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기억을 걷다]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 어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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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평화의 도시, 광주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 어등산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인 어등산

 

남도의 한말 의병은 타 지역에 비해 다소 늦은 1896년 장성에서 시작되었다. 중심 인물은 노사 기정진의 손자이자 제자였던 송사 기우만(1846~1916)이었다. 1896년 1월에 거병한 200여 의병은 대오를 편성한 후 나주로 향했다. 나주 의병과 연합하여 북상, 왕에게 충성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기우만은 의진을 광주향교로 옮겼다. 그가 광주로 의진을 옮긴 것은, 광주가 갖는 지리적 이점과 충의의 고장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광주 지역 유생들이 얼마만큼 기우만 의병에 참여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광주향교 재임을 맡았던 박원영이 의병의 주도 인물로 지목되어 진위대에 피살되었음을 볼 때 적극 가담자가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우만이 광주향교를 중심으로 의병을 모으고 있을 무렵 장성의 기삼연이 300여 의병을 이끌고 합류하면서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때 고종은 남로선유사 신기선을 파견하여 해산을 종용했다. 기삼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우만은 “고종의 해산 조칙을 거절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해산하고 만다. 전기의 광주 의병은 별다른 활동 없이 해산되었지만 반침략적·근왕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고, 중기 의병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중기 의병이라 불리는 의병이 재차 일어났다. 이때 남도 의병을 주도했던 중심인물은 태인의 면암 최익현, 광양의 백낙구, 남원의 양한규, 능주의 양회일 등이었다. 면암은 1906년 6월, 전 낙안군수 임병찬과 함께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수백 명의 문인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면암의 거병과 격문은 당시 남도 유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이때 태인 의병에 광산 출신 박현동이 참여했다.

1906년 3월 3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전라남도 광주 지방에서 의병이 일어나 곳곳에서 쌀 250석과 기타 금품을 강탈하며 일진회원 20여 명을 감금 구타하였는데…….”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동 신문 같은 해 12월 15일자에 “전라남도 등지의 의병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인명을 살해하는 폐가 종종 있더니 일전에 광주우편국을 습격하여 사무원 좌야 씨를 살해하였다.”는 기사도 남아 있다. 이 두 기사는 누가 주도했는지, 그후 어떻게 진전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1906년 당시 광주에서도 의병 활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07년 후반,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마저 해산되면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이 무렵 광주·전남의 의병 활동이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07년부터 1909년에 걸친 3년 동안 광주에서는 1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났다. 이들 의병의 목표는 일제 침략 기구와 군대, 경찰, 일진회원과 부왜인들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다음의 『대한매일신문』(1908년 5월 10일자)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본월 5일에 의병 천여 명이 광주군에 들어와 재무서, 우편취급소, 분파소, 기타 공해를 타파함에 일반 민심이 시끄럽다더라.”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부대와 활동 목표에 대해 일제는 1908년 1월 25일자 광비발 제67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농성광장의 죽봉 김준(김태원) 의병장 동상

“이 방면에 있어서의 폭도의 수괴는 고 최익현의 문하인 장성군 서이면 송계동 거주의 기삼연 부자, 나주군 거평면 갈마지 거주의 김태원, 광주군 고룡면 장교 거주의 박처인 형제 등이다. 근거지는 일정하지 않으며 전라북도와 경계하는 장성군의 산맥 안, 혹은 장성, 함평, 나주, 광주 등의 군 경계에 있는 산맥 안을 배회 출몰한다. 많을 때는 100명 내지 200여 명, 적을 때는 30여 명이 단체가 되어 횡행한다. 그들이 목적하는 바는 일본인을 죽여 없애고 일진회원 및 경찰 관리를 살해하는 데 있다. 물론 한편으로는 각 면에 있어서의 조세 징수원을 협박하여 징세를 금하고, 이미 징수한 금액을 약탈하는 데 있다.”

1908~1909년,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는 기삼연, 김준(김태원)·김율 형제, 전해산, 조경환, 박처인 4형제, 김원국·김원범 형제, 양진여·양상기 부자, 오성술, 이기손, 김동수, 박용식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돋보이는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의병부대의 규모는 많게는 100~200명에서 적게는 수십 명 규모였다. 이들은 지형지물의 우세를 이용하여 ‘분산과 집중’이라는 전술을 썼지만 무기의 열세로 전투력의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이 때문에 전투가 붙을 때마다 일본군보다 의병의 피해가 훨씬 더 컸다.

그럼에도 의병 활동이 거세지자 일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이른바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1908년 2~4월에 전개된 토벌 작전으로 광주 지역의 의병 200여 명 이상이 전사했는데, 이때 기삼연과 김준·김율 형제 등이 희생되었다. 기삼연은 1908년 2월 광주천에서 총살형을 당했고, 김준은 1908년 4월 어등산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순국하였다.

어등산 한말호남의병전적지 비(호남대학교)

토벌 작전으로도 광주를 비롯한 남도 의병이 사라지지 않자,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두 달간에 걸쳐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남도 의병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의병 500여 명이 전사하고, 피체 혹은 자수자가 1,500명을 넘었다. 이때 광주 출신의 양진여, 오성술, 김원국과 심남일, 안규홍, 강사문, 강무경 등 남도의 대표적인 의병장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 토벌 작전으로 전남은 물론 광주의 의병 활동도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1907~1909년 사이 가장 치열했던 광주·전남의 의병 정신인 절의 정신은 이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5·18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민주, 인권의 정신으로 계승된다.

전국 최대의 의병 항쟁지 광주, 그 최대 격전지는 어등산이다. 어등산이 남도 최대 격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 나주, 함평을 잇는 지리적인 이점 때문이었다. 또한 3~4개 군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관할 구역이 애매했고, 주위에서 가장 높은 산(338미터)이었기에 일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주변 지역을 관측하기에도 용이했다. 그리고 인근 지역과의 연락 면에서도 편리했다.

의병들의 피신처였던 어등산 토굴

1908년 4월 25일 김준은 3시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23명의 의병과 함께 순국했다. 농성 광장에 우뚝 서 있는 김준 의병장의 동상이 두 눈 부릅뜨고 어등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유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도, 김준 의병장의 선봉장이었다가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도, 형 김준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갔다가 총살당한 김율의 순국 현장도 어등산이었다. 양동환 의병 80여 명도 어등산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10여 명이 전사했다. 이처럼 어등산은 김준 의병장을 비롯, 최소한 50명 이상의 의병이 전사한 전국 최대 격전지다.

어등산 앞산인 용진산 사호고개에서는 오상렬 의병장이 순국했다. 어등산 가까이의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장소인 대명동천과 석문동천, 용진동천은 전해산·오성술·조경환 의병부대의 주둔지이자 전
투지였다. 어등산 주변인 고룡면 장교 부근은 의병장 박처인 4형제의 고향이며, 김원범의 형 김원국이 의병장 조경환을 만난 후 의병에 투신한 장소 또한 어등산 자락의 선암리였다. 이처럼 어등산과 주변 자락은 전국 최대의 의병 격전지이자 순국지였다.

남도인의 소중한 정체성 중 하나가 절의 정신이다. 그래서 불리는 남도의 별칭이 의로움의 고장, 즉 의향이다. 하지만 광주 어디에도 의병들의 절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공원, 기념탑 하나 없다. 100여 년 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어등산 등지에서 순국한 의병들의 혼을 기리는 사업은, 의로움의 고장을 내세우며 살아가는 광주시민의 자긍심이다. 그 적격지는 김준 의병장과 수많은 의병들이 순국한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 어등산일 수밖에 없다.

 

노성태
'다시 독립의 기억을 걷다', '광주의 기억을 걷다' 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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