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김시습, 《매월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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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나는 모순되었다_ 김시습, 《매월당집》

뜻은 괴롭고 마음은 비장하다

태어나면서 품성의 바탕이 달라서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아보았다. 최치운(崔致雲)이 기특히 여겨 시습이라 이름 지었다. 시습은 말이 더디었으나 정신은 영리하여 글을 대하면 입으로는 읽지 못했지만 뜻은 다 깨달았다. 세 살 때 시를 지을 수 있었고, 다섯 살 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깨쳤다. 사람들이 신동이라 했고 유명한 재상 허조(許稠)와 여러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이이가 왕명을 받아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 전하는 내용이다. 그 어려운 한자를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알아보았다고 한다. 그 한자로 시를 지은 것은 세 살 때였다고 한다. 허조는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사람이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서울 성균관 북쪽에 있는 사택에서 태어났다. 이름 ‘시습’은 《논어(論語)》의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배우고 항상 익힌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김시습이 신동이라는 소문이 나자 세종대왕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게 했다. 승지 박이창이 김시습을 궁궐로 불러 확인한 다음 보고하자 세종은 “시습의 학업이 성취되면 크게 쓸 것이다”라며 비단을 선물로 주었다. 이때부터 김시습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은 김시습을 ‘오세(五歲:다섯 살)’라고 불렀다. 다섯 살 때 임금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천재 소년 김시습은 “어진 군주를 보좌하길 바라는”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1453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이 소식에 김시습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김시습전》을 보자.

경태(景泰:명나라 대종의 연호) 연간에 세종과 문종이 돌아가시고 단종이 3년 만에 왕위를 물렸다. 이때 김시습은 스물한 살이었다. 그는 삼각산 산중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사람에게서 그 소식을 듣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3일 만에 밖으로 나와서는 대성통곡을 하고 책을 다 불살라버렸다. 발광하며 뒷간에 빠졌다가 나와서는 달아났다.

김시습은 일생일대의 절망감을 느꼈다. 왕위 찬탈은 유학의 근본 도리가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유학 경전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승려가 되었다. 온전한 승려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자신이 서 있을 자리가 없다고 여겨 세상을 떠나고자 했을 뿐이다. 김시습은 불법(佛法)을 지키지 않았고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이제 사람들은 김시습을 미친 중, 미친 사람, 괴물이라며 손가락질했다.

400여 년이 흐른 뒤 한용운은 김시습의 일생을 “그 뜻은 괴로웠고 그 마음은 비장했다”고 요약했다. 김시습은 비판 정신으로 시대를 읽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 읽기는 외면당했다. 그래서 ‘그의 뜻은 괴로웠다’. 그렇지만 김시습은 좌절하지 않았다. 세상을 비웃고 조롱하며 세상에 도전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비장했다’. 이런 괴롭고 비장한 마음으로 쓴 글을 모아놓은 책이 《매월당집(梅月堂集)》이다. 《매월당집》은 선조의 명령으로 김시습이 지은 시와 논문 등을 모아 1583년경에 간행되었다.

 

나는 세상과 모순된 처지다

김시습은 왜 떠돌아다녔을까?

선비는 세상과 모순된 처지가 되면 물러나 스스로 즐기면서 지내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어찌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며 세상에 머무르겠습니까.
-김시습,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김시습은 자신이 세상과 모순된 처지라고 했다. 그것은 자신의 자아(自我)와 이 세상이 서로 용납하지 않는 관계라는 말이다. 김시습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처지였다. 출중한 재주를 가졌지만 집안은 보잘것없었다. 자신에게 기대를 보여주었던 임금과 신하들은 죽거나 쫓겨나 절망만이 남았다. 그렇지만 김시습은 개인의 불행을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았다. 그렇게 보았다면 단순한 불평불만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세상의 문제와 연관시켰다. 김시습은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삶의 현장을 목격했다. 김시습이 목격한 삶의 한 현장을 보자.

농부는 땀 흘려 일하며 한 해를 끝내고
누에치는 아낙네는 쑥대머리가 되어 봄내 고생하는데,
취하고 배부르고 좋은 옷 입은 무리들이 성안에 가득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편안하기만 하구나.
-김시습, <영산가고(詠山家古)> 중에서

농촌에 사는 사람과 성안에 사는 사람이 이렇게 달랐다. 김시습은 이런 세상에 분노했다. 그래서 <오호가(嗚呼歌)>에서는 “살갗을 벗기고 피를 빨고 이미 뼈를 부수어놓고도/사치스러운 자들은 더 호사스러운 것을 욕심내어 만족할 줄 모른다”고 분노하고 규탄했다. 그러나 세상은 김시습의 분노와 규탄을 용납하지 않았다. 김시습은 미치광이 떠돌이 취급을 당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김시습은 세상과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에서 볼 수 없던 별난 책을 썼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다. 《금오신화》 중 세 편은 귀신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죽은 여자와 애절한 사랑을 한다. 이 세상을 용납할 수 없기에 다른 세상의 여자와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여자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렇듯 자기의 뜻과 세상은 어긋난다. 《금오신화》는 자아와 세계가 서로 용납하지 않고 대립하는 현실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것이 김시습이 소설을 쓴 이유다.

또한 김시습은 《금오신화》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를 통해 철학과 정치에 비판을 가한다. <남염부주지>는 철학 소설이다. 주인공 박생(朴生)이 우연히 염라대왕을 만나 귀신에 대해 묻는다. 이에 염라대왕이 답한다.

귀신의 귀(鬼)는 가장 신령스러운 음기(陰氣)를 말하고, 신(神)은 가장 신령스러운 양기(陽氣)를 말한다. 두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만물(萬物)을 만든다. 그래서 살아 있으면 사람이다, 사물이다 말하고 죽고 나면 귀신이라 한다.

두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만물을 만든다고 했다. 김시습은 이 주장을 <태극설(太極說)>에서 구체화하여 “태극은 무극(無極)이다. 태극은 음기과 양기다”라고 했다. 태극은 우주만물의 근원을 말한다. 우주만물의 근원인 태극은 기(氣)다. 이것은 우주 만물의 근원을 이(理)로 보는 당대 성리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었다.

 

백성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금오신화》에 등장하는 귀신은 모두 억울하게 죽은 원귀다. 세상이 잘못되었을 때 원귀가 존재한다. 김시습은 <애민의(愛民義)>에서 백성들이 국가에 세금을 내는 이유는 왕이 현명하게 잘 다스려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믿음이 깨질 때 세상은 어지럽게 된다. 김시습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가 그렇다고 보았다. 그래서 원귀를 등장시켰던 것이다.

원귀가 나타나는 세상은 어찌될 것인가?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폭력으로 백성을 눌러서는 안 된다. 백성들은 겉으로는 두려워서 따르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거역할 뜻을 품고 있어 세월이 지나면 큰 재앙이 일어나게 된다. …… 나라는 백성의 것이고 명령은 하늘이 내린다. 하늘의 명령이 왕에게서 떠나고 백성의 마음 또한 떠나가면 아무리 몸을 보전하려고 해도 보전할 수 없다.
-<남염부주지> 중에서

김시습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 시에서 자신의 소망을 썼다.

나와 세상은 심하게 어긋났고,
세월은 차츰 차츰 흐르는구나.
하늘이 나를 가엽게 여긴다면,
반드시 뒤바뀌는 날이 있으리라.

김시습이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이 뒤바뀌는 날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김시습의 애민정신(愛民情神)은 조선을 개혁하려는 후학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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