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기억을 걷다] 희경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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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천년 역사 고도, 광주

광주의 읍호 변천과 희경루

 

필문 이선제(1390~1451) 등 광주 원로들의 간청으로 문종 원년(1451) 광주는 20여 년 만에 무진군에서 광주목으로 환원되었다. 광주목으로의 환원은 광주읍민에게는 커다란 경사였다. 마침 광주읍성에 새 누각이 준공되자, 이름을 희경루(喜慶樓)라 붙였다. 누각의 이름 희경은 1451년 광주가 무진군에서 광주목으로 승격된 것을 함께 기뻐하고 서로 경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451년 신숙주와 1536년 심언경은 각각 「희경루기」에서 “고을의 원로들이 모두 모여 경축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서로 경축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두 기록은 광주 읍민들이 광주목 승격을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광주목으로의 환원을 경축했던 고을 원님의 연회 장소 희경루는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남겨진 기록들을 참고하면 그 위치와 건물의 규모를 대략 집어낼 수 있다. 1924년 증보된 『광주읍지』는 “객사의 북쪽에 있다. 지금의 관덕정이다.”라고 적고 있다. 객사가 지금 무등극장 일대에 있었으니 광주우체국 주변임은 분명하다. 기쁨의 누각이란 이름의 희경루는 1533년 화재가 일어나 불타버린다. 그 후 「희경루기」를 남긴 신숙주의 후손인 광주목사 신한에 의해 재건된 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17세기까지는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오늘 희경루는 사라졌지만 신한에 의해 재건된 희경루는 한 폭의 그림으로 동국대 박물관에 남아 있다. 「희경루 방회도」가 그것이다. 이 그림은 명종 22년(1567) 광주목사 최응룡이 1546년 함께 과거에 급제했던 동기생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푼 모습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고시 합격 동기생들의 모임인 셈이다. 희경루와 주변이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광주읍민들의 기쁨을 복원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정면 5칸, 측면 4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누마루 집 형태로, 남원 광한루와 진주 촉석루에 버금가는 누정으로 추정된다.

명종 22년(1567), 광주목사 최응룡이 과거 급제 동기생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푼 모습을 그림으로 옮긴 「희경루 방희도」(동국대학교 소장)
1913년에 세워진 희경루 자리의 광주우체국

 

 

희경루가 20여 년 만에 군에서 목으로 승격된 일을 축하하는 뜻을 담고 있지만, 성종 20년(1489) 광주목은 다시 광산현으로 강등된다. 지금의 부시장쯤에 해당하는 5품 벼슬아치였던 판관 우윤공이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은 사건 때문이었다. 노흥준의 목사 구타 사건과 판관 우윤공의 화살 부상 사건으로 광주목은 무진군, 광산현으로 강등된다. 강등과 복구, 행정 치소의 존폐에 따라 광주읍민들은 환호하기도 실망하기도 했다. 희경루가 있었던 광주우체국 앞에 서서 변화무쌍했던 옛 광주의 이름들을 떠올려본다.

문헌에 등장하는 광주 최초의 이름은 무진주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동성왕 20년(498) 8월, 백제는 탐라가 공납을 바치지 않는다 하여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무진주에까지 이르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백제 동성왕 대에 광주가 무진주라 불렸으며, 호남 지역과 제주 지역의 조공을 거두어들이는 경로였음을 보여준다. 무진주라 불리던 광주는 신라의 삼국 통일 후 신문왕 6년(686)에 9주의 하나로 승격된다. 그리고 경덕왕 16년(757)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지면서 무진주는 무진도독부가 된다. 이때 무진도독부는 15군 43현과 3개현을 직할현으로 거느리게 된다. 오늘날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전역 및 전북의 고창 일대로, 구한말 전라남도 행정 구역의 밑바탕이 된다.

오늘 우리들이 부르는 빛고을 광주라는 명칭은 고려 태조 23년(940)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고려 초기 광주는 나주나 승주보다 그 격이 떨어진다. 전국에 12목이 설치된 고려 성종 2년(983), 통일신라시대 9주의 하나였던 무주에는 목이 설치되지 못한 반면 나주와 승주에는 목이 설치된다. 이는 광주가 마지막까지 후백제의 세력 기반이었음과 관련이 깊다. 광주는 후삼국시대 고려 태조 왕건의 적대 세력인 진훤의 세력권이었으며, 진훤의 사위인 지훤과 아들 용검은 후백제 마지막까지 무진도독이었다. 이와는 달리 나주는 호족이었던 다련군 오씨가 왕건과 혼인관계를 맺는 등 일찍부터 왕건의 세력에 편입되어 고려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왕건과 버들잎 소녀로 잘 알려진 장화왕후 오씨가 만났다는 나주 시청 앞 완사천은 그 흔적이다. 또한 승주는 진훤의 사위이자, 후백제 장군인 박영규의 세력이 있었던 지역이다. 박영규는 신검의 모반으로 금산사에 유폐된 진훤이 왕건에게 귀순하자 곧바로 왕건에게 귀부한다. 나주와 승주가 고려 초기 광주보다 더 중요한 지역으로 대우받았던 이유다.

『고려사』에 나타난 광주의 지명은 광주-해양현-익주-화평부-광주목으로 바뀐다. 때로는 광산과 익양으로 불리기도 했다.

광주는 공민왕 22년(1373), 다시 광주목으로 복구된다. 세종 12년(1430), 읍민 노흥준의 광주목사 신보안 구타 사건으로 무진군으로 강등되지만, 20여 년 뒤인 문종 대에 다시 환원된다. 성종 20년(1489)에는 판관 우윤공이 화살에 맞아 광산현으로 강등되지만, 연산군 7년(1501)에 복구되고, 인조 2년(1624)에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인조 12년(1634)에 복구되는 등 변화를 겪는다. 그러나 군현의 영역은 큰 변화 없이 조선 말까지 유지된다.

고종 32년(1895)에 시행된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23부제가 실시되면서 전라도가 나주부, 전주부, 남원부로 분할되자, 광주는 광주군으로 개편되어 나주부 예하에 속한다. 이듬해인 1896년, 전국의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전라도는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분리된다. 그리고 광주에 전라남도관찰부가 설치되고 도청 소재지가 된다. 나주 대신 광주가 도청 소재지가 되었던 것은 1895년 시행된 단발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단발령에 대한 나주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계기로 나주관찰부가 폐지되고 광주가 그 지위를 차지한 것이다.

1949년 광주부는 광주시로 바뀌고, 1986년 부산, 대구, 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직할시가 된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어 자치정부가 들어서면서 1995년 광주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변화무쌍했던 빛고을 광주의 명칭은, 광주의 역사가 희경루의 희경처럼 늘 기쁘고 경축스러운 역사만은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광주공원에 세워질 희경루 조감도

2015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앞두고 광주공원에 희경루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조감도에 보이는 희경루의 모습이 대단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 또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즐거워했으면 좋겠다.

 

광주목, 무진군으로 강등

광주 시민들의 정신적 고통이 1980년 5월 항쟁이라면, 수백 년 전 광주 읍민들의 가장 큰 아픔은 세종 대에 일어난 읍호 강등이었다. 읍호 강등이란 반역이나 친족 살해와 같은 삼강오상, 즉 강상을 범한 죄가 일어난 고을에 대해 고을의 이름을 바꾸거나 지위를 낮추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광주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름을 바꾼 적이 있었다. 광주이름 무진(武珍)이 고려의 제2대 왕 혜종의 이름과 글자가 같다는 이유로 무진(茂珍)으로 바꾼 경우가 그 예다. 이는 광주 사람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생긴 경우였다.

그런데 세종 12년(1430) 광주목에서 무진군으로의 강등은 이와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사건의 전모는 이러했다. 세종 11년(1429) 만호 벼슬을 역임한 읍민 노흥준이 목사 신보안을 구타했다. 신보안이 노흥준의 첩과 정을 통했기 때문이었다. 노흥준에 얻어터진 신보안은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인 세종 12년 광주목은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 신보안이 남의 애첩을 건드린 죄도 괘씸하지만, 현직 목사를 발로 걷어차 상해를 입힌 죄가 더 컸기 때문이다. 강상윤리를 해친 고을의 읍호 강등은 당시 법이었다. 문종 원년(1451) 필문 이선제 등 지역 원로들의 노력으로 다시 광주목으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성종 20년(1489) 판관 우윤공이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하면서 다시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

무진군과 광산현으로의 강등은 당시 광주읍민들의 치욕이었다.

 

'다시 독립의 기억을 걷다', '광주의 기억을 걷다' 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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