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로명이 되어 만난 의병장, 양진여와 양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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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이 낳은 영웅들

도로명이 되어 만난 의병장, 양진여와 양상기

 

광주의 도로명 가운데 서암로와 설죽로가 있다. 서암로는 서방 사거리에서 동운고가까지를, 설죽로는 일곡 동아아파트에서 신안 제1교까지를 가리킨다. 서암 양진여(1860~1910)와 설죽 양상기(1883~1910) 의병장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서암로와 설죽로는 충장로나 금남로처럼 광주시민에게 낯익은 도로명은 아니다. 양진여와 양상기 의병장의 이름 또한 낯설다.

남도는 의로움의 고장, 의향이라 불린다. 이는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였음과 관련이 있다. 1909년 전라도 의병의 교전 횟수는 전국 총 1,738회 중 820회를 차지하고 있고, 교전 의병 수는 전국 총 3만 8,593명 중 2만 3,155명을 차지하고 있다. 즉 교전 횟수의 47.3%가, 그리고 교전 의병 수의 60.1%가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광주를 비롯한 남도는 한말 의병의 격전지 아닌 곳이 없다. 광주향교는 1896년 기우만 의병부대의 집결지이며, 광주천 서천교 밑은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의병장이 처형된 장소이다. 어등산은 나주 출신 김태원 의병장과 광주 출신 조경환 의병장의 순국지이고, 김원국 의병장이 체포된 곳이다. 31사단 뒷산인 삼각산은 양진여 의병부대의 거병지다.

남한 폭도 대토벌작전 당시 체포된 남도 의병장들(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양진여)

 

남도는 한말 최대 의병 격전지였던 만큼 가슴 아픈 수많은 사연을 안고 있다. 특히 형을 따라 동생이, 아버지를 따라 아들이 의병으로 나서는 모습은 코끝을 시리게 만든다. 일제에 의해 수괴로 꼽힌 나주 출신
의 김태원과 김율, 광주 출신인 김원국과 김원범, 화순 출신으로 쌍산의소를 주도한 양회일과 양회룡은 형제 의병장이었다. 호남창의회맹소의 후군장이었던 이남규와 이정섭, 안규홍 부대에서 활약한 임창모와 임학순, 독립의병부대를 이끌었던 양진여와 양상기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다. 특히 양진여와 양상기는 두 달 간격으로 교수형을 당한 전국 유일의 부자 의병장이다. 양진여는 1910년 5월 30일, 아들 양상기는 동년 8월 1일에 처형당했다.

양진여 집안의 의병 활동은 양진여와 양상기만이 아니었다. 양진여의 동생 양동골도 양진여 부대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3년의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양진여 부대의 군자금 확보를 위해 주막을 경영했던 양진여의 부인 박순덕도 일제의 고문에 의해 평생 두 눈이 새빨간 고막처럼 충혈된 채 고통을 겪다가 사망하였다. 서암 양진여 집안은 전국 최고의 의병 가문 중 하나다.

두 의병장은 광주군 서양면 니동(현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498-1)에서 태어났다. 그들이 순국한 지 100년이 지난 후 그들을 기리는 도로명인 서암로와 설죽로가 광주 북구에 있게 된 연유다. 이 두 도로는 신안교에서 만난다. 아버지와 아들이 교수형에 처해진 후 도로명이 되어 다시 만나는 모습이 어쩐지 찡하고 눈물겹다.

양진여는 융희 2년(1908년) 7월 16일경 의병을 모집하는 광고 5매를 작성해서 광주부 각처에 붙인다. 그리고 1908년 7월 20일, 삼각산 죽청봉에서 30명으로 거병하고 대장으로 추대된다. 의병 규모가 100여 명으로 커지자, 양진여는 친일파와 일본인을 몰아내기 위해 광주를 비롯한 담양, 장성, 창평 등지에서 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한다. 우편체송인이었던 일본인 에토오의 처단은 그 출발이었다.
양진여 부대는 1908년 10월 26일 광산군 신촌에서 일본의 정규군과 처음 맞섰다. 나카고지군조의 토벌대와 치열한 전투 결과 의병 5명이 전사하고, 화승총 4정을 빼앗겼다. 그러나 양진여 부대는 일본군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일본군은 양진여를 체포하기 위해 신촌 전투 이후 조(趙), 마(馬) 양 경시가 이끄는 제2특설순사대를 편성하여 광주, 장성, 영광, 나주 지역을 일주일간이나 추적할 정도였다. 양진여 부대만을 찾기 위해 제2특설순사대가 추적했다는 것은, 양진여 부대가 당시 일군에게 가장 큰 위협을 준 의병부대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양진여 부대는 일본군의 토벌대를 끝까지 피해 다닐 수만은 없었다. 일제의 추격이 심해지자, 전해산 부대와 연합 의병을 구성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1908년 11월 23일 오후 5시, 300여 연합 의병이 광주군 대치(현 담양군 대전면 속리)에 집합, 광주수비대 우다 특무조장이 이끌었던 수비대와 벌인 치열한 전투가 그것이다. 이 대치 추월산 전투는 하루를 넘긴 24일 오후 5시 무렵까지 쌍방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연합 의병이 북쪽으로 퇴각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대치 추월산 전투 이후 양진여 부대는 점차 쇠락하였다. 1909년 4월 이후 양진여와 양진여 부대는 사료에서 사라지고, 1909년 8월 26일 담양군 대전면 갑향리에 피신 중인 양진여 체포 기사가 나온다.

양진여는 체포되어 9월 1일 광주지방재판소로 송치된 후 12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대구공소원에 항소했지만, 1910년 3월 5일 대구공소원 형사부는 다시 양진여에게 내란죄를 적용하여 교수형을 판결하였다. 그리고 아들 양상기보다 두 달 앞선 1910년 5월 30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양진여 묘소

 

그의 시신은 대구까지 달려간 사위 정병모에 의해 대구에서 부산, 부산에서 목포로 옮겨진 후 광주로 이송된다. 광주 서구 매월동 백마산 기슭의 양진여 무덤 앞에는 “내 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치욕을 당해 형을 받고 죽음은 유감이다.”라고 새겨진 비가 서 있다. 그 무덤 아래에 아들 양상기의 무덤도 함께 있다. 그러나 양상기의 무덤은 시신 없는 가묘다. 여름철이라 빨리 부패한 시신 대신 주변의 흙 한 줌만을 떠 와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교수형으로 순절한 양진여에게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아들 양상기에게는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양상기(가운데)와 부하들

설죽로의 주인공, 양상기

양상기는 1883년 광주군 서양면 니동에서 태어나 20대 초반 광주경찰서 순사가 되었다. 부친인 양진여가 거병을 준비 중인 시점에서 순사로의 취업은, 일제의 정보를 캐내기 위한 위장이었다. 따라서 그의 광주경찰서 순사직은 오래갈 수 없었다. 1908년 4월 23일 그는 순사직에서 면직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1908년 5월, 40명으로 거병하여 의병장에 추대된 후 다음 해인 1909년 6월까지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중 1909년 4월의 동복 서촌 전투에서 10명이 전사하고, 1909년 5월의 담양 덕곡리 전투에서는 23명이 전사하는 큰 패배를 당했다. 양상기 부대가 대패한 것은 무기의 열세도 있었지만 친일파의 밀고로 인한 기습 때문이었다. 담양 덕곡리 전투 이후 양상기는 1909년 6월 부대를 해산하고 잠복 중 12월 20일 전북 남원에서 체포되었다.

서암로와 설죽로가 만나는 지점, 신안교

 

양상기는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강도·방화 및 살인 사건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공소원에 항소했지만, 1910년 5월 17일 대구공소원은 다시 동일의 죄를 적용하여 교수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1910년 8월 1일 부친인 양진여보다 두 달 후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양상기는 남구 매월동 백마산 기슭에 부친 양진여와 함께 누워 있다. 앞서 말했듯이 그의 무덤은 시신 없는 가묘다.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후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경에게 체포된 후 양상기는 “벌써 운명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죽을 수밖에 없다. 만약 생명에 이상이 없다면 다시 무리를 모아 폭거에 나갈 결심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그는 목숨을 걸고 의병을 일으켰고,
목숨을 걸고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목표로 삼았던 한국의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부친과 함께한 의병 활동은 서암로와 설죽로의 이름으로 광주 시민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노성태
'다시 독립의 기억을 걷다', '광주의 기억을 걷다' 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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