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유럽 인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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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유럽 인문 여행

 

일정: 8월 19일-8월 29일
여정: 독일(뮨헨-노이슈반스타인 성)-스위스(쮜리히-루체른-융프라우-제네바-바젤)
-프랑스(물루즈-스트라스부르그)-독일(트리어-라인강-하이델베르그-로텐부르그-프랑크푸르트)

이번 유럽 여행은 (사) 인문연구원 동고송의 창립을 축하하기 위해 유럽여행사 Euroscope 임창노 대표의 기획과 협찬으로 이루어진 여행이다. 레닌과 아인슈타인, 칼뱅과 니체, 마르크스와 괴테의 흔적을 찾아 나선 인문 여행이기도 하다.

8월 19일 (월)

이번 여행에 동행하지 못해 마음이 아플 친구를 불러내어 포장마차에 갔다. 첨단지역에서 새벽 1시까지 술을 마셨다. 우리는 만나면 할 말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새벽 2시, 광주 고속 터미널에 도착하니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니 인천 공항이다. 우리는 E12 앞으로 갔다. 누군가 여권을 준비하라고 주문하였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나는 여권을 챙긴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뒤져보았으나 가방에 여권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때 누군가 공항에서 임시 여권을 발급할 수 있다는 정보를 주었다.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공항에서 어슬렁거릴 수 있는 시각은 9시 40분. 임시 여권을 발급하는 공무원은 9시에 출근하는 것이다. 나는 6번째로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는데, 이 상황에서 임시 여권을 발급받아 비행기를 탈 수 있는 확률은 50%였다.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이 요구되었다. 동료들이 나 때문에 비행기를 놓칠까봐 그냥 광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광주에 돌아가 여권을 챙기는 일은 별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 홀로 독일 행 루프트탄자를 무사히 탈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자신이 없었다. 심란했다. 하지만 일단 티켓을 연기하기로 하였다. 돌아오는 하행 버스에서 후회의 상념이 마구 떠올랐다.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왜 이 고생을 하게 되었는가? 버스 안이 답답하기까지 하였다. 여권을 어디에 두었는가. 집에 두었나, 연구원에 두었나? 핸드폰이 없는 나는 이런 경우 무척 난처하다. 광주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올라갈 인천행 고속버스를 예매하였다. 오마이…이미 밤 12시 차가 다 예매되어 버렸단다. 임시 차 한 대가 남았고 좌석이 한 석 남았단다. 워매…

택시를 타고 연구원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여권은 책상 좌측 상단에서 고이 주무시고 있었다. 이제 열 두 시간을 어떻게 보내지? 나는 헤겔의 <역사철학강의>를 읽기로 하였다. 일종의 오기였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한 오기 말이다. 오후 1시에서 6시까지 헤겔의 <역사철학강의>를 들여다보았다.
그때 영화 ‘봉오동 전투’가 떠올랐다. ‘봉오동 전투’ 같은 영화를 놓쳐서는 안 된다. 즉시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갔다. 터미널 시지브이(CGV)에서 영화를 관람하였다. 영화는 과장이 심했으나, 나름 좋은 선택이었다.

12시까지 또 시간이 비었다. 주역 64괘의 이름을 외우기로 했다. 터미널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나는 괘명을 외워나갔다. 중천건, 천택리, 천화동인, 천수송, 천산둔, 천지비.

8월 20일 (화)

새벽 4시 다시 인천 공항에 내렸다. 공항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커피숍을 들렀다. 커피를 마셨으니, 탁자에서 책을 읽을 권리가 확보되었다. 나는 주역 64괘를 외웠다. 택천쾌, 중택예, 택화혁, 택뇌수, 택풍대과, 택수곤, 택산함, 택지췌.

7시가 되었다. 독일 행 루프트탄자가 발권을 개시하는 시각이다. 70대 여성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먼저 줄지어 섰다. 나는 그 줄의 맨 앞에 섰다. 여권과 예약 서류를 당당하게 제시하였다. 티켓을 받았다. 당당하게 검색대를 통과했다. 탑승구 43에서 대기하였다. 내가 무사히 발권을 하였음을 먼저 간 동료들에게 고지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주역 64괘를 외웠다. 화천대유, 화택규, 중화리, 화뇌서합, 화풍정, 화수미제, 화산려, 화지진. 주역을 읽다 누웠다. 잠을 자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일어났다. 9시가 되니 발권이 시작되었다. 이제 독일을 가는 거다. 과연 동료들을 만날 수 있을까? 비행기는 이륙하였다.

와인이 좋았다. 나는 복수라도 하는 듯, 승무원에게 와인을 거듭 부탁하였다. 와인의 품질이 매우 좋았다. 이을호의 <논어>를 꺼내 읽기로 하였다. 수 십 번을 읽었으나 아직도 낯선 구절들이 있다. 버려두었던 몇 구절들과 친하게 되어 좋았다. 3시, 뮨헨 공항에 마침내 도착하였다. 낯선 복도를 따라 이리 저리 가다 보니 출구가 나왔다.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8호선 전철을 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제는 관광을 잘 하였냐, 오늘 오전은 어디에 갔느냐, 지금은 어디에 있느냐.

뮨헨 시청은 마리엔 광장에 있었다. 뮨헨의 마리엔 광장은 체코의 프라하 광장과 아주 비슷하였다. 광장의 크기며, 하늘을 찌르는 첨탑이며,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것이며, 중세 유럽의 고도는 다 비슷하였다. 광장 뒤쪽 가게에 가서 치즈와 햄을 구입하였다. 지금 안주를 사지 않으면 밤에 먹을 안주가 없다.

비가 한두 점 내렸다. 어제 아침 헤어진 일행과 다시 만난 것은 오후 5시였다. 벗들은 나에게 반가운 미소를 보내주었다.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가이더는 자유 시간을 주었고, 우리는 흩어졌다. 맥주 집에 들렀다. 주문을 했는데 좀체 술은 나오지 않았다. 안주는 더욱 나오지 않았다. 그런 것이란다. 독일은 수요자 중심이 아니라 공급자 중심 사회란다. 줄 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단다. 재촉하지 말라. 그렇게 느리게 사는 게 독일이란다. Langsam(천천히)…다시 모였고, 우리는 마리엔 광장 한 켠 음식점에 들렸다. 수프와 생선 튀김이 나왔다. 먹기 힘들었다. 식당은 혼잡도 하였다. 잘못 온 식당이었다.

7시, 버스는 우리를 뮨헨의 외곽으로 옮겼다. 숙소는 호텔이 아니라 여인숙이었다. 이 밤의 열락을 위해 나의 방을 개방하였다. ‘벗들이여, 다 오라!’ 밤 늦게 마시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8월 21일 (수)


오전 6시에 일어났다. 인근은 농촌이었다. 독일엔 산이 없다. 구릉과 평야와 산림이다. 끝이 없는 들판에서 나는 악을 썼다. ‘아악아….’ 돌아오는 길에 보니 밤사이 사슴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식사는 가난하였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요구르트와 빵과 커피가 전부였다. 이런 곳은 처음이다. 하지만 아침 햇볕은 화사하였고,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마트에 갔다. 어젯밤 묵은 와인 메르록(Merlock)을 사기로 하였다. 나는 이 품질 좋은 와인을 소유하기 위해 동네 마트를 찾았다. 메르록 사냥에 나선 것이다. 마트에서 사과와 귤도 사고, 와인도 샀다. 나는 부자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간다. 디즈니랜드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 등장하는 그 성 말이다. 차는 낭만가도를 따라 노이슈반스타인 성으로 갔다. 가이더는 이 성의 주인을 루트비히 2세(1864~1886년 재위)라고 하였다. 환상적인 중세의 성을 짓는 데 재산의 전부를 쏟아 부은 미친 왕이었다. 미친 왕의 미친 짓 때문에 우리는 지금 환상적인 성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다. 마차도 보였고, 버스도 있었다. 나는 마차를 타고 싶었으나 안내원의 권유에 따라 버스를 타기로 했다. 멀리서 보는 성은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발밑은 천길 낭떠러지였다. 어질어질하였다. 사람들은 성을 무대로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나는 출렁이는 다리를 더 걷지 못하고 돌아섰다. 일행이 다 모이기까지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버스는 독일을 뒤로 하고 스위스를 향해 달렸다. 나는 머릿속에서 주역 64괘를 외웠다. 뇌천대장, 뇌택귀매, 뇌화풍, 중뇌진, 뇌풍항, 뇌수해, 뇌산소과, 뇌지진. 차창가, 세차게 흐르는 급류가 라인 강의 상류란다. 라인 강 이편은 독일이고, 저편이 오스트리아란다. 냇물을 사이에 두고 나라가 달랐다. 우리는 터널을 지나 스위스를 향해 마구 달렸다.

새 가이더를 만난 곳은 쮜리히 식당에서였다. 친절이 몸에 벤 안내원이었다.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와인을 듬뿍 마셨다. 쮜리히 외곽으로 다시 10키로를 달렸다. 마침내 우리는 숙소에 도착했다. 여장을 풀고 저녁 산책에 나섰다. 지하도로를 건너 Icoop에 갔다. 8시 30분이라 방금 전 문을 닫았단다.

스위스의 길거리는 깨끗하였다. 술집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나도 이 밤의 낭만을 즐기고 싶었다. 길거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싶었으나 그냥 돌아왔다. 호텔엔 어젯밤의 전우들이 또 나의 방을 찾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8월 22일 (목)

스위스의 조식은 빈곤하였다. 과일조차 없었다. 요구르트와 빵으로 아침을 때웠다. 간밤에 친우 장석이 합류하였다. 장석은 공항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택시비로 무려 20만 원을 지급했단다. 대중교통이 없었다.

맨 처음 간 곳은 취리히 역사(驛舍)였다. 이곳에서 1917년 레닌은 밀봉 열차를 탔다. 러시아혁명사에서 뺄 수 없는 무협지다. 역 광장은 높고 넓었다. 레닌은 젊은 시절 나의 영혼을 빼앗은 분이다. 어두운 죽음의 시대, 내가 의지할 곳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밤을 새워 레닌을 번역했다. <국가와 혁명>을 번역하면서 혁명의 전략을 알았고, <좌익소아병>을 번역하면서 혁명의 전술을 알았다. 1980년 가을과 겨울의 일이었다.

다시 시내를 걸었다. 페스탈로찌 동상이 서 있었다. 공원으로 올라갔다. 린덴호프 공원에서 내려다보니 강물이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강 건너 저곳이 취리히 공대란다. 아인슈타인이 다닌 공대를 나는 보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사진을 많이도 찍었다. 공원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골목길은 아테네의 골목길과 유사하였다. 파르테논 신전을 오르내리는 골목길 말이다. 강물은 맑았다. 강물 위 다리에 서니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가 달리 없었다. 스위스는 나에게 산골이었는데, 그 산골에 강물이 흐르고 있으니 참 신기하였다. 언덕 위의 마을이 나왔다.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과 흡사하였다. 안내원은 우리를 의미심장한 곳으로 데려갔다. 언덕을 넘으니 레닌 하우스가 나왔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속으로 들어가기 전, 이곳이 레닌이 은거하던 집이었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왔다. 이곳저곳 둘러보았는데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안내원은 우리를 쯔빙글리의 교회로 데려갔다. 나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시내로 들어와 오덴 커피숍에서야 나는 비상사태를 해결하였다. 벗들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 약국을 들렀다. 발가락 흉터를 감싸줄 밴드를 샀다.

버스는 루째른으로 갔다. <슬픈 사자상>에 갔다. 마크 트윈은 이 사자상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자라고 했단다. 루이 16세의 왕위를 지키려다 죽은 스위스 용병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곳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기념할 가치가 있는 죽음이 아닌 듯싶었다. 소크라테스가 이곳에 왔다면, 그들의 행동은 용맹의 정의와는 거리가 먼 아첨이었다고 질타할 것 같았다.

우리는 한국식당, 실라에 갔다. 오늘의 술은 장석이 사기로 했다. 소주와 와인이 나왔다. 사람들은 이 좋은 술자리를 즐겨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카펠교에 갔다. 한강보다는 작지만 세느 강보다는 큰 강이었다. 그 강의 이쪽과 저쪽을 목조 다리가 연결하고 있었다. 목조 다리가 자못 정겨웠다. 우리의 사진작가는 난간에 사진기를 얹어 놓고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상(飛上)하는 물새였다. 차는 지리산 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버스는 굽이굽이 법주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스위스란다. 이곳의 들엔 논이 없었다. 온통 초지였다. 풀을 뜯는 양과 소만 보였다.

우리는 인터바켄 제(Interbaken See)를 통과하고 있었다. 멀리서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주역 64괘를 외웠다. 풍천대축, 풍택종부, 풍화가인, 풍뇌항, 중풍예, 풍수환, 풍산점, 풍지관.

버스는 그라인델 반트(Graindel Wand)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융프라우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산속 마을, 지리산으로 치면 의신 마을과 같은 곳이었다. 안내원은 우리가 그린델 발트(Grindel Wald)에서 묵을 수 있게 된 것을 대단한 영광이라 생각하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의 뜻을 몰랐다. 안내원은 여관 주인과 씨부렁거렸다. 그것은 이탤리어였다.

숙소에서 조금 걸어 내려와 식사를 하였다. 채소와 감자가 나왔다. 맥주를 한 잔 마셨다. 스위스의 물가가 살인적이라는 사실을 그때까지도 나는 전혀 몰랐다. 나는 철부지였다.모두들 알프스의 풍취에 젖어 산책에 나섰다. 나는 그냥 방으로 귀가했다. 나의 방을 찾은 이는 친우 장석이었다. 장석은 독일에서 구입한 고급 와인을 내놓았다. 조금 있으니 벗들이 왔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8월 23일 (금)

일찍 깨었다. 새벽 4시였을까? 시간도 모른 채 산장의 밤을 헤매기로 했다. 굳게 닫힌 문, 어둠을 열고 나섰다. 밤하늘엔 반달이 떠 있었다. 저 멀리 어린 시절의 북두칠성이 반짝이고 있었다. 길을 따라 올라갔다. 마치 지리산 의신 마을을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겁이 나기도 했다. 한참 올라가다가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보니 산은, 아이거(Eiger)는 괴물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융프라우는 나를 제압했다.

돌아왔으나 여관 문은 굳게 닫혀 있어 열리지 않았다. 나는 인근을 더 헤매기로 했다. 골목길을 따라 올라갔다. 답배 피우러 나온 동료 덕택에 겨우 여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6시 40분에 조식을 하였다. 빵과 커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디피는 빈곤의 지표였다.

융프라우에 올라가는 날이다. 열차를 바꿔 탄단다. 걸어 그린델발트 역까지 갔다. 톱니로 끌어올리는 알프스의 지그재그 열차, 학창 시절 들은 이야기다. 열차에 올라탔다. 깔끔하였다. 그 높은 언덕에도 집들이 있었고, 소들이 풀을 뜯었다. 한가롭다기 보다 조금은 외로웠다. 유배 온 소들….

풍광은 온통 낯설었다. 3000 미터 고지가 온통 침엽수림과 초원과 빙판이었다. 너무 낯설어 글이 되지 않았다. 그냥 펜으로 스케치했다. 차는 중도에 멈추었다. 클라이데 샤이뎈이었다. 다시 차는 터널 속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갔다. 1896년 그들은 이 굴을 뚫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2년 완공했다. 우리가 외세에 시달리던 때, 그들은 산세에 도전하고 있었다.

전망대에 도착했다. 가이더는 고산증세를 예고하였다. 역시 어지러웠다. 그런데 아마도 고산증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기증이었다. 앞에 출현한 우뚝 선 거벽 묀히를 나는 응시하길 포기하였다. 천 길 아래가 어지러웠다. 사람들은 마냥 즐거이 사진을 찍었다.

실내로 그냥 들어와 버렸다. 실내 스팀에 몸을 지졌다. 사람들은 빙실 속으로 들어갔으나 나는 돌아섰다. 매점에서 와인을 샀다. 그곳에서 보는 알프스도 좋았다. 일행들이 밀려왔다. 누군가 컵라면을 내놓았다. 누군가는 쇼핑을 하기도 하였다.

차는 내려갔다. 한국인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저 앞에서 폭포가 나타났다. 무서운 기색도 없이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세 개의 폭포였다. 인터라켄(Interlaken)은 두 호수 사이의 도시이다. 한식당에서 꼬리곰탕을 먹었다. 역시 와인도 돌았다. 식당에서 정류장까지 시내를 걸어 돌아왔다. 정류장 옆 강물은 유속이 거셌다. 석회수 물이었다. 시청사 앞엔 넓은 잔디 공원이 보였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 그래서 인터라켄이었다. 차는 열심히 제네바를 향해 달렸다. 머리속으로 주역 64괘를 외웠다. 수천수, 수택절, 수화기제, 수뇌둔, 수풍정, 중수감, 수산건, 수지비,

하늘 높이 솟구치는 분수가 보였다. 100미터란다. 호수 건너 마을은 프랑스이다. WTO 건물을 지나는데 옆 공원에 설치된 조각물 ‘부러진 의자’가 인상적이었다. 중국식 식당에 갔다. 서비스가 망측하였다.

8월 24일(토)

제네바 왕립 묘지에 갔다. 칼뱅의 무덤에서 임창노의 강연을 들었다. 창노는 대학 1학년 때 만난 벗이다. 그 때 불교에 심취한 창노와 함께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지금은 유럽 여행사 Euroscope의 대표이다. 창노에 의하면 루터와 칼뱅, 종교개혁가들은 16세기의 유럽을 근대로 이끈 혁명가들이었다. 종교개혁은 중세의 몽매를 깨고 인간 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었음을 이제사 알게 되었다.

나오는 길에 아르헨티나 시인의 무덤을 발견하였다. 지구 반대편의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던 시인의 묘가 이곳에 있다니! 우리는 무덤에 꽂힌 시집을 풀 속에서 찾아냈다.

공원으로 옮겼다. 파렐과 칼뱅, 벤쳐와 녹스, 제네바를 이끈 혁명적 지도자들의 입상을 벽에 박아놓은 대형 부조가 나왔다. 어둠 뒤 빛이 온다.(Post 0000 Bras Lux.) 광주엔 왜 이런 기념물이 없을까 안타까웠다. 우리는 중세의 골목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제네바는 현대와 중세가 이음새 없이 이어져갔다. 생 삐에르 교회를 보았고, 종교개혁 박물관에 들렀다. 내가 칼뱅이나 된 양, 얼굴을 넣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와인을 사고 싶었다. ‘정의의 건물’(법원) 앞에 와인 가게가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하필이면 문을 닫았다. 물어물어 와인 숍을 찾았다. 주인이 ‘와인’이라는 말을 몰랐다. 나중에 창노에게 물으니, ‘와인’이 아니라 ‘뱅’이란다. 그래서 포도밭을 vineyard(비녀드)라 하는가?
제네바의 시민들은 햇볕 아래에서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광장 한 켠 누드의 처녀 동상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 처녀 동상 뒤 벤취에서 쉬었다.

내려오는 길에 토마토와 무화과를 샀다. 중세를 빠져나와 다시 현대로 들어갔다. 가이더는 우리를 레닌의 얼굴이 부조로 새겨진 성문으로 데려갔다. 이렇게 레닌의 추억을 고이 간직해준 제네바가 내심 고마웠다.식사는 고급이었다. 수프에 살라드에 감자에 돼지고기 요리에 커피까지 나왔다. 식당의 벽에는 마이클 잭슨을 비롯하여 전 세계 유명한 예술가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제 차는 바젤로 간다. 버스에서 와인을 돌렸다. 판이 벌어진 것이다. 어제 산 햄을 안주 삼아 씹었다.바젤 대학은 24세의 니체가 강의를 한 대학이다. 우선 시청 광장에 들렀다. 복지(Wohl)와 자유(Freiheit)와 단결(Einskeit)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단어만 보아도 문장의 뜻이 간취되었다. 복지와 자유를 위해 단결하자는 뜻이리라.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갔는데, 난데없는 야외극장이 나왔다.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었다. 헤아려 보니 1000석이 넘었다. 부러웠다. 걸었더니 강물이 나왔다. 라인 강이 흐르고 있었다. 남과 여, 노와 소를 구분하지 않고 이곳 강가에 나온 이들은 모두 한가해보였다. 멀리 강물과 함께 떠내려가는 사람들도…

오늘은 스위스의 마지막 날이다. 길가에서 식사를 하였다. 샐러드와 스파게티와 크림이 나왔다. 물도 나왔다. 스위스 여행을 이끌어준 이는 김용우 씨였다. 성악을 전공하러 이탈리아에 온 이,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해박한 견식을 갖춘 이, 그의 언어 감각은 두드러져 보였다. 이곳에서 김용우 씨와 이별하였다.

물루즈(mulhouse)에 갔다. 물랑루즈에서 ‘랑’을 빼면 물루즈이다. 이곳은 프랑스이다. 우리는 오늘 저녁 전체 모임을 갖기로 했다. 다행히 여관엔 모두가 모일 공간이 예비되어 있었다. 나는 땀을 씻고 바로 향연의 자리에 갔다. 아주 깔끔한 백포도주 리즐링이 나왔다.

창노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동구권 사회주의 경제 이론을 연구하러 베를린에 왔는데, 동독이 무너지면서 한순간에 사회주의 경제 이론이 증발해 버리더라는 것이다. 학교의 수위를 한 적도 있었단다.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나?”는 질문을 자신에게 물었단다. 이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본인이 직접 답사하고, 걸어 다니면서 그동안 트레킹 여행 코스를 100여개나 개발했단다.

40년 전에 만난 벗들이 이렇게 만나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거, 괜찮지 않은가? 일행들이 보기에도 좋았나 보다. 그 사이에도 동네 축제에 갔다 온 이가 있었다. 그곳의 백중 날 축제였다.

 

8월 25일 (일)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였다. 벗들과 함께 인근 공원을 걸었다. 공원 옆 1층 건물에 ‘Bibliography Municipale’가 쓰여 있었다. 뭐냐? 우리는 온갖 추측의 힘을 발휘하여 ‘마을 문고’ 쯤으로 합의하였다. 맞나?

가는 곳은 스트라스부르그(Strassbourg)이다. 아름다운 곳이란다. 베를린에서 우리의 여행을 돕기 위해 달려온 이는 오정근 씨이다. 오씨는 현재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어제 우리는 프라이부르그(Freiburg) 여정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스트라스부르그에 몰입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꽃이 핀 다리 위를 걸었다. 벌들도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이곳의 노트르담 성당의 높이는 140미터다. 하늘을 찔렀다.

점심이 달라졌다. 닭고기와 마카로니 국수가 나왔다. 닭다리가 뜯을만 하였다. 맛이 있었다. 와인도 곁들였다. 식당을 나오는데 장석이 제의했다. “광우, 창노와 와인 한 잔 더하지?” 이럴 때 쓰는 표현이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일 것이다. 내가 먼저 한 잔 하자고 청하지는 못하나 먼저 제의를 해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런데 이 제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알고 보니 창노와 장석은 둘만이 와인을 마셨다. 나를 배반한 것이다.

슈트라스부르그 노트르담 성당 앞에 앉아 있는데, 뒤늦게 장석과 창노가 왔다. 장석의 륙색의 뒤가 열려져 있었다. 소매치기를 당한 것이다. 장석은 가난한 청년들에게 도네이션한 것으로 생각하자고 아쉬움을 털어내었다. 배반에 대한 복수였을까? 스트라스부르그의 길바닥은 걷기가 무척 힘들었다.

이제 가는 곳은 트리어(Trier)다. 마르크스의 생가가 있는 곳,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14년에 개척한 곳이다. 2000년 전, 라인 강 이쪽은 문명의 세계였고 라인 강 저쪽은 야만의 세계였다. 그 경계의 한 점이 트리어였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라인 강 너머엔 역사라곤 도무지 존재하지 않았다.”고 기술하였다.

지하실로 인도되었다. 천정은 높았다. 세계테마기행에서나 봄직한 그런 지하식당, 약간 어두우면서도 분위기는 밝은 식당, 맥주잔을 부딪히며 남녀 노소 대화를 나누는 그런 식당 말이다. 새삼 창노의 배려가 느껴졌다. 역시 음식도 달랐다. 수프도 좋았고, 돼지 훈제는 일품이었다. 비어도 한 잔 씩 돌렸다.
내일이면 창노가 떠난다. 밤 12시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석은 이번 여행의 경비를 캐물었으나, 창노는 웃기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8월 26일(월)

트리어의 아침이다. 독일은 식당부터 달랐다. 지금까지 없던 과일과 요구르트와 요리가 나왔다. 모젤 강의 강바람을 쏘였다. 오늘은 기어코 와이너리를 방문하리라. 성벽을 지나 마르크스의 생가에 도착했다. 나는 얼른 기념품을 샀다. 맑스의 사진을 담은 액자와 맑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기념 화폐를 샀다. 건너편 방에서 창노가 회원들에게 맑스의 생애를 설명하고 있었다. 정원엔 맑스의 동상이 있었다. 우리는 기념 촬영을 하였다.

생가를 나와 성벽 근처, 맑스의 대형 동상이 서 있는 곳을 찾았다. 이곳에서도 기념 촬영을 찍었다. 우리가 자주 시간을 지체하여 폴란드 출신 운전사가 불만이 많았나 보다. 가이더를 따라 이렇게 외쳤다. “파벨, 찐뚜에!”
우리는 로렐라이를 향해 가고 있었다. 중3때 만난 여인, 로렐라이 말이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쓸쓸한 이 말이 가슴속에 그립게도 끝없이 떠오른다”를 부르며 가고 있었다. 버스는 라인강을 향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라인강을 배로 건넜다. 강변 식당에 들어가니 실내는 아늑하였다. 나는 다윤이와 함께 자리를 하였다. 다윤이는 아빠를 닮아 제법 술을 즐기는 것이었다. 젊은이가 술을 좋아하여 내 마음에 꼭 들었다.
이제 창노와 헤어질 때가 왔다. 비가 한 점 두 점 뚝뚝 떨어졌다.

차는 강변을 따라 달렸다. 강 건너엔 포도밭이 수직으로 서 있었고, 저어기 로렐라이 상(像)이 강물 속에 앉아 있었다. 로렐라이의 슬픈 사연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버스는 어느새 와이너리에 당도했다.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와이너리란다. 다시 한 번 단절된 우리 역사의 아픔을 상기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숍에서 와인 4병을 사 버렸다. 유리 병마개도 많이 얻었다. 버스는 와이너리에서 내려와 우리를 라인 강변에 풀어놓았다. 골목길을 따라 올라갔다. 가이더는 자유 시간을 선포했고 나는 근처 와인 가게에 들어갔다. 지하로 내려가 와인을 시음하였다.

약속된 시간, 음식점에 갔다. 음악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남성 가수가 저음의 팝송을 불렀다. 조금 있으니 여성 가수가 등장하였다. 깜찍한 눈매, 오똑한 코, 보조개가 예쁜, 작은 얼굴의 여가수였다. 로렐라이를 독일어로 부르는데 정말이지 함께 따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무대 앞으로 뛰쳐나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었다. 여가수는 ‘아리랑’을 부르는 것이다. 음악은 짧은 시간에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다.

숙소에 도착하여 샤워를 하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208호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갔더니 젊은이들이 라면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생동감이 넘쳤다. 라면 몇 개가 이렇게 활기찬 분위기를 연출하다니…

 

8월 27일(화)

하이델베르그를 향해 달렸다. 강은 네케 강이었다. ‘철학자의 산책로’로 유명한 마을이다. 이곳에서 헤겔이 강의를 하였고, 하이데거가 있었단다. 하이델베르그는 중세에 의약으로 유명한 성이었다. 와인을 담은 거대한 오크통이 우리를 압도하였다. 나는 와인을 시음하였는데 공짜가 아니었다. 그것도 모르고 여러 잔을 마셔버렸다. 가이더는 자유 시간을 선포하였고 나는 장석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하이델베르그에도 한국인의 흔적이 있었다. ‘알바생 구함’이 한글로 쓰여 있었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 유쾌하게 환담을 하였다. 누군가 소주를 꺼내 마셨나 보다. 가이더 오정근 씨는 독일인 주인으로부터 ‘주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제 우리가 가는 곳은 로텐부억(Rotenbourg)이다. 중세의 공기를 간직한 성이었다. 담벼락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따라갔다. 성을 보수하는데 일본인들이 지원을 많이 하였나 보다. 그들의 이름이 담벼락에 기입되어 있었다. 다시 가이더는 자유 시간을 선포하였고, 나는 미니 차를 타기로 했다. 벗들이 합류하였다. 이런 곳이라면 2박 3일 묵어야 한다. 차는 동네 구석구석을 돌았다. 차를 모는 운전사는 노년이었는데 서툰 영어로도 대화를 잘하였다. 일행들이 나더러 내리란다. 그래서 성벽 입구에서 내렸다. 아무도 없는 공간, 혼자 어슬렁거렸다. 숍에 갔더니 욕심나는 스님의 입상이 있었다. 그런데 호주머니가 비어 있었다.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호주머니는 털털 비었다.

길을 따라 오르기로 했다. 가다 보니 저기에서 일행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빵을 집어 묵었다.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가 조금 이동하더니 그냥 성 밖에 내리는 것이다. 왠일이야? 중세의 성 밖에 우리는 숙소를 잡은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는 성 밖에서 성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성 안 벤취는 황홀하였다. 벤취 뒤 성벽은 훌륭한 스튜디오가 되었다. 번갈아 사진을 찍었다. 유럽의 고도(故都)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많이 마셨다. 돌아와 또 마셨다.

 

8월 28일(수)

내가 수집한 열 병의 와인, 어떻게 공수할 것인가? 버리고 갈 것인가, 세금을 내고라도 데리고 갈 것인가? 새벽부터 고민하였다. 일어나 식당에 갔다. 다행히 와인 운송을 도와주겠다는 분들이 있었다.버스는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괴테 하우스에 갔다. 괴테 하우스 앞에서 가이더는 나에게 한 마디 하라고 하였다. 이런 때, 이런 곳에서는 “침묵이 금이다.”걸어 걸어 시청 광장에 갔다. 자유시간이 선포되었다. 광장 한 가운데엔‘분서(焚書) 동판’이 있었다. 나찌가 이곳에서 책을 불태운 것이다. 나는 더듬더듬 분서의 저자들을 독일어로 읽어 주었다. 칼 마르크스, 고리끼, 콜론타이…광장 한 켠엔 결혼 축하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아마도 시청에 결혼식을 신고하고, 지인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자리인 것 같았다. 신부는 인도네시아 여성이었다. 나이가 육십 가까이 먹어 보였다. 헐.

우리는 마침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절차가 까다로워 탑승 시간을 놓칠 것만 같았다. 공항 복도를 마구 달렸다. 우리는 54번 입구에 섰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조그만 기다리세요.”라는 안내문이 분명 있었다. 루프트탄자도 우리를 기만할 수 있음을 알았다. 비행기는 56번 입구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좌석은 비즈네스 석이었다. 이런 경우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나? 자리가 넓어 좋았다. <헤겔의 미학 강의>를 읽으면서 10시간의 무료함을 달랬다. 북경에서 비행기를 갈아탔다. 아슬아슬하였다.

돌아와 여러 날 혼몽한 상태를 겪고 있다.

 

2019년 9월 10일 탈고함.


황광우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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