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진실은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
변화의 시기에 세상이 불안으로 넘친다. 청암부인의 불안은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이를 이어갈 장손에 대한 집착으로, 그 기세에 눌린 강모의 불안은 바이올린, 강실이, 오유키로, 기채와 기표의 의 불안은 축재와 착취 그리고 눈감아줌으로, 오유키는 불안에 가구에 집착한다. 빈곳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고 무언가로 채우려고 한다. 사회의 그물망 속 스스로 대상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불안이 드러나는 양태이다.
혼불 속 홀로된 양민 여성들은 세상에 놓여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어디 기댈 곳이 없으니 우뚝 서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자기로서 살아내는 것이다. 양반 신분의 꽃 같은 강실은 순결함을 꺾으니 꺽인다. 양민 비오리는 꽃다운 나이에 재취로 시집 갔다 돌아와 헛소문에 꺽이지만 제 목소리를 낸다. 홀로된 후 보쌈되어 와서 사는 김씨부인과 첫날밤 도망간 남편을 기다리는 인월댁은 슬픔과 증오를 삭히며 비우며 살아가고, 소복을 입고 죽은 준의에게 시집 온 청암 부인은 양민이나 하는 짓이라 천대 받았을 재산을 불리고 나누며 하루하루를 꽉꽉 채워간다. 채워가는 삶 속 신랑 준의에 대한 집착이 기태, 강태로 이어져 그 불안이 잉태한 그늘이 있다. 그 세계를 넘어서는 기쁨을 알 수 있었을 청암은 가문을 벋어나지 못하고 결핍의 응어리를 남기고 갔다.
껍데기에 갇혀 사는 삶을 선택할 것인가? 탈피하고 나비가 될 것인가? 안락하고 고정된 신분 질서 안에서 껍데기를 벗는 것은 더욱 어려워 보인다. 현실을 회피하려는 외아들 강모는 분노로 절제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촌 강실이를 무너뜨리고, 마누라 효원을 겁간하고, 기생 오유키를 돈으로 구하고, 청암부인이 이룬 것을 탕진하며 더 약한 여성들의 작은 세계를 망가뜨리며 스스로를 해친다. 스스로 망가뜨린 흔적을 바라보지 못하고 분노하며 도망간다. 강실이를 겁간해 양반의 자식을 낳으려는 춘복, 이런 춘복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 일을 적극적으로 돕는 오류댁은 변동천하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왜 변화의 시기엔 분노로 악으로 튀는 이들이 있을까? 악한 본성의 씨앗은 왜 쉽게 살아나는 것일까? 억압한 것들에 날개가 있는 것일까? 착하게 사는 것이 미덕이지만 억압이 아닌 진실을 만남으로서만 탈피 할 수 있다면 악이 흐르게 두어야 하는 것인가? 각자가 탈피하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개인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대상으로 살아감이 만드는 무질서는 악을 불러내는 것 같다. 대상으로 살아가면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상으로 살아가는 불안의 씨앗은 급속한 모더니즘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망각하게 된 자본화된 현대에도 있다. 눈먼 자본이 먹어버린 전통적 삶이 주는 편안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점점 느낄 수 없게 되었다.
현대 사회는 스스로 대상이 되기를 갈망하라고 부추긴다. 대상이 되어 물건을 사고 치장을 하고 헛것을 쫒고 일상을 버리고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라고 한다. 이런 소비의 주체가 된 여성들이 세상을 누린다고 소외된 남성들은 말한다. 그 이면은 보지 못하고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으로 세계의 주체가 이동했다고들 한다. 현대인은 적극적인 소비의 방식으로 대상으로 살아가며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체적으로 내 것과 그 울타리를 지킨다. 불안함에 내 울타리를 지키려다 마음의 샘이 말라간다. 나와 다른것들도 사랑하며 조화로운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것은 왜 어려울까?
어린 시절 시골에서 남의 새끼를 돌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마음 이었던 것 같다. 길러내야 하는 마음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도리로 그리 살았던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자연스럽게 남의 새끼도 사랑하며 서로 돕는데서 즐거움을 찾고 어두운 감정을 삭혀가며 배운신 것 같다.그 시대에는 천천히 흐르는 사회 질서 안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그리 믿고 살아갔던 것 같다. 변화가 빠른 현대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삶을 방식을 따라하며 스스로를 보호하느라 급급해서 그럴 여유가 사라져 가는 것 같다.
혼불에는 총체적 불안 속 그 시대의 다양한 여성이 가꾸어 간 삶의 모습이 있다. 최명희는 1947년생으로 엄마 또래이다. 교육 받지 못한 엄마는 홀로 살고 싶었지만 다른 길을 몰라 결혼을 했고 결혼과 동시에 삶이 무덤이었다고 하셨다. 기억 속 엄마는 투명인간이었다. 동시대의 여성이 변하는 근대에 흔들리며 여전히 제 삶에서 한 발짝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최명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엄마 시대의 여성이 기록한 그 시대 여성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엄마는 인월댁처럼 삭히는 방식으로 이겨내셨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선택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 지금 현대 여성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교육 받은 여성들은 과연 그 엄마가 간 길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그 틀에서 자유로워졌을까? 엄마들을 억압 했던 것을 대물림하지 않으려 길러낸 마음의 그늘은 무얼까? 여직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던 나지만 가끔 작은 세계에서 구원하고 구원받고 싶은 마음에 결혼 속으로 숨고 싶다. 불안한 시기 길을 헤매며 스스로를 구원하기보다 타인에 의한 구원을 생각하는 나는 이 시대의 여성성이라는 틀을 벋지 못했다. 불안함에 잠식되거나 흔들리지 않고 내 얼을 세우는 길을 찾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