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손 쉬운 한국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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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조선부터 취하라”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과 아베의 ‘강한 국가’—

 

쇼인 신사에 참배하는 아베 신조 총리 (출처 : 연합뉴스)

 

야마구치현(옛 조슈번)의 주도인 야마구치시에는 사이코데이(채향정)가 있다. 지금은 지방문재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채향정은 13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최고의 요정이었다. 조슈번 벌족이 일본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19세기 말부터 새로운 조슈번 벌이 정치를 쥐락펴락 하던 20세기 후반까지 이른바 ‘일본 요정정치’의 꽃 중의 꽃이었다. 한국의 친일 정객들을 불러들여 한일협정을 체결한 사토 에이사쿠 전 수상의 별실도 그곳에 있다.

채향정의 가장 큰 연회장인 오히로마에는 좌우 벽을 따라 유명인사의 묵서가 늘어서 있다.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등 이곳 출신 메이지유신과 조선 정벌의 주역들, 그 후예인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등 일본의 현대 정치판의 대부들이 쓴 묵서다. 명성황후 살해의 주범 미우라 고로의 묵서는 오히로마와 사토의 별실 두 군데에 걸려 있다. 끝자리엔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의 편액도 걸려 있다. “적연부동(寂然不動)”.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해 불과 1년 만에 수상직을 내려놓은 아베는 한동안 중앙에 발을 끊었다. 지역구인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채향정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정치적 사표로 삼았던 이들의 신조와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으니, 절치부심하며 마음을 추스르기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2009년 9월) 아베가 묵서를 하나 들고 왔다. “마음은 조용하고 편안하고, 동요하지 않는다.” 다시 출사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아베는 곧 도쿄로 돌아갔다.

그는 2012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두 번째 수상이 됐다. 선거 과정에서 그는 슬로건으로 ‘강한 일본’을 내걸었다. 그 내용은 수상 취임 후 바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취임 1년째 되는 날 그는 전격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그는 말했다. “1차 정권 때 참배를 미룬 것은 ‘통한의 극치’였다.” 앞으로 각오를 이렇게 밝혔다. “자신의 생각대로 나아가겠다.”

그해 8월13일엔 일본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조슈번 벌족의 대부 요시다 쇼인의 묘소를 참배했다.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아베는 이렇게 고했다. “앞으로 올바른 판단을 하겠습니다.” 요시다가 꿈꾸던 것은 북으로는 조선과 만주와 중국,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까지 취하여 ‘일본 굴기(산처럼 우뚝 세우는 것)’였다. 체제를 바꾸고 힘을 길러 주변을 취한 뒤 두 오랑캐(당시 미국과 러시아)와 맞선다! 이후 아베는 확실하게 요시다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1910년 8월29일 밤, 최초의 조선 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는 남산 기슭 통감관저에서 덕수궁과 경복궁 쪽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그날은 대한제국에 대한 병합을 완성하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날이었다. 그는 중천의 달을 향해 술잔을 들어 올리고는 어줍잖은 하야쿠(일본의 단형시) 한 줄 읊었다.

“고바야카와 타타카케,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가 살아 있었다면 과연 오늘 저녁 저 달을 어떻게 보았을고.” 세 사람은 1592년 선봉장이 되어 조선을 침공했던 패장들이다.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퇴각했다.

테라우치 곁에는 그의 전임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심복이 있었다. 그는 테라우치의 하야쿠를 이어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땅 속에서 깨워 보이리라, 조선 산 높이 오르는 일본 국기를.” 이토는 9개월 전인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끝내 조선 병탄의 야욕을 이루지 못했으니, 도요토미와 신세가 비슷했다. 테라우치는 조선을 집어삼키려다 실패한 도요토미와 그 장수들 그리고 이토 앞에서 자신이 이룬 ‘조선 정벌’의 마침표를 찍은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조선 정벌을 가장 열렬히 추구했던 집단은 혼슈의 서쪽 끝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의 하급 사무라이들이었다. 조선을 유린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여전히 주군으로 사모하던 무리였다. 이들은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덴노 체제(일왕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복원한 뒤 ‘정한((征韓)’을 추진했다. 정신적 스승이자 실천적 사표였던 요시다 쇼인의 지침이었다.

쇼인은 1854년 옥중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 “미국과 강화를 했지만(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함포에 굴복해 불평등조약을 맺은 사실), 우리가 이것을 파기함으로써 이적의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장정을 엄히 하고 신의를 두텁게한 뒤 국력을 배양해 취하기 쉬운 한국, 만주, 지나를 복종시키고, 열강과의 교역에서 잃은 국부와 토지를 조선 만주에서 보상받아야 한다.” 이토나 데라우치 등 그의 제자들이 일제의 동아시아 책략으로 삼은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요시다는 설화 수준의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탐독했다. 그 속에서 한반도의 고대국가 3한은 ‘덴노’에게 조공을 바치던 속국이었다. ‘덴노’의 은혜를 저버리고 중국을 섬기는 3한은 정벌해 마땅하다고 요시다는 생각했다. 고대부터 근세까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약탈은 이런 식으로 합리화됐다.

그러나 ‘왜’의 침략은 ‘덴노’가 출현하기 전부터 있었다. 3국시대의 신라는 끊임없는 왜구의 약탈에 시달렸다. 서기 400년에는 서라벌까지 밀려오기도 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힘을 빌려 왜구를 격퇴한 적도 있었다. ‘덴노’ 등장 이후 일본의 침략은 규모가 더 커졌다. 663년 백제 유민과 함께 백제 고토를 회복한다며 전선 8백 척에 4만여 대군으로 쳐들어와 백강에서 나당연합군과 일전을 벌이다가 패퇴하기도 했다. 760년을 전후해선 발해를 유혹해 신라 협공을 추진했으나 발해의 거부로 실패했다.

고려에 대한 일본의 침탈은 심각했다. 고려 말로 접어들면서 더욱 기승을 부려, 고종 때는 재위 46년 동안 70여 차례에 이르렀고, 우왕 때는 재위 14년 동안 378건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왜는 해안 지방에서 약탈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많게는 500여 척이 선단을 이뤄 내륙 깊숙이 침범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엔 312건의 왜구 침략 기사가 기록돼 있다. 한반도 전체를 유린한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제외한 숫자다.

임진년의 침략이 무위로 돌아가고 도요토미가 죽음을 맞게 되자, 막부(군사 정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로 넘어갔다. 도요토미의 심복이었던 조슈번, 사쓰마번, 도사번의 다이묘들은 도쿠가와 막부의 등장과 함께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영지는 쪼그라들어 가신을 거느리기도 어려웠다. 때문에 세 번의 다이묘와 사무라이는 250여 동안 도쿠가와 막부를 증오하며, 도요토미 시절을 그리워했다.

19세기 초부터 미국과 유럽 열강이 일본을 침탈하기 시작했다. 영주들에 대한 막부의 장악력도 이완됐다. 1850년을 전후해 조슈 번과 사쓰마 번에서 ‘존왕양이’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막부를 없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실현하고, 대화혼(大和魂)으로 서양 오랑캐를 배척하자는 것이었다. ‘존왕’을 앞세운 것은 ‘토막’(막부 토벌)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을 국가적인 이념으로 삼고, 책략으로 정리한 것이 요시다였다.

조슈의 하급무사 집안에서 태어난 요시다는 20대 초반 ‘서양 오랑캐’의 실상을 탐색하기 위해 밀항하다가 체포돼 옥에 구금되면서 수인들에게 하이쿠나 서예 나아가 <맹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옥에서 나와 자택연금 상태에서 송하촌숙(쇼카손주쿠)라는 학당을 만들어 인근의 하급 사무라이들을 가르쳤다. 교육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그가 감옥에서 지은 ‘유수록’에 잘 나타나 있다.

‘하극상에 의해 왕조가 바뀌는 중국과 달리 황손이 만세일계를 이루는 일본이 중국보다 우월하다’, ‘인민이 있고 천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성(천황)이 있은 연후에 창생이 있다.’ 역사관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대한 맹신에 기초하고 있다. ‘고대에 천황에게 조공을 바치던 조선의 나라들(가야 신라 백제 고구려)이, 국체(덴노 체제)의 쇠퇴와 함께 교만해져 은혜를 저버렸다.’

이런 인식에서 나온 책략이 막부를 타도해 국체를 튼튼히 한 뒤 조선과 지나(중국)를 정복하자는 ‘토막’과 ‘정한’이었다. “국체가 손상된 도쿠가와 막부 시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이 신성의 도에 부합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신공황후(3한을 정벌한 덴노)나 히데요시야말로 황도를 밝게 하고 국위를 신장한 것으로서, ‘신주의 광휘’다.” ‘정한’은 신성의 도이며 황도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疆域(강역)을 소중히 하고 조약을 嚴히 함으로써 二虜(2로: 미국과 러시아)를 제어하고, 그 틈을 타 蝦夷(하이: 北海道)를 개간하며 유구(오키나와)를 손에 넣고, 朝鮮을 取하고, 滿洲를 꺾고, 支那를 누르고, 印度에 臨(임)함으로써 進取의 勢를 펴고, 이로써 退守(퇴수)의 기반을 굳히고, 神功과 豊國(풍국: 히데요시의 나라를 의미하는 듯함)이 아직 달성하지 못한 바를 이룩해야 한다.”

요시다는 지금도 ‘메이지 지사들의 위대한 스승’이며, 일본 극우세력의 정신적 사표다. 조슈번에선 그를 부를 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으면 물 한 모금 얻어 마시기 힘들다고 한다. 요시다의 제자들은 그의 사후 10여 년 만에 도쿠가와 막부에 종지부를 찍고 메이지 체제를 세웠다. 일본 권부의 중핵이 되어 한반도 병탄과 함께 만주, 오키나와, 쿠릴열도와 사할린, 필리핀과 인도차이나 반도를 집어삼키고 결국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다.

요시다의 조슈 번 제자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수제자로 꼽히는 다카스기 신사쿠는 막부 타도의 영웅이다. 2차 서남전쟁을 사실상 승리로 이끌어 막부를 몰락하게 만들었다. ‘양이’에도 투철해, 1862년 12월12일 쇼카손주쿠 후배인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구사카 겐즈이와 함께 에도의 영국공사관 방화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신사쿠에 대해 “동하면 우레 같고, 발하면 풍우 같았다”고 평가했다.

기도 다카요시는 사쓰마 번(지금의 가고시마 현)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메이지 유신의 3걸로 꼽힌다. ‘일본 육군의 교황’ 야마가타 아리모토는 조슈번 군벌의 수장으로 40여 년간 일본 육군을 장악했다. 청일전쟁 때 조선군 사령관이었다. 쇼카손주쿠 후배로 총리대신에 오른 가쓰라 다로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의 배후이기도 했다. 오시마 요시마사는 청일전쟁 전날 일본 육군 8천 명을 이끌고 경복궁을 점령해 조선 조정을 청일전쟁의 일본군 참모부로 만들었다. 오시마의 손녀는 아베 신조 현 일본 수상의 할머니다. 아베 외고조부인 셈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총리대신 2차례를 역임했고 을사늑약을 강제하는 등 조선 병탄을 진두지휘했다. 초대 조선 공사를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는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강화도조약을 강제했다. 미일 수호조약 체결 때 당한 것을 그대로 적용해 조선 침탈의 교두보를 닦았다. 미우라 고로는 이노우에의 후임으로, 공사가 되고 불과 1달 뒤 명성황후 시해를 지휘했다. 가쓰라 다로는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 일본의 조선 병탄을 미국이 용인하는 가쓰라-태프트 조약 조인의 당사자였으며,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1,2대 조선 총독이었다. 이밖에 ‘메이지유신 지사’로 추앙받는 다나카 기이치, 구사카 겐즈이, 요시다 토시마로, 이리에 스기조 등이 있다.

패전과 함께 요시다의 후계들이 일본 정치판에서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배려와 지원 속에서 ‘정한론’ 2세대들이 다시금 일본 정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조슈번 벌족의 대표적인 인물, 기시 노부스케와 사토 에이사쿠 전 수상이 그들이다. 그 뒤를 잇는 사람이 아베 신타로 전 자민당 간사장, 아베 신조 수상이다. 이들은 모두 조슈번이라는 지연 뿐 아니라 혈연으로 이어졌다. 기시는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이고, 아베 신타로의 장인이다. 사토는 기시의 동생이니 아베 신조의 작은 외할아버지다. 기시는 미국의 지원 속에서 자민당을 창당해, 일본의 우익 곧 정한론자들이 일본을 장기집권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요시다의 책략에 따라 1세대인 이토, 이노우에, 오시마, 야마시타, 데라우치 등이 조선을 병탄한 주역이라면, 기시는 요시다의 두 번째 과제인 만주를 일제의 위성국 만주국으로 만든 주역이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됐지만 재판도 받지 않고 불과 3년여 만에 출소했고, 일본 정계를 장악했다. 때문에 그에게는 ‘쇼와(일왕)의 요괴’라는 별명이 붙었다. 동생 사토는 1965년부터 8년 가까이, 일본에선 가장 오랫동안 수상을 했다. 재임 중 한국의 대통령 박정희를 끌어들여 미국의 숙원 사항이었던 한일협정을 성사시켰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관동군 장교였던 박정희는 기시를 하늘처럼 추앙했던 터였으니, 굴욕적인 일제의 식민지배 청산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아베 신타로는 장인인 기시의 후광을 업고 승승장구했으며, 아베 신조는 외할아버지 기시의 슬하에서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 대처하는 법을 체득하면서 자랐다. 아베 신조가 외할아버지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요시다 쇼인, 다카스기 신사쿠의 일생이었다. 마치 ‘자장가처럼 들었다’는 게 아베의 말이다.

아베의 친할아버지 아베 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향리인 조슈번 나가도에서 ‘현세의 요시다 선생님’으로 불릴 정도로 요시다를 따라 살았다. 그가 아들과 손주의 이름에 신(晉)을 넣은 것은 신(晉)사쿠처럼 살라는 것이었다. 하늘처럼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에게선 감히 차용할 수 없어서 수제자에게서 따왔다. 아베 신조는 사실상 요시다 쇼인이라는 정치적 태반 속에서 자라고 성장해 오늘에 이른 셈이다.

2006년 8월12일 그의 지역구인 시모노세키에서 자민당 총재 출마를 선언하면서는 이렇게 말했다. “사무라이 된 자, 그 뜻(志)을 세워야 그 뜻한 바, 기(氣) 또한 따른다.” 쇼인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는 줄곧 쇼인이 강조하던 ‘지성(至誠)’을 자신의 정치적 신념으로 내세웠다.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로 떠나기 전 아들의 머릿속에 새긴 것도 ‘지성’이었다.

아베가 바로 그 ‘지성’으로 추구해온 ‘강한 국가’는 요시다의 책략처럼 체제의 변화로부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제정된, 전쟁 포기를 선언한 현재의 헌법을 바꿔 ‘전후 체제’에서 탈피하려는 것이다. 헌법 9조(‘일체의 전력을 갖지 않으며, 무력행사를 영구히 폐기한다’)를 폐기하고, 국방군을 창설하도록 해 전쟁 가능한 국가로서 지위를 확보하려 한다.

평화헌법 개정 시도는 아베가 처음은 아니었다. 1957년 수상 시절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가 이미 시도했다. 기시 자신이 전범이었던 데다 전쟁의 참화를 기억하는 국민적 반대로 좌절되긴 했지만, 이런 생각은 기시로부터 부친 신타로를 거쳐 그에게 그대로 유전됐다.

두 번째가 교육을 통한 역사바로세우기다. 교육을 강조했던 쇼인이 걸었던 길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한국과 중국 및 동아시아 그리고 미국에 대한 침략은 없었다! 아베는 대놓고 이야기했다. “침략이란 상대적 개념이다!” 어느 편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공격이기도 하고 방어이기도 하다는 주장이다. “일본은 침략을 한 것이 아니라 방어를 했다.” 도쿄재판은 미국이 강요한 것이라고도 했다. 난징대학살은 중국이 조작한 것이고, 일본의 악행은 없었으며, 조선의 병탄은 합법적이었고, 위안부 강제동원도 없었다고 공언했다. 역사 교과서 개정작업이 이어졌다.

2014년엔 도덕이 정규 과목으로 신설되고 교과서도 나왔다. 새 교과서엔 요시다 쇼인이 등장한다. 아베가 입에 달고 다닌다는 “지성이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없다”는 쇼인의 말도 포함돼 있다. 그는 지성으로 ‘강한 국가’를 향해, 방어를 핑계로 침략하고 유린할 수 있는 국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요시다 쇼인은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도쿠가와 막부의 2인자 마노베의 암살계획을 추진했다. 사전에 발각돼 에도의 막부로 끌려가면서 제자들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남겼다. 이른바 ‘초망굴기(草莽崛起. 풀숲이 큰 산이 된다는 뜻. 민초여, 일어나 산처럼 우뚝 서라)’로 전해지는 내용이다. “풀숲과 같은 곳에 사는 민초들을 일으켜 세워 체제를 바꿔야 한다.”

19세기 쇼인의 제자들은 쇼인의 책략에 따라 우선 막부 체제를 뒤엎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세웠다. 서양 오랑캐와는 마찰을 피하면서 힘을 길러 조선부터 인도차이나까지 집어삼킨 뒤 최종적으로 서양 오랑캐와 맞붙는 태평양전쟁까지 일으켰다.

21세기 아베는 평화헌법 체제를 엎으려 한다. 일단 7월21일 참의원선거에서 개헌선 확보에 실패해 주춤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체제는 아직 바뀌지 않았지만, 손쉬운 목표부터 넘보고 있다. 독도를 분쟁지역화 해 언제든 싸움을 걸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이토, 아리모토, 가쓰라, 이노우에, 미우라, 데라우치 등이 취했던 접근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함께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한국을 공략하고 있다. 경제 침략이다. 한국 경제를 흔들어 한국에 친일정권을 세우려는 것이다. 아베의 외고조부 오시마는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한 뒤 조선에 친일내각을 세웠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문제는 한국이다. 150여 년이 지났지만 한국은 여전히 일본이 집어삼키기에 ‘손쉬운’ 상대로 여겨지고 있다. 150년 전 조선은 세도정치로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권력자들은 세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일본이건 청나라건 러시아건 누구에게나 손을 벌렸다.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정적을 제거하려 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러한가? 불행하게도 기득권 세력의 행태는 그때와 다르지 않다. 자유한국당은 일본의 경제 침략에 맞서기보다 문재인 정부를 무너트리는 데 더 혈안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선 문재인 정부가 망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국가와 국민이 고통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태도다. 실제로 이 나라의 ‘우파’라는 자들은 “나라가 결딴나야 문재인 정부가 망한다.”고 떠든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족벌언론은 멀쩡한 통계자료를 왜곡하거나, 정부 발표를 짜깁기해 일본의 경제 침략을 부채질하고, 이 나라 여론을 왜곡 조작해 아베와 극우파들의 침략의지에 힘을 실어준다.

아베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21세기판 일진회’가 또 어디 있을까. 한국의 주류란 자들이 그렇게 내응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손쉬운 상대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게 있다. 이 나라의 국민은 150년 전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당시 들불처럼 일어나던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일제의 의해 초토화됐고, 남한대토벌 작전 등으로 자주, 자존을 향한 저항은 유린당했다. 지금은 다르다. 해방 후 지금까지 오랫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은 여전하지만, 국민은 이들에게 세도를 맡길 만큼 어리석지 않다. 민주와 자주와 자존을 위해 이들의 방종과 억압에 저항하고, 좌절시키곤 했다. 기득권과 권력을 위해 일제와 내응하려는 자들을 좌시하지 않는다.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해방 후 이런 내용의 민요가 시중에 나돌았다. 미군이 한반도 남쪽에, 소련군이 한반도 북쪽에 진주해, 일제를 대신한 점령군으로 군림할 때였다. 미군정이 친일부역자들을 전면 배치해 해방된 조국을 사실상 식민지배의 재판으로 만들어놓을 때였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마라. 일본놈 일어서고, 중국놈 되나온다. 조선 사람 조심하라.” 이제 일본이 일어섰다. 그리하여 한 가지 덧붙여야겠다. ‘세도 챙기려 나라 파는 놈 발본하자.’

 

곽병찬
전 한겨레신문 대기자. 이 시대 인문의 승묵(繩墨), '향원익청(香遠益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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