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의 광주’,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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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강> 8권

‘100년 전의 광주’, 충격이었다.

 

1968년 겨울로 들어가던 그해 광주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그때 나는 광주 형무소 근처 동명동 골목길에서 딱지치기, 자치기, 구슬치기, 술래잡이 하면서 자라고 있었다. 형무소 담벼락은 높았고 북쪽 담벼락 길은 녹지 않는 빙판이었다. 우리는 겨우내 이곳 빙판길에서 놀았다. 창공 높이 연을 날렸다.

그즈음 나의 장형(혜당 스님)은 목포 문태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나는 11살이 되기도 전, 혼자 목포에 갔다. 광주의 구역(舊驛)에서 차표를 끊지 않고 열차에 올랐고, 목포 역의 개찰구를 통과할 땐 어느 어른의 손을 잡았다. 길거리 축음기에선 정훈희의 <안개>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지낸 그 구역(舊驛)을 나는 문순태의 소설 속에서 다시 만났다. <타오르는 강> 8권은 100년 전의 광주를 온통 내 앞에 보여주었다. 나는 충격에 빠졌다.

“열차는 동이 틀 무렵에야 광주역에 도착했다. 일 년 전에 세워졌다는 역사(驛舍)는 판자를 덧댄 목조 단층으로 고즈넉하게 엎드리고 있었다.” 광주역이 들어선 것은 1922년이었으니, 작가는 1923년의 광주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갔다.

“인력거 몇 대만이 한가롭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양만석은 고개를 들어 시가지 쪽을 보았다. 아, 무등산. 양만석의 눈에 무등산이 손에 잡힐 듯 성큼 다가왔다. 일본에 있으면서도 풍만한 아낙의 둔부 같은 무등산이 떠오르곤 했다.”

무등산은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산이다. 또, 그 넉넉한 품이 인자한 어머니 같은 산이다. 어느 시인은 무등산을 ‘멀리 만 리 밖 장성에서 바라보아 흡사 어느 슬픈 거인’이라 표현했는데, 문순태는 ‘풍만한 아낙의 둔부 같은 무등산’이라 한다. 무등산은 하나인데, 보는 이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점심을 먹은 양만석은 산책이나 할 요량으로 금성관을 나왔다. 널따란 광주천에는 여기저기서 악동들이 물장구를 치며 멱을 감고 있었다. 둑도 없는 천변에는 팽나무며 미루나무 실버들나무들이 숲을 이루었고 물 가까이에는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광주천은 여름철 악동들의 물놀이터였다. 깨끗했고, 수량도 제법이었다. 물놀이를 하고 나왔는데, 벗어놓은 신발이 없어져 당혹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둑도 없는 천변’이라. 나는 그런 광주천을 보지 못했다. ‘아하, 긍께 본시 광주천엔 둑이 없었제!’

100년 전 광주천을 상상하는 나의 뒤통수를 작가는 죽비로 내리친다. ‘한때 이곳에서 의병들을 처형했시야!’ 그랬었나. 호남 창의 회맹소를 조직한 의병장 기삼연이 일본 경찰에게 총살당한 곳이 바로 이곳, 광주천변 백사장이었다. 때는 1908년 2월 3일, 설날이었다. 광주 사람들은 기삼연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불을 떼지 않았고, 설날이라 하여 새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사직공원에서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진다리 건너 서양 선교사촌이 있다. 사직공원 마루턱에 올라서자 무등산 아래 부채꼴로 펼쳐진 광주시가지가 한눈에 파고들어왔다.”

사직단은 나라의 안전과 풍년을 기원하며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세월이 흘러 우리에게 사직공원은 젊은 남녀가 사랑의 꽃을 피우는 곳으로 전화되었다. 사직공원에 올랐으니 이제 내려가자. “광주천에서 가까운 본정통은 일본인 점포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본정통’, 나에겐 반갑고 친숙한 단어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새 옷을 사러가자고 할 때 ‘본정통에 가자’고 하셨다. 나는 그것이 일본어인지 몰랐다. 서울 사람에겐 충무로가 본정통이었고, 광주 사람에겐 충장로가 본정통이었다. 본정통(本町通)의 본(本)은 일본의 줄임말이고 정(町)은 촌, 통(通)은 길거리의 뜻이었으니, 본정통(本町通)은 ‘일본인 촌의 길거리’였다.

작가는 여기에서 우리의 가슴 아픈 사실(史實)을 적는다. “일제는 시가지를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10여 년 전에 광주성곽과 누문을 허물고 동헌과 광산관 등 옛 관아건물까지도 없애버렸다.”

그렇게 해서 그때 우리는 천년 고도 광주를 잃어버렸다. 광주성곽은 (구) 도청자리에서 중앙초등학교를 지나 충장로 파출소를 지나 광주천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다. 지금의 로마는 여전히 2000년 전의 로마이지만, 지금의 광주는 500년 전의 광주가 아니게 되었다.

“양만석이 찾아간 곳은 흥학관(興學館)이다. 흥학관 입구 양쪽에는 광주 청년회, 노동공제 광주지회, 광주청년학원 등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흥학관은 일제하 광주 독립운동을 일으킨 산실이었다. 구 시청 사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흥학관 건물터가 어디인지도 분간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광주는 100년 전의 광주도 아닌 것이다.

“경양방죽은 끝이 아스라할 정도로 넓었다. 방죽 건너편 지평선을 이루는 들 가운데에 태봉산이 젖무덤처럼 봉긋하게 솟아있는 것이 보였다”

나도 경양방죽을 보았다. 봄이면 버드나무가 바람에 휘날렸고,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어 우리의 썰매장이 되었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연인들은 이곳에서 배를 띄우고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방죽 건너 들판’에서 우리는 메뚜기를 잡고 놀았다. 태봉산 하늘엔 왜 그리도 고추잠자리가 많았을까. 태봉산을 헐었다. 그 흙으로 경양방죽을 메워버렸다. 1969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광주는 50년 전의 광주가 아닌 것이다.

작가에 의하면 1920년대의 조선 사람들은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맑고 빛나는 눈망울 말이다. <타오르는 강> 전 권에서 가장 감동 깊은 구절이었다. ‘아, 그랬구나!’ 그 척박한 땅, 찬바람 부는 겨울에도 나의 부모님은 ‘희망’이 있었구나!

월간 전라도닷컴_2019.10월호_타오르는 강 8권-황광우.PDF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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