간 본성의 하나인 교환 기질에서 생긴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어떤 수렵인이 다른 사람보다 더욱 신속하게 활을 만든다고 하자. 그는 가끔 자신의 활을 동료의 사슴고기와 교환한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자기가 벌판에 나가 사슴을 잡는 것보다 교환하는 편이 더 많은 사슴 고기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이익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활 제작을 자신의 생업으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목수며 대장장이며 모피공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노동생산물 중 자신이 소비하고 남는 잉여부분을 다른 사람의 노동생산물과 교환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특정 생업에 전력하게 된다.

<국부론>은 경제 활동에 관한 방대한 사실들을 담고 있으나, 경제에 관한 스미스의 철학은 매우 소박하다. 인간은 Self-Interest를 추구한다는 것,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하여 사익 추구가 공익의 증대에 기여한다는 것, 인간은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노력한다는 것, 분업과 교환에 의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한다는 것, 분업의 발전이 생산성 향상의 비결이라는 것, 이런 정도이다. 지금은 상식이 되어버린 이 간단한 몇 개의 교리를 하찮게 여기면 경제는 복수를 한다. 농민들의 사익추구를 무시하고 농민들을 집단농장으로 몰고 갔던 스탈린의 패배가 바로 그것이다. 분업이 서구 문명에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의 진술을 들어 보자.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 서문에서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면서 그가 몸담고 있는 서구 문명을 이렇게 압축한다.

“우리 시대의 서구 세계(The Western World)는 두 제도의 지배 하에서 존속하고 있다. 경제의 공업 시스템(Indusrial System)이 그 하나라면, 이에 못지않게 복잡한 정치 시스템으로서, 독립된 국민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는, 의회 대의 정치라 불리는 민주정치(Democracy)가 다른 하나이다. 이 두 제도는 지난 세기 말에 서구 세계에서 굳건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시대가 제기해온 주요 문제들에 대해 잠정적이나마 그 해결책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두 제도의 머리 위에 왕관이 씌어졌다는 것은 시대의 완수를 의미하였고 우리는 그 속에서 구원을 얻었다. 두 제도는 선조들의 창의력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제도들을 창안하지는 않았지만, 그 그림자 밑에서 자라왔다. 공업 시스템 그리고 의회 국민 국가(Parliamentary National State) 속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고 움직이고 있다.”

공업과 의회 민주 정치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두 제도란다. 우리 역시 서구 문명을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그 그림자 밑에서 자랐고 살고 있기 때문에 토인비의 견해에 동의한다. 이어 토인비는 공업 시스템의 본질을 이렇게 제시한다.

“공업 시스템은 두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분업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생활의 물질적 환경에 적용되는 서구의 근대 과학이다.”(The industrial system has a human aspect in the Division of Labour and a non-human aspect in the application of modern Western scientific thought to the physical environment of human life.)

서구 문명은 과학 기술 문명이다. 중학생 시절,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텔레비전이 안방에 턱 자리를 잡았다. 줄지어 냉장고가 들어오고 전화가 가설되고 우리의 삶은 본질적인 변화를 겪어나갔다. 칼러 텔레비전을 처음 보던 때의 눈부심,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자가용이 동네 골목마다 지천으로 깔리기 시작한 것은 1990년도의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거지나 백수나 개나 소나 다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때 사모님들이 무전기만한 손전화를 핸드백에 넣고 다녔는데, 지금은 초등학생들까지 핸드폰을 휴대한다. 나는 기술 문명의 이기(利器)들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No Car, No Phone’을 다짐하였다. ‘아직도 핸드폰이 없어?’ 수없는 핀잔을 받으며 산다. 내 가슴 속에 자리 잡은 기술 문명에 대한 회의(懷疑)는 깊다.

나는 아직도 과학 기술 문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고뇌한다. 버려야 하는 것이냐? 이용해야 하는 것이냐? 절반은 버리고 절반은 이용하는 것이냐? 토인비는 과학기술 문명을 버리려면 분업까지 버려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공업이 과학기술을 가지고 자연을 가공한다면, 공업은 분업의 원리에 의해 생산자들을 조직한다.

 

아담 스미스를 넘어

스미스의 후배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스미스의 사익 추구 원리를 쾌락과 고통의 원리로 공식화하였다. 벤담은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자연은 인간을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전제 군주의 지배 하에 던져놓았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결정하는 것은 바로 고통과 쾌락이다.”

인간은 고통을 기피하고 쾌락을 선호한다. 쾌락은 플러스이고 고통은 마이너스이다. 쾌락과 고통을 합산하여 가장 큰 효용(Utility)을 얻는 것이 사익을 추구하는 인간 행동의 목표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가 가장 합리적인 사회인가? 최대 다수가 최대의 효용을 얻는 사회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의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most people)을 누리는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라는 벤담의 공리주의는 오늘날까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 이념이다.

오늘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지디피(Gross Domestic Products)의 신화는 공리주의에 그 이론적 토대를 두고 있다. 1인당 지디피 1천 달러는 후진국이요 1인당 지디피 3만 달러는 선진국이라, 후진국 국민들은 1인당 1천 달러의 효용을 누리고, 선진국 국민들은 1인당 3만 달러의 효용을 누리는 것이다. 어서 가자, 일인당 3만 달러 선진국으로!

공리주의의 문제점은 쾌락과 고통의 합계를 양적으로 계량할 수 있다는 전제에 있다. 한 사람에게 약이 다른 사람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말처럼 쾌락과 고통은 주관적인 것이요,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공리주의는 간과하였다. 그리하여 벤담의 공리주의 속에 내재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유명한 금언을 내놓았던 것이다. 밀은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를 질적 공리주의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정작 중대한 공리주의의 문제점은 다른 데 있다. 만일 우리 모두가 1인당 지디피의 액수 그대로 물질적 재화를 고루 배분받고 있다면, 공리주의는 그다지 욕먹을 것은 없다. 공리주의의 문제점은 그것이 우리 사회 내에 극단적으로 편재된 부의 불평등을 은폐하고 있다는 데 있다. 사회 전체가 누리는 쾌락의 총량을 합리성의 척도로 간주할 때, 왕의 쾌락은 거지의 고통을 은폐한다. 몇몇 거지들이 고통스런 삶을 살지라도, 그 때문에 왕과 귀족들이 호화 사치를 누릴 수 있다면 이 불평등은 정당하다.

여기 온갖 호화생활을 누리는 ‘마리 앙뜨와네트’가 있고, 빵 한 조각 먹기 힘든 ‘파리의 극빈층 아줌마들’이 있다. 마리 앙뜨와네트가 더 먹는 소고기 한 점은 그녀에게 쾌락을 보태지 않는다. 소고기 한 점의 한계 효용은 제로라는 것이다. 반면 파리 아줌마가 더 먹는 빵 한 조각은 굶주림을 면해 주고 하루의 삶에 안식을 제공한다. 이 빵 한 조각의 한계 효용이 100이라 하자. 벤담의 주장대로 만일 우리 사회가 사회 구성원의 효용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회라면, 부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그 답은 명확하다. 풍요 속에서 더 이상의 쾌락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재화를 보태 줄 것이 아니라, 결핍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재화를 배분하는 것이 전체 사회의 효용의 극대화에 기여할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자유주의와 벤담의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결국 평등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주의를 요청한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자유와 평등을 양립할 수 없는 대립물로 간주하였다.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들은 경제의 효율(Efficiency)을 추구하는 것을 합리적 행동으로 간주하였고, 효율을 위해선 자유로운 경쟁을 자연법칙으로 내세웠다. 그 결과 발생하는 사회의 불평등 은 아프리카 초원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처럼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에 반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들은 경제의 형평(Equity)을 추구하는 것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간주하였고, 형평을 위해선 사회적 연대를 강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발생하는 경제의 비효율이나 노동자의 게으름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자유냐 평등이냐. 자유는 불평등을 낳고, 평등은 자유를 제약하고 어쩌자는 것이냐?

여기에서 자유와 평등의 조화로운 해결을 도모하는 롤즈의 <정의론>이 등장한다. 그가 제시한 정식은 매우 간결하다.

정의의 첫째 원칙
<모든 사람은 기본적 자유에 대하여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전체 사회의 복지라는 명목으로 유린될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를 갖는다. 정의는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을 거부한다. 정치적 거래나 사회적 이득에 의해 정의가 보장하는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이론이 아무리 정치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폐기되어야 하듯이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폐지되어야 한다. 인간 생활의 제1 덕목으로서 진리와 정의는 지극히 준엄한 것이다.

우리는 전체의 공익을 위하여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인간의 자유, 기본권을 동등하게 누려야 한다. 그런데 자유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낳는다. 그렇다면 자유로운 경쟁이 초래하게 되는 불평등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

만일 불평등이 싫어 절대 평등을 추구한다면, 이는 개인의 자유를 억제하게 될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면 그만큼 사회는 답답해진다. 의대생이 의사가 되길 포기할 것이며, 배우 지망생이 배우가 되려는 노력을 포기할 것이다. 절대적 평등은 창의적 활동을 유발하는 동기를 억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두의 손실을 초래한다. 따라서 일정한 정도의 불평등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병과 장교의 불평등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 CEO와 평사원의 불평등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 장교와 CEO를 우대해 줌으로써 그들이 기여하게 되는 국방력의 강화, 경영능력의 증대가 불평등한 대우 때문에 병사와 평사원이 겪는 고통을 상쇄하는 선에서 우리는 차별대우를 용인하면 될 것이다. 단, 누구나 장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CEO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의 최소 수익자(The Least Advantaged)들이 용인할 수 있는 불평등, 사회적 약자들도 이런 정도는 필요한 불평등이라고 동의해주는 불평등이야말로 우리가 관념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가장 정의로운 사회일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 독일이나 스웨덴 국민들이 용인하는 불평등을 롤즈는 이론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일 게다. 이런 맥락에서 롤즈는 정의의 두 번째 원칙을 제기한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조정되어야 한다. 1) 그 불평등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것이 합당하게 기대되고, 2) 그 불평등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에 결부되어야 한다.>

 

행복의 경제학

지금까지 우리는 부의 분배를 둘러싼 벤담과 롤즈의 이론을 지켜보았다. 이제 물질적 재화의 공정한 배분을 넘어, 여러 소중한 인간의 가치로 우리의 사유를 넓히자. 노동과 여가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 아담 스미스에게 놀라운 물질적 성장을 보장하여 주었던 분업 노동은 그 성과만큼이나 혹독한 비용(Cost)을 우리에게 강제한다.

근대 기계제 공업 속에 확고히 정착된 분업 노동은 직업의 분화이길 넘어서, 모든 노동 과정을 기계의 부속품처럼 잘게 자른 노동이다. 이 분업 노동은 죽은 노동이며, 고역이다. 노동자들에게 죽음과 같은 고역의 노동을 강제하여 획득하는 물질적 재화의 과실은 그것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이는 노동자의 삶을 희생물로 바치고 얻은 불행한 댓가이다. 공업의 과실은 달다. 하지만 분업 노동은 쓰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소비자의 삶은 달지만 온종일 자동차 밑에 들어가 용접하는 노동자의 삶은 쓰다.

인간의 본질은 노동에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연과 소통하며, 노동의 과실을 사회에 제공하면서 사회적 존재가 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진화해 왔으며, 노동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한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이 노동의 과정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외적 강제에 의해 통제되는 한, 인간은 불행하다. 자아를 실현하는 이 노동 과정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였을 때, 노동자가 느끼는 것은 비참함이요, 자아의 상실이다.

분업 노동은 폐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기초가 되어 버린 분업 노동의 시스템을 하루아침에 폐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업 노동의 점진적 단축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 노동생산성의 향상은 노동시간의 단축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역사의 합법칙적인 발전이다. 천년왕국이 도래한 이후 누리는 자유가 아니라, 지금 바로 이곳에서 자유는 실현되어야 한다. 노동시간은 단축되어야 하며, 그만큼 많은 자유의 시간이 보장되어야 한다. 여가의 증대는 행복의 원천이자 이 시대가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이다.

여가는 단순한 휴식이길 넘어설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필연의 영역에 발 묶여 사는 노동자들에게 여가는 자유의 활동시간을 의미한다. 생필품을 얻기 위해 불가피하게 수행하게 되는 임금 노동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창조적으로 발휘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창조적 활동은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는 먹거리 농사일 수도 있고, 창조적 활동은 사회적 약자를 돕는 봉사활동일 수 있으며, 창조적 활동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예술 활동일 수도 있다. 인간 행복의 원천이 자아를 실현하는 자유로운 활동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정의로운 사회는 최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여가를 보장하는 사회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행복에 대해 여러 각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공자는 너와 나의 어진 인격적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자신이 소속한 공동체 사람들의 행과 불행은 곧 자신에게 귀속된다. 너와 나의 관계가 얼마나 인격적이냐에 따라 인간의 행복이 달려 있다면, 이제 우리는 분업의 발전 정도에서 국부의 원천을 찾았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넘어 인격적 관계를 도모하는 사회에서 행복한 나라를 찾는 새로운 경제이론을 작성할 필요가 있으리라.

아담 스미스가 사익 추구를 인간의 본성으로 제시하였을 때, 그가 상정한 인간은 근대의 공업을 주도하는 신흥 상공업자였다. <국부론>의 주인공은 상인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웃의 고통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연민, 공감을 또 다른 본성으로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도덕감정론>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상정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이와 상반되는 몇가지 원리들이 존재한다. 이 원리들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지켜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과 동정이 이런 종류의 원리이다. 타인의 비참함을 목격하거나 생생하게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느낀다.”

나의 이익을 양보하면서 너와 나의 인격적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이 행복의 또 다른 원천이라면 오직 물질적 재화의 증대와 사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넘어, 진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새로운 경제학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새 시대의 경제학은 윤리학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가 윤리학을 쓰고 나서 경제학을 집필한 것처럼 이 시대는 경제학을 바르게 이끌어 줄 윤리학의 정립을 요청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 탐색하였다면, 이제 우리는 행복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 탐색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물질의 풍요는 행복한 삶의 한 조건일 뿐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명제를 진지하게 고찰할 때가 되었다. 행복한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

 

황광우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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