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근대”
도시에 대한 최초의 공포는 기차 소리였어요. 남광주에서 “땡”하고 시커먼 쇳덩어리가 화난 것처럼 질주할 때 보리밭으로 도망가 숨어 보았어요. 그 때 막 해남에서 광주로 와 네 다섯살이었어요. 일본이 먹고 뱉어놓은 근대를 목격한 첫 장면이었어요.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 자체가 조직적인 테러였어요.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사친회비를 걷었는데 맨날 얻어 맞고 치욕스러웠어요.
힘든 시기였기에 조숙했어요. 지금은 대학생도 애기여요. 그때는 고2만 되도 어른이었어요. 지성인 포즈를 취하며 문호라고 생각하고 이상을 흉내 내고. 최초로 시가 찾아 온 거는 중2 때 였어요. 중2 때 신문배달을 했는데 방과 후 교복 입고 조선일보를 배달했는데 창피했어요.
그러다 어느날 새벽 4시, 허무가 찾아왔어요. 왜 사는가? 나는 무엇인가? 그 때 에세이를 읽었어요. 그 존재론적 공허감을 원고지처럼 채운 건 허접한 60년대 에세이였어요.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국민감정 이후 상륙한 거는 실존주의였어요. 모든 에세이가 사르트르, 카뮈,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를 이야기 했어요. 60~70년대에는 전 국민이 개똥철학 에세이를 읽었어요. 자격증인양.. 지금의 훨씬 풍요로운 시대의 독서 시장, 독서 경향과 비교가 되요. 우유 빛 나는 오늘날 잘먹고 잘사는 대학생들은 뭘 읽고 있나? 천박하고 결여된, 영적으로 결여된 시대여요.
당시에는 일본어로 중역된 서구근대문학을 폭식했어요. 근대 유입은 불량품, 모조품, 키츠였어요. 어느 사이 삶 자체를 통해 거품 자체를 나 스스로 여과했어요. 지금 내 시는 너네들도 까불 수 없는 키츠, 이것을 다 침전시켰고 이게 오늘의 한국 문화다, 키츠를 소화시킨 그 안의 시행착오를 제거하면서 오늘을 이끌었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강연에 이어 질문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중 기억나는 질문을 나눕니다.
질문 : 시를 언제 쓰시나요?
아침에 제일 잘 써져요. 5시 7시 사이. 저는 빈민 출신인데 테이스트는 거의 귀족입니다. 아침에 바흐를 틀어 놓고 오전 내내 듣고 바흐 음악은 소리라기보다 공간에 가득 채워지는 무늬 같아요. 바흐 음악은 간섭을 안해요. 베토벤은 강요하는데 바흐는 강요하는 것이 없어요. 실내 소리의 무늬가 저 혼자 흥얼거리듯이 공간을 채워주니 바흐를 좋아해요. 글을 쓸 때 감정의 공간이 생기는 것이 좋습니다. 바흐 음악은 달짝지근한 우울.. 그 맛이 보통이 아니여요.
낮에는 모차르트를 틀고 밤엔 재즈, 국악을 틀어요. 정가, 가곡, 시조 너무 좋아요. 근래에 나이 들어서 슈베르트가 눈물겨워요. 슈베르트의 죽기 전 900번대 곡들이 기가 막힙니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서 힘이 딸리게 되니까 가끔 베토벤을 듣고 충전합니다. 꽉 차죠. 베토벤 음악은 완벽해요. 음악으로 지을 수 있는 것의 완벽함이죠.
인간이 만든 그 모든 것 중 언어, 수학, 파르테논, 피라미드 별 게 다 있는데 가장 놀라운 거는 음악 같아요. 어쩌자고 이런 것을 알았을까? 어떻게 지을 수가 있을까? 시는 물리적으로 보여요. 검은 것은 기호, 흰 것은 종이데기여요. 문자를 표상해야 해요. 미술, 회화, 조각 모두 표상되어 있어요. 문학이 제일 힘들고 고돼요. 편한 게 미술이죠. 다 보여줘 버리니까. 시든 미술이든 표상하거나 표상된 것을 가지고 한참 지나야 느낌이 와요. 앞에 다 잊고 여기 와야 찡해지는 거죠. 음악은 찡해지는 감정을 처음부터 때려 버려요. 표상, 문자에 매개되지 않고 소리, 멜로디, 화음이 나오면 바로 정서가 작동이 되요. 바로 슬프고 흥겹고…
쇼표펜하우어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 라고 하고 헤겔은 마지막 최고의 단계에 있는 예술은 시라고 했어요. 음악은 공간을 없애버리잖아요. 시간 위 소리를 띄어 물질이 약화되고 정신이 강화되요. 시는 공간도 소리도 없어요. 기호뿐이죠. 물질성을 찾아볼 수 없어요. 거의 내면성 그 자체여요. 그래서 헤겔은 시는 예술의 최종 단계이고 예술의 종말이고 비감각 비물질적인 것이 시다. 시의 그 다음단계 예술의 뒷문, 즉 종교로 빠진다고 해요.
젊을 때 이런 황당무계한 주장이라고 생각했어요. 시는 호머 이전부터 있었는데 왜? 제 시가 선하고 만나면서 영성의 문제에 귀를 기울인다던가 귀를 연다던가 하면서 헤겔 말이 맞는가 싶어요. 근데 시가 종교 속으로 들어가면 시는 망해요. 들어갈랑 말랑 해야 해요. 시를 가지고 깨달으려고 하면 안 돼요. 깨달 듯 말 듯 차라리 안 깨닫고 헤메고 진동하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감동을 주고 깊이를 주지요.
질문: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인가요?
좋아하고 질투하는 시 많지요. 이백을 가장 존경하고 서정주를 인정합니다. 서정주에 대해 친일이라 후벼파려 하는데 성숙한 태도가 아니어요. 텍스트와 텍스트를 생산한 작가의 삶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한국 비평이 아직 초기 단계여요. 왜냐하면 어떤 텍스트는 작가의 삶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거기에 쓰여진 모든 것들이 그것만을 뜻하는가? 어떤 것은 삶으로부터 나온 것은 분명하지만 전부 환원되는 것은 아니여요. 환원주의의 오류여요. 역사주의로 문학 작품을 보고 텍스트 의미로 환원하면 겹이 없어요. 해석의 겹이 붙어야 심오하고 풍부해지는 건데… 서정주의 시는 상상력이 우주적이라 높고 깊고 그렇습니다. 서정주 시는 그 사람한테 나온 시라는 걸 느끼게 해요. 문학예술은 시대, 작가의 영향을 받지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여요. 성숙한 태도를 가지고 복권되었으면 합니다. 매이지 말고 열어 두고 봤으면 좋겠어요.
광주에는 상처가 많아요. 광주정신의 악령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시 위대한 도시로서 선한 광주 사람의 목소리가 많이 나면 좋겠어요, 동고송이 인문의 소나무 그늘을 피우기를 기원합니다.
나의 시대: 근대의 뒤틀린 문장
나는 한국전쟁 중에 태어났고 군사독재 체제 하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1960년대와 70년대 사이 박정희 장군은 유럽인들이 300년에 걸쳐 이루어 냈던 근대화를 불과 20년의 과정으로 압축시켰다. 아직 민간 부문의 힘이 싹트기도 전에 군인들은 마치 전쟁을 치르듯 근대화를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우리 근대의 두 추악한 얼굴을 목격한 바, 테러리즘과 키치가 그것이었다.
우리의 근대라는 문장이 구성되는 데 있어서 그 주어는 식민지 군부의 유산을 물려받은 군대였으며, 우리는 그것에 딸려 붙은 술어에 불과했다. 니혼고라는 말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식민주의의 긴 그림자 아래에서 아직도 결코 국가 기제 안에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문장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이 잘못 씌어진 문장은 유럽인들이 1930년대에 비슷한 문장으로부터 경험했던 것과는 달리 “내부로부터의 파시즘”이었다. 박 장군의 파시즘은 어떠한 식민지적인 확장을 위한 외부를 갖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그 중심에는 우리의 내부로 뻗쳐 들어오는 파시즘의 접점이 존재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외부로부터의 식민주의적 주변부를 내부 압제의 구심점으로 반전시켜 피학대적 권력의 절대적인 도구로 사용하였으며, 주권이 정지된 전 국민을 그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위한 전시체제에 동원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근대화 계획의 결과물은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지의 탈식민 과정에서 유사하게 목격되었던 역사의 아이러니인 ‘逆-근대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근대 프로젝트는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사회적 세계의 분화, 구획화, 분절이 이루어졌다. 이에 비하여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에서 남아도는 병력으로 민간 영역에 뛰어들어온 군대가 오로지 “하면 된다!” 라는 정언명법으로 근대화의 최고사령관 역할을 하였다. 파시스트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러한 맹목적인 ‘할 수 있다’는 정신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대뇌에서 이성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을 억눌렀다. 군인들은 비판적인 마음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사회의 모든 부문을 병영화하였다. 국회는 마비되었고,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었으며, 문학과 예술은 검열을 받았다. 그들은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선택된 소수에게 독점 자본의 특혜의 우유로 재벌이라는 대기업을 육성하여 측근에 두고 부렸다. 지속되는 계엄령의 싸늘한 공포 속에서 국민들의 일상생활은 거의 마비되어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러한 국가 기획을 실행하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은 국민들에 대한 전방위적 감시체계를 갖고 있던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였다. 군부는 국가를 지배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국가에 대해 거의 완벽에 가까운 통제를 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의에 대해 말하자면, 남한 전체는 모든 종류의 자유가 질식하여 사라져 버릴 하나의 대형 가스실에 가까웠다.
요컨대 내가 목격한 근대성은 근원적으로 공포라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끔찍하며 동시에 끔찍하게 하는 것이었다.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이러한 끔찍한 모더니티의 진짜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난 한편의 오싹한 미장센느였다. 군대는 계엄령을 거부하고 자유를 요구하는 한 도시를 10일 동안 고립시켰고, 고도로 훈련된 특수 부대를 투입시켜 시민들을 학살하고 능멸했다. 그때 총구를 내부를 향하여 겨눈 군인들은 영원히 낯선 타자였다.
내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원에 갈 때까지 박정희 대통령은 근대화라는 요새를 정복하고자 끊임없는 전쟁을 치렀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는 나에게 낯설고 억압적인 타자인 의붓아버지와 같은 이미지로 짙게 남아 있다. 그러한 아버지의 권력에 대한 나의 오이디푸스적 관계가 시작된 시점에서 나의 시적 작업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는 이성복, 최승자, 김정환, 최승호, 김혜순과 같은 내 동시대 시인들의 작품 역시 국가가 아버지로서 요구하는 모든 권위를 거부하는, 反-부권적 우상파괴에 직,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고 본다.
아파트, 자동차, 휴대폰 빨리 빨리는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말의 하나이다. 성급함, 허술한 행정, 불법적 건축 관행은 최단기간 동안 이루어진 근대화를 위한 군대 방식에 따르는 필연적인 부산물로 볼 수 있다. 강은 오염되고 대기는 오염되었다. 다리가 갑자기 끊어지고 부유한 동네의 백화점이 별 이유 없이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년대에 한강 변에 지어지기 시작한 아파트들은 전국으로 급속도로 퍼졌다. 해안을 따라 철강공장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 올랐다. 자동차 산업은 한때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산업으로 여겨졌으나 어느덧 하나 둘씩 경쟁적으로 공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중공업이라는 거대한 맥박이 마침내 근대의 피를 일관되고 빠른 속도로 공급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우리의 삶의 꼴을 완전히 다르게 조성하고 조율하기 시작하는 듯 했다. 아파트와 자동차는 아마도 현대적 삶의 방식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한 상징일 것이다. 그것들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분할하고 공간 사이의 이동 속도를 높여준다. 그것들은 현대적 가치의 실행자인 것이다.
한때, 식민주의와 군사독재에 의해 일그러진 거울에서 보았던 우리의 근대의 이미지에 대해 우리는 전율했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에 몸서리쳐지도록 부끄러웠다. 우리는 한동안 그러한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아파트이든 자동차이든 우리가 만든 것은 서투르고, 저속하고, 거칠고, 조잡한 하나의 초라한 모방물로 보였다. 사실 우리의 근대는 학교, 병원, 교회, 극장, 공장을 막론하고 전부 키치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무리 미숙련 정비공이라 하더라도 망가진 자동차를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엔 자동차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엉터리 근대성의 신텍스를 뜯어내어 다른 부분들로 교체하고 새로운 문구나 단어를 삽입해 보는 일련의 시행착오의 반복 속에서 갑자기 그것의 의미작용의 기제를 깨닫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해서 한국의 자동차가 ‘자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작용했다. 자동차 언어는 의미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듯 모더니티의 문장을 발화하는 행위에서 여태까지 의미를 만들지 못했던, 오염되고, 거칠고, 가짜 물건에 불과했던, 즉 키치에 속한 모든 것들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것을 ‘근대의 침전(sedimentation)’이라 칭한 바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도 모더니티가 내면화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리의 근대적인 것은 더 이상 낯설거나, 어색하거나, 외생적(外生的)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아파트에서 자고, 자가용을 운전하여 러시아워의 교통체증을 뚫고 출근하고, 돈을 벌고, 빚을 지고, 주식에 투자한다. 교통사고가 나면 부상자는 병원으로 옮겨져 뉴욕이나 도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수술을 받는다. 현대적인 모두스 비벤디의 내면화에 대해 몇몇 비평가들은 우리에게 근대의 첫 문장을 발송하거나 삽입시킨 ‘타자’ 혹은 먼 기원에 대한 종속이라고 비판한다. 즉 그것은 종속에 의해 유인된 불균등 발전의 심화라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이 원본과 복제품 즉 사본 사이의 시뮬레이션 모델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상이 그렇게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오리지널의 우월성을 전제하는 그 이분법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인간의 역사는 본디 끊임없는 복제품의 재생산이기 때문이다. 원본과 복제품을 굳이 구분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문명을 석기시대나, 또 그 이전으로 환원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산 자동차의 언어는 서구 자동차의 엉성한 복제품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자동차 산업의 의미작용은 그 문장 안에서 가동하기 시작하여 일련의 침전 과정을 통해 이제는 명확히 의미를 만들고 있다. 실제로 한국산 자동차는 남아메리카나 동유럽의 거리를 달리고 있다. 한국 조선업은 스웨덴 예테보리에 있는 유서 깊은 조선소의 문을 닫게 했는가 하면, ‘현대’ 자동차는 서구의 주요 브랜드와도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반도체, 이동통신, IT 산업에서 한국은 일본을 따라잡고 나아가서는 추월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의 세대에서 압제, 왜곡, 굴절을 통해 내면화된 근대화는 스스로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간에 나의 시는 그러한 ‘작용하는 모더니티’에 의해 충전되었다. 내 시는, 최종심급에서 우리 삶의 토대 자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근대적 조건에서 우리 역사 문장의 술어가 이제 주어의 가능성으로 스스로 변화하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동성으로부터 나왔으며 그것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하겠다. 특히, 80년대는 그러한 역동성이 한국에서 폭발하였던 시기였다. 그것은 우리의 모던 타임이었다, 비극적이고 난폭한; 우리는 이상에 쉽게 상처 받았으며 또 그것 때문에 잠 못 이루었다.
-글 황지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