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세계관과 ‘하나님’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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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세계관과하나님’ 은유:

[하나님은 엄격한 아버지] 대 [하나님은 자애로운 부모]

나익주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1980년 어느 여름날 아침 텔레비전에서 생중계로 나오던 한 장면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선명하게 찍혀 있다. 전두환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왼쪽 가슴에 이름표를 단정하게 달고 있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사각 모양으로 빙 둘러 앉아 있었다. 카메라가 정면으로 비추는 한가운데에 전두환이 앉아 있었고 그의 양옆과 맞은편 그리고 앞쪽으로 마주 놓인 기다란 탁자 앞에 사람들이 쭉 앉아 있었다. 그의 빛나는 머리만 보아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던 때라 바로 텔레비전을 끄려다가 조금 더 지켜보았다.

 

[전두환은 여호수아]라던 그 조찬기도회

지금도 이름만 대면 바로 알 수 있는 스무 명이 넘는 개신교계의 대표 목사들이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마련한 자리였다(아래 사진 참조). 그들은 전두환에 대해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고 전두환에게 모세 후계자인 “여호수아 장군 같이 되라.”고 칭송했다. 이 장면은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고 머릿속이 절망과 낙담으로 뒤범벅되어 혼란스러웠다. 고통 받고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목사들이 어떻게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살인자를 위해 기도회를 열 수 있을까? 더구나 이 학살자를 어떻게 모세에 뒤이어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에 정착하도록 인도한 위대한 지도자에 비유할 수 있을까? 전두환이 ‘구석구석의 악을 제거하고 사회를 정화한 여호수아’라면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광주시민들은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를 혼란케 하는 악당이었단 말인가?

그 조찬기도회의 목소리는 광주민주화운동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개신교계의 영향력 있는 일부 목사들은 지금도 심심치 않게 광주 학살에 대해 ‘신군부 공수부대가 아니라 북한의 특수부대가 시민에게 발포한 것’(이○윤)이라거나, ‘5.18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북한 간첩의 소행’(김○도)이라거나, ‘5.18을 계기로 친북 좌파가 확산됐으며 주사파가 운동원의 주류가 됐다’(김○홍), ‘5.18은 폭력 자랑할 것 못돼’(고○호)라는 말을 한다. 이러한 목소리는 광주민주화운동이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은 폭력적이고 악한 난동이었고 이 난동에 참여한 시민들을 진압한 행위는 폭도들의 난동이라는 사악한 위기로부터 국가를 구해낸 정당하고 선한 행위였으며 이를 총지휘한 전두환은 위대한 영웅이라는 인식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계 인사들이 모두 다 이 조찬기도회를 주도했던 목사들처럼 정치권력에 협력했던 것은 아니다. 전두환을 민주화를 가로막는 유신 잔당이자 학살의 원흉으로 규정하고 그의 독재 권력에 항거했던 개신교인들도 많이 있었다. 한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류동운’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산화했으며, 감리교청년회 회원이던 서강대생 ‘김의기’는 광주항쟁이 진압된 지 5일 뒤 그 진실을 알리고자 서울 한복판의 6층 건물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사망했다. 비록 조찬기도회 목사들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예배시간에 광주항쟁의 진실에 관한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국군보안사령부 부산분실로 연행되었다가 주검으로 돌아온 목사(임○윤)도 있었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의 독재 정권이 항복할 때까지 천주교의 정의구현사제단과 불교계의 일부 승려들과 함께 기꺼이 투옥과 연행을 감내하던 목사와 교회들도 많이 있었다(아래 사진 참조).

같은 종교의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어떻게 동일한 대상인 ‘전두환’에 대해 정반대의 인식과 행동으로 대립하는지 나는 늘 혼란스러웠다. 개신교계가 세계 내에 존재하는 동일한 대상에 대해 정반대의 인식과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광주항쟁과 전두환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다. 다른 많은 현상을 두고도 개신교계는 정반대의 인식을 토대로 대립해 왔다. 이러한 현상의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이명박 정부의 ‘4대강 개발 사업’이다.

 

4대강 개발: 생명을 살리는 [선]인가 생명을 파괴하는 [악]인가?

이명박 정부가 애초에 구상했던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국민들의 반대로 포기하고 한강과 금강, 낙동강, 영산강에서 대규모로 토건공사를 벌이겠다고 발표했을 때, 한국 개신교는 진보 성향 교단 사이에 의견이 극명하게 갈렸다. 이 균열은 보수 성향 교단들이 모여 있는 한국기독교총연합의 성명서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의 교단이 모여 있는 한국교회협의회의 성명서가 정반대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이 발표한 성명서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보수적인 개신교계는 ‘4대강 개발 사업’을 강 생태계의 복구와 물 부족 문제의 해결, 국가 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강 살리기’라 칭하며 적극 지지했다(아래 인용문 참조).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은 인간과 자연의 생명 둘 다를 살리는 이 ‘4대강 개발’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한다고 보며, 이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사회 갈등을 조장하는 불순한 좌경세력이라고 비난했다. 현재는 4대강의 보를 해체하여 개발 사업 이전의 상태로 강을 되돌리려는 현 문재인 정부의 결정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 지구촌 곳곳에서 이상 기후와 폭설과 폭우와 가뭄 등 국가적 재난이 발생하여 엄청난 재산과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구호와 복구에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 고질적인 물 문제 해결과 지역 활성화에 기여할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적극 지지한다.  (2010.5.25.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4대강 사업’ 지지 성명에서)

반면에 기독교환경운동연대를 비롯한 진보적인 개신교계는 4대강 개발을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오만이자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활동으로 규정하고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조화롭게 사는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 반대 의견을 명확히 표명했다. 진보적인 개신교인들은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 이 개발 사업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교회협의회의 성명서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아래 인용문 참조).

· 자연 생태계는 하나님의 창조의 걸작이며 그 자체로 신비와 영감을 담고 있기에 자연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이에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자연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4대강 사업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2010.7.26.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4대강 사업’ 반대 성명에서)

 

[동성애자]는 [악마]인가 [약자]인가

개신교에서 보수와 진보가 극명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쟁점은 성소수자―특히 동성애자―의 권리를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인식 차이는 대립적이 아니라 사실상 일방적이다. 보수 개신교 일부에서 성소수자들을 향해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고 그들을 공격하며 ‘성평등 조례안’이나 ‘차별금지법’에 성적 지향 관련 조항을 넣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보수 교단들이 연합으로 구성한 이단대책위원회는 시민으로서의 성소수자 권리를 옹호하고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고 퀴어성경주석(Queer Bible Commentary)을 번역한다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다른 교단의 여성 목사(임○라)에게 소명 자료를 제출하고 이단 심사를 받으라고 통보했다. 또한 어떤 개신교 보수 교단은 ‘동성애자는 교회의 항존직(장로·권사·집사)과 임시직, 유급 종사자가 될 수 없다’는 조항을 교회 헌법에 새로 넣었다. 개신교 보수의 이러한 행동은 동성애는 악마가 퍼뜨리는 전염병이고 동성애자는 쫓아내야 할 악마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당연한 귀결이다(아래 인용문 참조).

· 반동성애 불 지른 목사, “동성애 옹호 목회자 쫓아내야 전염병 같은 악한 영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 동성애자와 옹호자의 신학대 입학을 제한하는 안건을 낸 목사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런 사람들 중에 신학교 교수, 목사도 있다. 온 교회 안에 전염병과 같은 악한 영을 퍼뜨리는 행위를 주의 종들이 해서 되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안수를 취소시키고, 면직시키고, 강단에 못 서도록 쫓아내야 한다.…… (2017.9.25 뉴스엔조이)

반면에 비록 아주 소수이지만 성소수자를 교회에서 포용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이라고 주창하는 목사도 있다. ‘동성애자의 하나님은 다른가요? 21주년 맞은 성소수자 교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소개한 성소수자들이 모이는 교회의 기도문(아래 참조)에서 보듯이, 진보 성향의 개신교인들은 어느 누구든지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시민으로서 누려야 하는 사회적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회적 제도에서 소외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어느 누구도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으로 인해 차별과 배제, 멸시, 폭력을 당하지 않는 평등한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보는 인식에서 나온다.

· 모든 생명의 어버이 되시는 하나님, 좋은 날 귀한 지체들과 교회로 함께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여태껏 (성)소수자로 살아왔고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멸시와 차별 앞에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며 살아가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이들의 눈빛과 소리에 주눅이 들어 스스로를 부정하고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담대히 선포하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울고 사랑이 필요한 자리마다 사랑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합니다. (2017.06.17 뉴스엔조이)

 

개신교의 대립적인 두 세계관의 기원:
[하나님은 엄격한 아버지] 대 [하나님은 자애로운 부모] 은유

동일한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 개신교인들이 보여주는 정반대의 인식은 당연히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성서를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개신교인들과 진보적으로 해석하는 개신교인들은 근본적으로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가? 개념적 은유 이론과 인지언어학을 창시한 저명한 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이 두 해석의 인식 차이가 이상적인 가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두 모형―엄격한 아버지 가정과 자애로운 부모 가정―의 상이한 도덕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엄격한 아버지 가정에서는 강력한 힘을 지닌 아버지가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가정을 보호하고 자녀 양육에 대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절대 권위를 지닌다. 아버지의 강력한 권위에는 자녀는 물론 어머니도 도전할 수 없다. 이 권위에 순종하면 상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 따라서 순종은 도덕적이고 불순종은 비도덕적이다. 반면에 자애로운 부모 가정에서는 자녀의 도덕적 성장을 부와 모가 똑같이 책임지고 자녀들을 자애로운 사랑으로 보살피며, 그들의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최종적인 결정을 그들에게 맡긴다. 자녀들은 자애로운 보살핌에 대한 보답으로 부모를 존중하고 부모에게 순종한다. 따라서 순종은 자애로운 보살핌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지 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엄격한 아버지 가정에서 우선순위가 가장 높은 도덕적 가치는 권위와 힘과 순종이고, 자애로운 부모 가정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도덕적 가치는 감정이입과 자애로움과 책임이다.

이상적인 가정에 대한 이 두 모형의 도덕성을 개신교 해석에 적용할 때 개신교 보수와 개신교 진보의 인식 차이가 나온다.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은 엄격한 아버지 가정 도덕성의 측면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진보적인 개신교인들은 성서를 자애로운 부모 가정 도덕성의 측면에서 해석한다. 보수적인 성서 해석에서는 [하나님은 엄격한 아버지], [도덕성은 강함], [도덕성은 순종], [도덕적 위계는 자연의 위계] 등으로 구성된 은유 체계를 사용한다. 반면에 성서의 진보적인 해석에서는 주로 [하나님은 자애로운 부모(나 그 한쪽)],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애로움 전달자], [하나님의 은총은 자애로운 보살핌], [도덕적 행위는 자애롭게 보살피는 행위] 등의 은유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세계 내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대상이나 현상, 사건에 대한 개신교계의 보수적인 인식과 진보적인 인식은 이상적인 가정에 대한 두 모형의 도덕성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먼저 ‘전두환’과 그의 행위에 대한 개신교계의 대립적인 두 인식을 살펴보자. [국가는 가정] 은유와 엄격한 아버지 가정 도덕성을 결합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1980년 조찬기도회에 참석해 ‘전두환을 여호수아’라고 칭송하던 개신교 목사들의 인식은 당연한 귀결이다. 광주학살이 일어났던 1980년 당시에 전두환은 ‘대한민국’이라 불리는 가정에 절대적인 권위와 힘을 지닌 아버지였고 전두환의 권력에 항거하던 광주 시민들은 아버지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하며 가정의 안전을 위협하는 비도덕적인 자녀로서 당연히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리고 전두환의 광주학살은 은유적으로 자신의 절대 권위에 도전한 자녀들의 불순종을 벌한 정당한 행위에 해당했다.

반면에 전두환을 악당으로 규정하고 그의 정권 기간에 저항했던 목사님들의 행위는 자애로운 부모 가정 모형 도덕성의 관점에서 나오는 당연한 귀결이다. 이 가정 모형의 도덕성에서 보면 부모가 자녀(들)를 자애롭게 돌보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부모의 양육을 받는 자녀들은 제대로 도덕적인 성인으로 자라날 수 없기 때문에, 자애로운 부모 가정에서 자라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은 은유적으로 자신에게 이견을 제시한 자녀들에게 잔인한 학대―자애롭게 보살피지 않는 행위의 한 유형―를 자행한 부모이다. 따라서 전두환의 광주학살과 폭정에 저항했던 목사님들의 행위는 당연히 정당하다.

 

[도덕적 위계는 자연의 위계] 은유는 타당한가?

‘4대강 개발’ 사업에 대한 개신교 내의 대립적인 인식도 역시 이상적인 가정에 대한 두 모형의 도덕성 체계 차이에서 나온다.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은 성서를 해석할 때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의 도덕성 체계를 적용해, 인간이 자연계 내의 모든 대상―생물이든 무생물이든―보다 더 우월하다는 속설을 근거로 자연계의 어떤 대상보다 인간에게 도덕적 위계에서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한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도덕적 위계는 자연의 위계]라는 도덕적 질서 은유를 수용해, [자연은 인간을 위한 자원]이며 [인간은 이 자원의 사용자]라는 입장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맞는다고 본다. 그러면 엄격한 아버지 가정의 도덕성 체계를 적용하는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의 눈에는 인간이 편리함과 유익함을 위해 자연을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어떤 시도도 결코 비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4대강 개발 사업을 적극 지지하는 자신들의 활동은 비도덕적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도덕적인 행동이 된다.
반면에 진보적인 개신교인들은 이 자연관을 거부하며, 오히려 자연도 역시 고유의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고 인간보다 더 열등하지도 않다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들의 편리와 유익을 위해 자연을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며, 온전하게 자연을 보살필 의무가 있다. 따라서 이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애롭게 보살피기 위해 창조한 자연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도덕적인 행위이며, 자연을 온전하게 보살피지 못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그러면 인간의 경제적 편익을 위해 강의 자연 생태계를 인위적으로 파헤치는 4대강 개발 사업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비도덕적인 행위가 된다. 따라서 자애로운 부모 도덕성을 적용해 성서를 해석하는 진보적인 개신교인들이 이 사업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해명은 동성애를 둘러싼 개신교계의 대립적 인식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은 왜 동성애자 권리에 반대하고 동성애자들에게 왜 그렇게 엄청난 적대감을 표현하는가? 그들이 바로 성서의 해석에 엄격한 아버지 가정의 도덕성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게이이든 레즈비언이든 동성애는 부모의 한쪽은 반드시 남성이고 다른 한쪽은 여성이어야 한다고 성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는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과 맞지 않고 아버지의 절대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또한 남자가 여자보다 더 힘이 세고 성역할 관계에서도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정상적인 질서로 보는 이 가정 모형의 도덕체계와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 도덕성 체계를 수용하는 개신교 보수에게는 동성애가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다. 은유적으로 [동성애는 부도덕한 죄]이고 [동성애자는 죄인]이다.
반대로 개신교 진보는 왜 동성애자 권리를 지지하는가? 그들은 동성애자 권리를 자애로운 부모 가정의 도덕성 체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당연한 권리로 보기 때문이다. 자애로운 부모 가정의 도덕성을 성서 해석에 적용하면, 하나님은 자애로운 부모이며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누구든지 똑같이 자애로운 사랑으로 보살핀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양성애자든 관계없이 똑같이 자애로운 보살핌을 받는다. 이것은 자애로운 부모 가정에서는 어떤 자녀들이나 다 똑같이 부모의 자애로운 보살핌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을 자애롭게 보살피는 것은 자애로운 가정 모형의 도덕성 체계를 수용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의무이다. 따라서 당연히 그들은 은유적 부모인 정부에게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들이 공정하고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규정하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도록 요구한다.

위에서 살펴본 ‘전두환’과 ‘4대강 개발’, ‘동성애’라는 쟁점 이외에도 한국의 개신교는 사형제, 난민, 타종교, 종교인 과세제도, 낙태, 대북 관계, 대일 관계 등 세계 내의 동일한 수많은 현상을 두고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고 있다. 더 상세하게 파고 들어가 보아야 하겠지만, 각각의 쟁점에 대한 보수 기독교인들과 진보 기독교인들의 대립적인 인식도 역시 성서를 해석할 때 엄격한 아버지 가정의 도덕성 체계와 자애로운 부모 가정 모형의 도덕성 체계 둘 중의 어느 체계를 적용할 것인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나익주
낮에는 영어 교사, 밤에는 언어학자로 살아온 두 얼굴의 사나이. ‘동고송’의 전신인 '고전을 공부하는 교사모임'의 창립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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