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기억을 걷다] 충효동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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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천년 역사 고도, 광주

최고급 분청사기 생산지, 충효동 가마

 

고려시대 중앙에 진상하던 최고급 상감청자의 주 생산지가 강진이었다면, 최고급 분청사기의 주 생산지는 무등산 수박으로 유명한 금곡동·충효동 일대의 무등산 자락이었다.

무등산 도자기의 출발은 멀리 선사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토기 그릇이나 신창동 출토의 소형 옹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연원은 아무래도 강진의 청자일 수밖에 없다. 12세기 고려 문화의 상징인 상감청자의 40% 이상을 생산하던 곳은 강진이었다. 그런데 고려 말 강진의 청자는 자취를 감춘다. 30여 차례에 걸친 왜구의 침략으로 남해안은 거의 폐허가 되었고, 강진도 예외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진의 도공들이 경기도 여주 등 전국으로 흩어졌고, 그중 일부가 금곡동·충효동
의 무등산 자락에 정착한다. 이들에 의해 14~17세기에 광주 가마 혹은 무등산 가마로 불리는 가마에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를 구워낸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된 분청사기는 중앙에 진상되는 최고급품이었다.

상감청자에 이어 출현한 분청사기는 흙을 물속에 침전시킨 후 가라앉은 고운 흙만으로 빚는 청자와는 달리, 흙을 거르지 않기 때문에 거칠고 투박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회청자에 분을 칠하는데, 이 때문에 분장회청사기라 불린다.

무등산의 서북쪽 자락에는 분청사기와 백자를 구웠던 가마터가 배재 마을에서부터 광주호 상류인 버성골까지 10여 개 이상 발견되고 있다. 이곳이 가마터로 적격이었음은 질 좋은 흙과 풍부한 연료 때문이었다. 가마터 위쪽의 고개 이름이 백토재로 불렸음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식영정·환벽당·소쇄원 등 증암천 유역의 담양 뜰에 경제적 기반을 둔 사림들의 수요도 한몫했을 것이다. 실제로 15세기 세종 대에 이곳이 가마터였음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무진군 동쪽 배재에 자기소가 한 곳 있고, 군 북쪽에 도기소가 한 곳 있다.”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지금 충효동 가마터 근처 마을 이름이 배재다.

충효동 분청사기 도요지 2호 가마(사적 제141호). 측면 퇴적층을 통해 조선 전기 도자 발달사를 알 수 있다.

 

한동안 묻힌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충효동 분청사기 가마터가 세상에 알려진 과정이 재미있다. 때는 1958년, 그 자리에 이웃하고 있던 충효초등학교에 근무하던 신형모(당시 35세) 교사가 도자 파편을 주워 학생들에게 교육 자료로 사용하곤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전라남도문화재보존위원회의 노석경(당시 42세) 위원이 현장을 답사하고 중앙에 보고한다. 그리고 1963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분청사기 가마터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발굴을 진행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 조사 결과 가마터 및 상감청자 파편을 비롯하여 분청사기와 백자 등 다양한 자기 편들이 수습된다. 특히 인화문, 조화문, 박지문, 귀얄문 등 매우 정교한 분청사기가 구워졌음도 알 수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63년 7월 23일자에 “이번 발굴 조사로 말미암아 학계에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던 박지문과 조화문의 자기가 많이 나왔고 그 밖에 예상 외로 수많은 명문 자료가 드러나 학계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번 발굴로 그릇의 용도, 납품처, 도공 이름 등이 알려져 도자기 연구 외에 다른 학문에도 적지 않게 기여할 수 있는 희귀한 자료가 되었다.”라고 발굴 성과를 출토 유물과 함께 대서특필하였다. 이보다 앞선 6월 25일자에서도 “수백 년 만에 잠깬 민족의 예술품”이라는 제목 아래 “도자예술 연구에 획기적 발견”이라는 부제를 달아 보도한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서도 충효동 가마의 의의를 짐작해볼 수 있다. 발굴 결과 충효동 가마터는 왕실에 진상된 최고급의 분청사기 생산지였고, 조선 전기의 도자기 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주요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곧바로 금곡동 산 129번지, 산 172번지 일대가 사적 제141호로 지정된다.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은 두 번째 발굴을 시작하였다. 두 번의 발굴 결과 4기의 가마터가 확인되고, 세종 이후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분청사기를 중심으로 그 전 단계인 말기 청자와 그 후단계인 백자 생산지임도 밝혀졌다.

한글로 ‘어존’이 새겨진 마상배

그런데 무등산 가마터에서 출토된 그릇에 각종 명문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무진내섬
(茂珍內贍), 내섬시(內贍寺), 박덕지(朴德只), 광상(光上), 광이(光二), 정윤이(丁閏二), 광(光), ‘어존’ 등의 명문이 그것이다. 이들 명문은 납품처나 품질 표시, 제작자, 제작지 및 제작 연대를 드러내고 있어 분청사기 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명문 ‘내섬시’는 납품하는 중앙 관청이 어디인지를 알려준다. 명문 ‘박덕지’ 등은 당시 도공의 이름이다. 도공의 이름, 이는 도자기를 조잡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조처로 생각된다. 요즘 농수산물 생산자의 이름을 표기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책임실명제인 셈이다.

품질의 상태를 알려준 ‘광별(光別)’ 명문이 새겨진 접시

명문 ‘광’과 ‘무진’은 제작지다. 또 귀얄로 분장된 마상배(말 위에서 술을 마실 때 쓰는 잔)의 바깥 면에는 한글로 ‘어존’이 음각되어 있다. 이는 도자기에 한글 명문이 새겨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로, 지방에까지 한글 보급이 이루어졌음도 보여준다.

제작 시기와 관련된 명문으로는 무진내섬시의 ‘무진(茂珍)’과 ‘성화(成化)’라는 연호가 새겨진 묘지가 주목된다. 명문 ‘무진’은 1430년부터 1451년 사이에 사용된 광주의 옛 이름이며, ‘성화’는 1465년부터 1487년까지 사용된 중국 명나라 헌종의 연호이기 때문이다.

관청의 이름이나 제작자의 이름을 새긴 것은 품질 관리 및 관청의 도자기를 개인이 소유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제작지나 제작 시기를 밝히기 위해 지명이나 간지를 넣기도 했다. 이러한 명문은 오늘 도자기의 성격이나 내력을 밝혀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가 아닐 수 없다.

 

충효동 2호 가마터

600년 전 금곡 마을 일대에 강진의 청자 도공들이 모여든다. 30여 차례가 넘는 왜구의 침략 때문에 찾은 새 삶터였다. 이 도공들과 그 후손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마가 사적 제141호로 지정되어 보호각에 들어 있는 충효동 도요지를 비롯하여, 그 일대에서 10여 개 이상 발견되고 있다. 1963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어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의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4기의 가마터는 왕실에 진상된 고품질의 분청사기 생산지였고, 또한 15세기 조선시대 도자기의 시기적인 변화 과정을 알려주는 주요 유적지임도 확인되었다.

그중 전시실 바로 위의 보호각 안에 위치한 2호 가마는 아궁이에서부터 굴뚝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드러나 도자기 가마의 변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 가마는 땅을 약간 파 들어간 반 지하식이며, 가마 벽은 진흙으로 축조되었다. 폭 1미터 내외의 도랑 자국이 경사도 13도로 완만하게 올라가면서 20.6미터 길이로 이어져 있다. 검붉게 그을린 불 자국이 600년 세월을 뛰어넘었지만, 아직도 선연하다. 오른쪽에는 출입구인 옆문이 6개가 나 있다. 불을 지피는 아궁이의 벽면은 돌
로 쌓은 후 진흙을 발랐다.

충효동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가장 주목되는 곳은 불을 지폈던 아궁이 좌측의 벽면에 쌓인 3.5미터 높이의 파편 퇴적구다. 9개의 층위를 가진 퇴적의 가장 아래층에서는 인화분청이, 바로 위에서는 귀얄분청이, 그리고 맨 위층에서는 백자가 출토되었다. 이는 고려청자가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발전하는 변화 과정뿐 아니라 인화분청에서 귀얄분청으로 변화, 발전했음도 알게 해준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상감청자에서 분청사기를 거쳐 초기 백자로의 변천 모습을 보여준 충효동 분청사
기 가마터를 비롯한 무등산 가마터 등은 문화 수도 광주의 자산이며 예향으로 불리는 광주 문화의 원형이다.

 

노성태
'다시 독립의 기억을 걷다', '광주의 기억을 걷다' 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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