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정약용, 《목민심서(牧民心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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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큰 도둑은 누구인가?
_ 정약용 《목민심서(牧民心書)》

 

 

탯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노전에서 젊은 아낙 그칠 줄 모르고 통곡하네
관청 문을 향해 슬피 울다 하늘 향해 부르짖네
전장에 나간 남편 돌아오지 않을 순 있어도
남자가 스스로 그걸 잘랐다는 말 들어본 적 없소
시아버지 돌아가 상복 입고 갓난아이 탯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삼대가 군적에 올랐다네
짧은 언변으로 아무리 호소해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고 있고
이정은 으르렁대며 마구간에서 소마저 끌고 가는구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유배지인 강진에서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를 지었다.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아이는 군적에 올라갔다.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며 남자는 자신의 생식기를 스스로 잘랐다. <애절양>은 양(陽), 즉 남자의 생식기를 자른 것을 슬퍼한다는 뜻이다. 관리의 횡포와 부패에 백성은 다시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버렸다. 이것이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1818년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지어 경종을 울렸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멀어졌고 그 말씀도 없어져서 그 도가 점점 어두워졌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열을 올린다. 백성은 시들고 병들어 서로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백성을 기른다는 자는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 배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백성을 기르는 자, 그래서 조선 시대 지방의 수령을 목민관(牧民官)이라 불렀다. 정약용은 목민관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큰 도둑은 나두고 좀도둑만 문죄하십니까

《목민심서》는 지방의 수령이 임지에 부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수령의 역할은 부임지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정약용은 말한다. “어리석은 자는 불학무식해서 산뜻한 옷에 좋은 갓을 쓰고 좋은 안장에 날랜 말을 타는 것으로 위풍을 떨치려고 한다. …… 금침(침구)과 솜옷 외에 책 한 수레를 싣고 간다면 맑은 선비의 행장(여행짐)이 될 것이다. 요즈음 수령으로 부임하는 사람들은 겨우 책력(책으로 된 달력) 한 권만 가지고 가고, 그 밖의 서적들은 한 권도 행장 속에 넣지 않는다. 임지에 가면 으레 많은 재물을 얻게 되어 돌아오는 행장이 반드시 무겁기 마련이니 한 권의 책일망정 부감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슬프다, 그 마음가짐의 비루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또 목민인들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이 우습다. 백성에게 손해를 끼치고도 그것이 단지 정책이었다며 거리낌도 부끄럼도 없는 관료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천하의 큰 도둑이 누구인가? 《목민심서》는 분명히 꼬집는다.

관리가 한 도둑을 심문하는데, “네가 도둑질하던 일을 말해보라” 하니 도둑이 짐짓 모르는 척하면서 “무엇을 도둑이라 합니까?”라고 한다. 관리가 말하기를 “네가 도둑인데 그것을 모르느냐! 궤짝을 열어 재물을 훔치는 것이 도둑이다”라고 하니

도둑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당신 말대로면 제가 어찌 도둑일 수 있겠습니까. 당신 같은 관리가 진짜 도둑입니다.
유생이 첩괄(과거 문제)을 낭랑히 읽으면서 일찍이 고금을 상고하거나 천인의 이치를 연구하여 국토를 경영하고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 것은 생각지도 않고, 밤낮으로 정치권력을 잡아 일확천금할 것을 바랍니다.
아비와 스승이 가르치는 것과 친구들과 배우는
것들도 도둑질뿐입니다.
관복을 입고 홀을 잡고 높이 당당히 앉으면 아전들이 옆에 늘어서고 하인들이 아래에서 웅위하여 존엄이 마치 천제와 같습니다.
벼슬은 이익을 따라 나오고 인사는 뇌물로써 이루어집니다.
원섭과 곽해 같은 큰 호족이 한낮에 살인을 하여도 뇌물 꾸러미가 한번 들어가면 법이 어찌 있으며, 황금에 권력이 있으니 백일도 빛을 잃어, 다시 나와서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나다니는 세상입니다.
마을의 천한 백성들은 벌을 돈으로 속죄하느라 더욱 가난의 고초를 겪어 머리는 흩어지고 살갗은 깎여서 집칸도 유지하지 못하고 처자를 팔 지경에 이르러 바다에 빠지고 구렁에 묻혀도 살피고 근심할 줄 모르니, 신이 노하고 사람이 원망하여도 돈의 신령스러움이 하늘에 통하여 그 벼슬의 명예 크게 일어나고 큰 저택은 구름처럼 이어 있고 노래와 풍악 소리는 땅을 울리고 종들은 벌 떼 같고 계집들은 방에 가득하니, 이것이 참으로 천하의 큰 도둑입니다.
땅을 파고 지붕을 뚫어 남의 돈 한 푼을 훔치면 곧 도둑으로 논죄하고, 관리들은 팔짱을 끼고 편히 앉아 수만의 돈을 긁어모으면서도 오히려 벼슬의 명예는 잃지 않으니, 큰 도둑은 불문하고 민간의 거지들과 좀도둑만 문죄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관리가 도둑을 놓아주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비리는 위에서 아래로 줄줄이 엮인다. 내가 깨끗한 척해도 아랫사람은 이미 알고 있다. 정약용은 계속 말한다.

아전을 단속하는 근본은 자기 자신을 규율함에 있다. 자기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아니하여도 일이 행하여질 것이요, 자기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을 하더라도 행하여지지 아니할 것이다. 백성은 토지로써 논밭을 삼지만 아전들은 백성으로써 논밭을 삼는다. 백성의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긁어내는 것으로써 농사짓는 일로 여기고 머릿수를 모으고 마구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써 수확하는 일을 삼는다. 이러한 습성이 이어져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아전을 단속하지 아니하고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허물이 없어야 다른 사람을 나무랄 수가 있는 것이 천하의 이치이니, 수령의 소행이 다른 사람을 따르게 하지 못하면서 오직 아전 단속하기를 위주로 한다면 명령해도 반드시 행하여지지 않으며 금지해도 반드시 그쳐지지 않고 위업이 떨치지 않을 것이며 법이 서지도 않을 것이다.

 

《목민심서》가 더 크게 울리는 이유

깨끗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거기에 더해져야 할 것은 현명함이다. 능력 없는 자가 큰 자리에 있으면 고통받는 건 백성뿐이다.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의 농사를 권장하고, 직기를 만들어서 부녀자의 길쌈을 권장하는 것은 수령의 직무다. 옛날 한나라의 조과는 씨 뿌리는 기계와 씨 뿌리는 데 쓰는 그릇을 만들고 파종법을 가르쳐서 백성의 노력이 크게 줄었다. 명나라의 진유학은 확산현을 맡아 다스릴 때 옷감 짜는 기계 800여 량을 만들어 가난한 부인들에게 주었다. 이것들은 모두 옛사람들의 꽃다운 업적이다. 지금은 더욱 정교한 기계가 나오는데 유독 우리나라의 백성만이 듣지 못하고 있다. 수령은 다스리고 남는 시간에 사물의 법칙을 연구하여 농기구, 직기를 만들고 백성을 가르쳐 백성의 노력을 줄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백성이 궁핍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위정자의 임무다. 경제가 어려울 때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드는 것이 지도자의 일이다. 사람들이 일할 수 있게 하고 사람들이 교육받을 수 있게 하고 사람들이 병을 고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지도자다. 어느 이익집단에 휘둘리지 않고 국가와 지역의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지도자다. 《목민심서》가 더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목민관의 개인에 관한 문제에 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민관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목민심서》는 빠짐없이 이야기한다.

 

조선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목민심서》에서 정약용은 목민관이 갖추어야 할 도리, 목민관의 덕목을 제시했다. 특히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등 세 편에서 목민관의 기본 덕목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율기> 편에서는 목민관에게 필요한 규율과 그 실천 방안을 논한다. 정약용은 ‘바른 몸가짐과 청렴한 마음’으로 ‘절약’하고 ‘청탁을 물리치라’고 했다. <봉공> 편에서는 목민관이 직무를 수행하면서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지켜야 할 사항을 다룬다. 정약용은 ‘덕을 널리 펼치고’ ‘법을 지키는’ 것과 아울러 ‘예로써 사람을 대하라’고 했다. 또한 ‘세금을 거두어들일 때는 부자부터’ 해야 하고 이때 ‘아전들의 부정과 비리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애민> 편에서는 목민관이 노인, 어린이, 곤궁한 사람들을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에 대해 논한다. 정약용은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병자를 구호’하고, 특히 수재와 화재와 같은 ‘재난에 최우선적으로 최선을 다해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 정약용이 말한 목민관의 덕목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정약용은 18세기에 39년을 살았고, 19세기에 36년을 살았다. 18세기의 정약용은 동부승지, 병조참의 등을 지낸 고위 관료였고, 19세기의 정약용은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쓴 학자였다. 19세기가 시작되는 1801년 귀양길에 오르면서 정약용의 삶은 전환기를 맞는다. 조선 역사에서 18세기 후반은 정조의 등장과 함께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뜨거웠던 때였다. 1800년 순조의 즉위와 함께 시작된 19세기는 세도정치, 서양의 침략, 문호 개방으로 이어지는 쇠퇴의 시대였다. 쇠퇴로 전환되는 시기에 정약용은 개혁을 통해 조선을 바꾸어보고자 강렬한 문제 제기를 했다. 그것은 절규이기도 하고 호소이기도 했다.

로뎅의 “칼레의 시민들”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의 상징으로 전해지는 칼레의 시민들. 그런데 이들은 높은 단 위의 영웅으로 묘사되지 않고, 왜 땅 위를 걷는 고뇌하는 인간으로 묘사되었을까?

 

삶과 작품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고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공자를 성인이라 부르고 소크라테스를 철인이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삶과 사상이 하나였기 때문이다. 정약용 역시 삶과 사상이 일치했다. 정약용은 관료로서의 경험과 귀양지에서 목격한 백성의 삶을 종합하여 《목민심서》를 짓고 목민관의 덕목을 제시했다. 그 덕목은 조선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누가 제시할 것인가?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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