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올여름 최강의 무더위 속에서 한국민은 ‘열공’ 중이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 신상 문제로 맥이 빠지긴 했지만, 한국의 지소미아(한일 정보교류보호협정) 파기 방침으로 다시금 불붙었다. ‘열공’은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의 도발로 시작된 ‘도대체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했지만, 이제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로 확장됐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제와 한일협정 그리고 지소미아로 깊어졌다.
일본과 관련한 물음은 광범위했다. 삼한이래 1천여 회를 웃돈다는 ‘왜’ 혹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침략을 정당화하는 정한론(한국 정벌론)의 뿌리, 태평양과 동아시아에서 저지른 전쟁의 침략성을 부인하고 전쟁범죄에 대한 인정과 사과를 거부하는 이유,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부인하고 식민지에서 저지른 강제동원과 인권유린을 한사코 부정하는 배경,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웃나라의 정부마저 바꾸겠다고 도발하는 ‘침략성’의 뿌리까지.
이와 함께 이런 일본에 푼돈 받고 부역하는 한국의 학자들, 정권 쟁취를 위해서라면 일본의 내간·향간(첩자)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 정치권과 언론, 문재인 정부가 싫다고 ‘아베 만세’를 부르며 아베의 도발을 재촉하는 길거리 우파 등 21세기판 내선일체 추구세력들의 문제도 살폈다.
공교롭게도 일본을 공부하면 할수록 마주치는 게 미국이었다. 한국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역사문제, 영토문제의 출발점에는 미국이 있었다. 일제가 마음 놓고 조선을 병탄할 수 있게 길을 터준 것도 미국이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부인할 수 있게 한 것도 미국이었고,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든 것도 미국이었으며, 일제하 강제동원과 인권유린에 대한 배상을 거부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도 미국이었다. 미국은 일방적으로 일본을 애지중지 두둔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와 백색국가에서 제외 결정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상징적이었다. 미국은 그것이 한국과 일본의 안보협력에 결정적인 상처를 내는 것임에도 시종일관 외면했다. 아니 외면한 척 했을 뿐 일본의 일간지 <마이니치신문>의 8월11일치 보도처럼 “‘강제징용 노동자에 대한 배상 문제’에 대해 일본을 지지했다.” 한국이 따지자 엉거주춤 발을 빼는 척했지만, 미국은 일본의 도발을 침묵으로 묵인함으로서 자신의 편향을 분명히 했다. 지소미아 파기에는 미국도 한몫 했다.
김현종 청와대 안보실 2차장은 미국에 대한 학구열을 자극한 이 가운데 하나다. 그는 ‘마이니치 보도’ 다음날 이런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 “7월초 미국에서 외교안보 관계자들을 만나 중재를 요청하지 않았는가?” “(국제협상에서) 무언가를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순간 글로벌 호구가 된다. ··· 1905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는 일본의 행위를 제지해달라고 (미국에) 요청했다가 ‘호구’가 되지 않았는가. ··· 그저 한국의 확고한 3권분립 제도를 설명하고,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의 의미를 설명했을 뿐이다.” 맞다. 한국은 구한말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호구였다. 거래에 쓰는 미끼였다. 오늘은 한미관계에서 그 ‘호구의 역사’를 돌아보자.
1905년 5월24일 쓰시마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일본 연합함대에 괴멸됐다. 러시아는 국내에서 혁명까지 일어나 싸울 여력이 없었다. 일본도 전쟁체제로 말미암아 경제가 엉망이었다. 양국은 종전협상을 서둘렀다. 7월25일 필리핀으로 가던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에게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전갈이 날아왔다. 일본으로 가서 가쓰라 타로를 만나라는 것이었다. 27일 태프트와 타로가 만났다.
타로가 입을 열었다. “한국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귀결로서 한반도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필요하다. 만일 한국을 멋대로 놔둔다면 전쟁 이전처럼 국제적 분규를 거듭 불러올 것이다. 확고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태프트는 공감을 표시했다. “일본의 동의 없이는 어떤 대외조약도 체결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 있을 정도의 (한국에 대한) 보호조치를 확립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항구적 평화에 기여할 것이다.” 타로가 미국의 관심사에 대해 언급했다. “필리핀은 미국과 같은 나라가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침략의 의도도 갖지 않다.” 태프트는 7월29일 비망록을 루스벨트에게 보냈고 루스벨트는 31일 이런 전문을 보냈다. “협의 내용은 전적으로 옳다. 그대가 한 모든 말을 내가 확인했다는 사실을 가쓰라에게 전달하기 바란다.” 이 전문은 8월7일 타로에게 전달됐다.
고종은 8월4일에야 ‘일본의 주권 침해를 막아 달라’는 밀서를 루스벨트에게 전달하려 했다. 이승만이 들고 온 이 밀서를 미국 정부는 접수하지 않았다. 주미공사관을 통해 정식으로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주미공사 김윤정은 이미 일본에 매수된 터였다.
1905년 9월5일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됐다. 조약에는 태프트와 가쓰라의 비망록에 담긴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도 감독 보호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그대로 명시됐다. 20세기 초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가장 더러운 거래’는 이렇게 조약이 되었다.
고종은 10월 호머 헐버트를 통해 다시 같은 내용의 밀서를 보냈다. 이번에도 미국은 접수하지 않았다. 한 달 뒤인 11월17일 결국 을사늑약이 강제되었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고종은 또 다시 헐버트를 통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려 했지만, 서한은 거부당했다. 미국은 오히려 일본이 을사늑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공사관을 퇴거해달라고 요구하자 가장 먼저 이를 수락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과정에서도 비슷한 거래가 또 이루어졌다.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촉발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15만6천여 명의 젊은이들을 잃었다. 당초 미국은 일본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응징하려 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자 미국의 태도는 돌변했다.
1949년6월 중국 공산당은 대륙을 사실상 장악했고, 1959년 8월29일 소련은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이제 미국에 대한 위협은 일본이 아니라 소련과 중국이었다. 실제로 이듬해 중공과 소련을 등에 업은 북한이 6월25일 한국을 남침했다. 미국은 일본을 무력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와는 정반대로 일본의 재건과 발전 쪽으로 전환했다. 일본 열도만큼 소련과 중국의 진출과 위협을 봉쇄할 기지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미국은 협상 과정에 한국이나 중국, 소련을 아예 참여시키지 않았다. 일본의 배상 책임을 면제했다. 일본을 침략국으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독도나 ‘북방 4개 섬’ 등 영토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의 주장을 반영했다. 일본의 재무장도 용인했다.
그 대가로 미국에게는 일본 열도를 미군기지로 활용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이 권리는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함께 발효된 미일 안보조약과 미일 행정협정에 명시됐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영토분쟁, 배상 및 보상을 포함한 역사 분쟁, 일본의 재무장 등 이후 동북아시아에 온갖 분쟁의 불씨를 남겨놓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불씨가 독도였다. 애초 미군은 독도를 한국령으로 간주했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사령부는 처음부터 일본의 행정구역에서 독도를 제외했다. 1946년6월 공표한 연합군 최고사령관 각서 1033호는 일본 선박의 독도와 그 주변 12해리 이내 출입을 금지했다. 6·25 전쟁 때는 한국의 방공식별구역에 독도를 포함했으며, 이 식별구역은 지금도 유효하다.
미국 정부도 강화조약 1~5차 초안에 독도를 한국령으로 명기했다. 그것이 1949년 12월 6차 초안부터 일본령으로 바뀌었다(6~9차 초안). 일본 정부를 대신해 로비한 윌리엄 시볼드 미 국무부 주일 정치고문의 주장이 주효했다. 그는 ‘역사적 이유’와 ‘냉전적 상황’을 들어 일본령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한반도가 공산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독도가 한국령이 되면 일본의 안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과 호주가 반발했다. 난처해진 미국은 1951년 5월 최종안에서 ‘독도’에 대한 언급을 아예 빼버렸다. 한국에 넘겨야 할 도서를 꼽으면서 독도를 뺀 것이다. 독도가 한국령으로 포함될 것으로 철썩 같이 믿었던 한국의 이승만 정부는 1951년 7월에야 독도 문제를 미국에 문의했다. 한국사나 한일 관계사에 문외한인 딘 러스크 국무차관보가 보낸 회신은 참담했다. “우리가 아는 정보로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취급된 적이 없었으며, 한국이 영유권을 주장했다고 볼 수 없다.” 넋 놓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이승만은 1952년 1월18일,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표 3개월 앞두고 독도와 독도로부터 60해리를 영해로 포함한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일방적으로 공표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국과 일본이 싸우건 말건, 미국은 자신의 관심사만 집요하게 밀어붙였다. 중국과 소련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선 한국 대만 일본이 결속해야 했다. 한국과 대만에 일본과 평화조약 체결을 재촉했다. 대만은 손쉽게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한국은 독도 영유권 문제나 식민지배에 대한 배·보상 등 역사문제를 놔두고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할 수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는 미국에게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만주군 하급장교 출신으로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 등 일본 자민당 수뇌부들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했다. 술에 취하면 일본 군가를 부를 정도였다. 게다가 박정희는 쿠데타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경제개발을 위한 종자돈과 공화당 창당을 위한 정치자금이 그것이었다. 박정희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얼렁뚱땅 한일기본협정을 체결했다.
그는 무상원조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를 배상이 아니라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받고, 뒷돈으로 정치자금 6600만 달러를 챙겼다. 대신 역사문제나 영토문제를 일본이 멋대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었다. 샌프란시코 강화조약보다 더 굴욕적인 협정이었다. 하지만 미국으로선 개의할 일이 아니었다. 중국과 소련을 봉쇄할 수 있는 체제가 만들어진 것으로 만족이었다.
미국을 탓해선 안 된다. 실망해서도 안 된다. 미국은 15만6천여 명의 미군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천문학적 전쟁비용을 쓰게 만든 일본에 대해 전후복구와 발전을 위해 발 벗고 지원했다. 이용가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나라다. 한국전쟁 때 미군은 3만3천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한국민은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그렇다고 미국 정부가 온전히 인도적 가치를 위해 참전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안보이익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최근 한일 간의 역사문제 갈등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보이는 태도는 그런 ‘미국 스타일’의 상징일 뿐이다. 다른 대통령에 비해 들이대는 게 저급할 뿐이지 본질은 다르지 않다. 그는 두 나라의 곤란한 처지를 이용해, 일본에는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을, 한국의 경우 주한미군 주둔비 폭탄 증액을 강압하고 있다. 특히 주둔비를 6배나 증액하라고 통보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 속에서 삐져나온 트럼프의 조롱은 한국민의 감정을 뒤집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임대료를 수금하러 다닐 때) 브루클린의 임대아파트에서 114.13달러를 받는 것보다 한국에서 10억 달러를 받는 것이 더 쉬웠다.” 그에게 한국은 호구 중에 상호구였다.
학구열이 미국과 주한미군 문제로까지 확장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솔직히 이용가치가 없다면 한국에 주한미군을 유지할 미국이 아니다. 이미 한국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나 에치슨라인,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경험한 바 있다. 사실 한국을 전진방어기지로 활용해 얻는 미국의 이익은 헤아리기 힘들다. 일본이 태평양과 미국을 지키는 불침항모라면, 한국의 기지 역시 일본과 미국을 보호하는 항모전단과 같은 구실을 한다. 실제로 미국 의회는 주한미군의 철수 시 이를 대체할 항공모함 전단을 운용해야 하는데, 운용비용이 지금의 주한미군 주둔비의 10배에 이른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주한미군이 운용하는 특별접근프로그램은 북한 미사일 발사 탐지 시간을 알래스카 기지의 15분에서 7초로 단축했다.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사들이는 무기는 덤이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0년간 67억3천100만 달러어치에 이른다. 그래서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미국더러 주한미군을 빼라고 해도 미국은 빼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물론 한국이 얻는 안보이익도 크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지하고, 중국의 동북아 패권 야욕을 억누르고, 일본의 군사대국화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는 구실을 한다. 한국이나 미국이 득실을 따지며 다툴 계제는 아니다.
트럼프의 행태는 미국과 주한미군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근현대사 속에서 미국이 한 더러운 거래들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했다. 문재인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한 배경엔 이런 요인도 작용했다. 김종대 의원은 이것을 ‘한국의 주권 선언’이라고 말했다. 이 말 속엔 ‘미국에 대한’이란 어구가 빠져 있었다.
지소미아는 2012년 미국의 압력으로 이명박 정부가 몰래 체결하려다 들통 나 실패했고, 2016년 역시 미국의 집요한 요구로 박근혜 정부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지소미아와 함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의 해결을 압박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돈 10억 엔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과 한국민의 자존심을 팔아넘겼다. 사법부를 압박해 사법주권 행사를 방해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이다.
미국은 정의의 사도도 수호천사도 아니다. 미국은 그저 미국인의 미국이다. 미국과 서로 협력하고 지원하되, 의지하고 매달릴 일이 아니다. 각자 추구하는 가치와 이익을 이해하고 존중하되, 그것에 우리를 동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미국에게 한국은 미끼였고, 사석이었으며, 최전방 전초기지였을 뿐이다.
이런 사실을 외면한 채 한미 동맹을 넘어 미국과의 일체화를 요구하는 자들이 많다. 조선조에는 전쟁의 참화까지 불러오면서 명나라를 섬기던 자들이 있었다. 구한말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앞장서 청나라 혹은 러시아 혹은 일본에 빌붙어 권세를 유지하려 했다. 결국 나라를 일본에 팔고 호의호식을 이어갔고 해방이 되자 발 빠르게 미국으로 돌아서 권력을 잡고, 과거의 매판 매국의 죄과를 덮어버린 자들이다. 지금 미국과 일체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안다. 과거 자신들의 선배가 일제에 부역해 권력과 부의 잔반을 취할 수 있었듯이, 이제 미국과 일체화를 통해 자신들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그 대신 이 나라와 국민은 군사적으로 미군의 최전방, 일본의 전진기지로 추락하고, 경제적으로는 원청-하청-재하청의 구조로 예속되리라는 것을 그들은 묵인하고 방조하고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