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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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악하지만 희망이 있다_ 순자, 《순자荀子》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묻는다.
“당신은 사막을 옥토로 바꿀 만큼 풍성한가? 아니면 옥토를 사막으로 바꿀 만큼 메말랐는가?”
메마름과 풍성함 역시 마음에 있건만, 마음은 또 극단을 오간다. 사실 우리도 우리 마음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 믿는다. 우리를 부정하고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 내 안에 괴물이 있음을 인정해보자. 그렇지만 또 희망을 가져보자. 희망이 아니라 확신을 가져보자. 인간에 대해 긍정해보자. 순자는 인정하고 긍정했다. 순자는 내 마음에 삿됨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꾸는 방법을 찾았다. “푸른색은 남빛 쪽에서 나왔지만 남빛보다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려진 것이지만 물보다 차갑다. 곧은 나무에 먹줄을 댈 수 있지만 그것을 불에 쬐고 구부려 수레바퀴를 만들면 굽어 자로 잴 수 없고, 그것을 볕에 말려도 전과 같이 곧아지지 않는다. 나무가 먹줄의 도움을 받아 곧아지고 쇠붙이가 숫돌을 통해 날카로움을 갖는 것처럼 군자가 날로 지식을 넓히고 반성하면 지혜가 밝아지고 행동에 그릇됨이 없을 것이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 예(禮)를 가까이 하면 예를 갖춘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놓아버리는 순간 예와 멀어진다. 사람다움을 포기하는 순간 사람은 괴물이 된다. 순자(荀子, BC 298?~BC 238?)는 우리에게 마음속 심연에 있는 괴물과 맞서 싸우라고 한다. 순자는 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여러 학설을 비판하면서 핵심을 섭취했다. 그래서 중국의 고대 사상을 집대성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 점에서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된다. 순자가 지은 《순자》는 고대 중국의 저작 가운데 보기 드물게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글이다. 《논어》와 《맹자》는 대화체이고 《도덕경》은 운문체인 반면에 《순자》는 체계적으로 써내려 간 논문 모음집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인간은 악하다. 그러나 의지가 있다

순자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성악설에서 시작해야 한다. 성악설은 인간을 부정하는 학설일까? 그렇지 않다. 순자는 인간을 긍정한다. 그런데 왜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했을까? 순자는 말한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므로, 그대로 내버려두면 서로 싸우고 빼앗아 양보란 있을 수 없다. 나면서부터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마련이므로, 그대로 내버려두면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할 줄만 알 뿐 신의나 성실성은 없을 것이다. ······ 사람은 배고프면 배불리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입고 싶으며, 고단하면 쉬고 싶어 한다. 그런데 배고파도 먼저 먹지 못하는 것은 어른에게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 사람이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그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박하면 후하기를 원하고, 추하면 아름답기를 원하며, 좁으면 넓기를 원하고, 가난하면 부유하기를 원하며, 천하면 귀하기를 원하는데, 자기 속에 없는 것은 반드시 밖에서 구하고자 한다. 부유해지면 재물을 원치 아니하고, 귀해지면 권세를 원치 않게 되는 것이니,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은 절대로 밖에서 구하려 하지 않는다.”

순자와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정반대로 파악했다.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도 서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주장한 이유는 전국시대의 황폐화된 인간성에 반대하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반면 순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했다. 현상적으로 보면 인간은 분명 사악한 요소가 많다. 전국시대 같은 약육강식의 시대에는 악한 인간의 모습이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순자의 문제의식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사실의 규명이 아니었다. 순자가 강조한 것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인간의 본성이 바뀌는 방법

키플링의 소설 《정글북》에서 모글리는 늑대에게 키워져 늑대처럼 행동하고 늑대처럼 울부짖는다. 아기가 태어나 인지능력이 생기면 자신을 키워주는 부모의 행동을 따라한다. 누구를 모델로 삼느냐에 따라 아기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순자는 사람이 후천적인 교육에 의해 달라진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사람을 교화할 것인가? 순자는 그 방법으로 ‘예(禮)’를 제시한다.
“예는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사람에게는 나면서부터 욕망이 있는데,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욕망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고, (욕망을) 추구하는 데 절제와 한계가 없으니 다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투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지면 궁해진다. 선왕들은 그 어지러워짐을 싫어하여 예의를 제정함으로써 이를 분별하게 했고, 사람들의 욕망을 길들였으며, 사람들이 구하는 바를 공급해주었다. ······ 이것이 예가 생긴 까닭이다.”

예는 사람을 악한 마음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욕망을 길들여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게 해 준다. 그리고 예를 어떻게 닦느냐에 따라 사람은 달라진다. 순자는 말한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도 모두 우임금처럼 될 수 있다. 우가 임금이 된 까닭은 인의와 올바른 규범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인의(仁義)와 올바른 규범은 누구나 알 수 있고 또 할 수 있는 도리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인의와 규범을 알 수 있는 소질과 실천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으니, 누구든 다 우임금처럼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순자는 예를 통해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규제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예의 정치’를 주장했다. 순자가 말하는 예는 공자의 예와 조금 다르다. 공자의 예는 주나라 주공(周公)이 만든 고대의 예이고, 주로 사대부 이상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예였다. 반면 순자의 예는 무조건 고대의 예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고대의 예는 현실에 맞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순자의 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이런 면에서 순자가 말하는 ‘예의 정치’는 공자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포괄적’이다.

 

동양의 순자,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

순자의 사상은 일찍부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집대성한 사람으로 서양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의 주장을 비교해보자.
순자가 말하길, “물과 불은 기는 있지만 생명이 없고, 초목은 생명은 있지만 지각이 없으며, 짐승은 지각은 있지만 예의가 없으니, 오직 사람만이 기도 있고 생명도 있으며, 지각도 있고 예의도 있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가장 귀한 것이다. 그러나 힘으로 말하면 소를 당할 수 없고, 달리기로 말하면 말을 당하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말과 소를 부리니 어째서인가? 사람은 무리를 지을 수 있으나 소나 말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째서 무리를 지을 수 있는가? 상하의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상하의 분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의(義)에 의해서 분별된다. 의로써 분별하면 조화가 서고, 조화가 서면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면 힘이 중가하고, 힘이 증가하면 강해지고, 강해지면 만물을 이기니, 그래서 집을 지어 안거할 수 있는 것이다.” 순자는 인간이 동물과 달리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구성하며, 그곳에서 제도, 즉 ‘예’를 만들고 국가를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말하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치적 동물이다. ······ 어째서 인간이 모든 동물들, 꿀벌이나 군집생활을 하는 동물들보다 한층 더 정치적인가는 분명하다. ······ 동물 중에서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소리라면 그것은 기쁨이나 괴로움을 표시하는 징표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 ······ 그러나 언어는 유리한 것이나 해로운 것, 올바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과 악, 올바름과 사악함 등에 대해서 지각을 가진다는 점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정이나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선과 악 등에 관한 공통된 지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 우월할 수 있는 이유가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여 생활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문제 제기 방식, 논증 방법에서 순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비슷하다. 내용만 비슷한 게 아니라 순자가 중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치 역시 비슷하다.

 

제자백가의 핵심을 섭취하다

순자는 유학의 실천 도덕에 합리성을 부여하면서 다른 사상을 종합했다. 그런 면에서 순자의 사상은 유학의 한 갈래다. 하지만 순자의 사상은 공자에서 맹자로 이어지는 ‘전통 유학’과 다르다. ‘전통 유학’을 계승한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성악설이 그 하나다. 순자의 사상이 전통 유학과 또 다른 점은 ‘하늘에 대한 사상’이다. 전통 유학에서 하늘은 인격자다. 인간에게 본성을 부여하고 통치의 원리와 정통성을 부여해주는 존재다. 이 때문에 천재지변이 나타나면 하늘이 노했다고 하면서 불안해한다. 비가 오지 않으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반면 순자는 인격자로서 하늘을 부인한다. 천재지변은 자연현상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인간의 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하늘이 인간의 삶을 주재한다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

순자는 유학사에서 ‘찬밥’ 신세였다. 특히 송나라 때 주희가 성리학(性理學)을 완성하면서 순자의 학설은 이단시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순자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순자는 혼탁한 세상의 정치, 대도를 따르지 않고 미신에 몰두하며 길조와 흉조 따위나 믿음으로써 나라를 망치는 무도한 군주가 연이어 나타나는 것을 증오했다. 천박한 유학자들은 소견이 좁았고, 장자 같은 사람들은 호방한 척하면서 풍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래서 순자는 유학, 묵가, 도덕가의 실천상의 장단점을 논하여 수만 자에 달하는 전서를 남겼다.”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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