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처럼, 나도 비숍에게 푹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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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처럼, 나도

비숍에게 푹 빠졌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내가 비숍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시인 김수영을 통해서였다. <거대한 뿌리>에서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시인이 진짜 외국 여성과 사랑에 빠진 것으로 알았다. 이렇게 순진하였으니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는 시인의 자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아니,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좋다니?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내가 이 책을 만난 것도 20년이 더 지났다. 김수영처럼, 나도 푹 빠졌다. 시인은 이 책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할아버지를 만났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전해준 외할머니를 만났다. 부르르 떨었다. 입에 거품을 품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비숍의 황홀경을 알려주었다. “사회주의자 황광우가 맛이 갔다.”느니 “황광우가 머리가 돌았다”느니 “형편없는 수구 보수주의자로 전락했다”느니 별별 소문이 들려왔다. 김수영도 그런 소리를 들었나 보다. 그래서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라고 적었다. 시인은 또 적었다.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 담고 있는 보물을 이 짧은 지면에 다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탁은 여인의 명백한 운명이다.” 맞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일과는 빨래였다. 온종일 빨래에 붙들렸다. 빨래감을 들고 광주천에 갔다. 그곳 흐르는 물에서 빨래를 하였다. 어머니는 다듬이질을 하였다. 다다닥 닥닥…다듬이질엔 특유의 가락이 있었다. 역시 비숍의 문필은 정확했다. “서울의 밤의 정적을 깨는 유일한 소리는 규칙적인 다듬이 소리이다.”

비숍은 서문에서 자신의 문필이 추구하는 목표는 ‘정확성’이라고 밝혔다. 경험주의 철학의 나라 영국 특유의 엄격성을 그녀는 유감없이 실현하였다. “나는 조선 사람들이 지극히 대식가라는 사실을 목격했다.” 그랬다. 굶주림은 우리의 불행이었다. 내 어머니의 유일한 바램은 자식들이 ‘많이 쳐 먹는 것’이었다. ”내가 여러 차례 관찰한 바에 의하면 포식의 훈련은 어릴 적부터 시작된다. 어머니는 아이의 배를 평평한 숟갈로 두드리면서 아이가 밥을 더 먹을 수 있는지 확인한다.“

‘술 마시는 것’은 ‘주님을 모시는 것’이다. 심포지움(Symposium)은 함께(Sym) 술(posium)을 마시며 밤새 대화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살았다.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 것’을 나는 우리말로 ‘논술’이라 부른다. 애주가의 자기 합리화이다. 그런데 나의 애주 옹호가 그다지 주관적인 변호가 아님을 비숍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과음하지 않는 날은 거의 없었다. 과음은 조선의 독특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재미있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과음이 불명예가 아니다. 어떤 남자가 이성을 잃을 때까지 막걸리를 마신다고 해도 아무도 그를 야만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이어 참으로 경이로운 수채화가 등장한다. 1895년 조선은 그렇게도 아름다운 곳이었나 보다. “며칠이 지나자 풍경은 더욱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웅장하기까지 하였고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한강은 상당히 하류인데도 물은 수정처럼 맑았다. 티베트의 하늘처럼 푸른 창공을 뚫고 나온 햇빛이 부서지는 물결에 반사되고 있었다.” 맞다. 내가 처음 올라와 본 서울, 1970년대 서울의 한강은 참 아름다운 강이었다.

비숍은 보았다. 풀을 뜯는 황소의 모습을 보았다. “이슬 내린 아침이면 황소 떼를 싱싱한 풀밭에 매어 놓는다. 이 때 들려오는 황소의 울음소리, 아이들의 외침,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는 기분은 매우 상쾌하다.” 비숍이 본 풍경은 <향수> 그대로였다.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말이다.

비숍의 정확성은 명성 왕후에 대한 묘사에서 극치를 달린다. 고백하자면 나의 머리에 새겨진 명성 왕후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비숍이 목격한 왕후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왕비 전하는 아주 잘 생긴 날씬한 여성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까만 머리에 하얀 피부는 진주 빛 분을 발라 더욱 희게 보였다. 눈은 냉철하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사진보다 더 정확하게 비숍은 왕후의 미모를 그려냈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매력적인 예의범절과 사려 깊은 호의, 뛰어난 지성과 당당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더도 보태거나 줄이지 않았다. 사람의 인격은 그의 말을 통해 드러나는 법인데, 비숍도 유럽을 대표하는 지성인이었지만, 그런 지성인이 조선에서 만난 한 여인의 화술에 놀래버린 것이다. “그녀의 화법은 탁월한(remarkable)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숍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가 만든 여성이었다. 전 세계를 주물럭거리던 영국,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겠다던 오만한 영국에서 온 여자였다, 뉴턴과 패러데이, 다윈과 맥스웰을 배출한 나라의 백인 우월주의, 동양은 후진이고 서양은 선진이라는 유치한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그녀 또한 자유롭지 않았다. “낡아빠진 고풍, 말할 수 없는 구습, 고칠 수도 없고 개혁할 수도 없는 동양적 사고…거친 흔들림으로 인하여 수세기에 걸친 잠에서 깨어나 겁에 질리고 넋이 나간, 이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독립 국가”라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 민족에게 참으로 소중한 선물을 주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문화훈장을 하사해야 한다고 나는 본다. 누가 참수된 전봉준의 모습을 기록하였던가? 1895년 그녀는 서소문에서 참수된 전봉준의 얼굴을 보았다. “서소문 밖 장터에 전봉준의 목 잘린 머리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얼굴은 당당하고도 평온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목 잘린 머리는 노상에 방치되어 있었다. 개들은 몰래 숨어서 길 위에 버려진 목 잘린 머리들을 뜯어먹고 있었다.“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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