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기억을 걷다] 광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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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천년 역사 고도, 광주

조선시대 교육의 산실, 광주향교

 

조선시대 학교로는 오늘날 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 중등학교에 해당하는 서울의 4부 학당 및 지방의 향교가 있었다. 태조 때 설립된 관학 최고 학부인 성균관과 4부 학당이 서울에 세워졌다면, 향교는 전국의 부, 목, 군, 현에 설립된 중등 학교였다.

최초의 향교는 고려시대 12목 등 군현에 박사·교수를 파견하여 생도를 교육시킨 향학(鄕學)에서 출발했다. 고려 인종 5년(1127), 여러 주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다는 기록을 보면 이때부터 향교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향교에 적극적인 유교 교육의 면모가 나타난 것은 조선 시대부터였다. 태조 이성계는 1읍 1교 원칙에 의거하여 향교를 세우도록 명을 내렸고, 태종은 학전(국가에서 내리는 땅)과 노비, 서적 등을 하사하고 지방관의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정책을 폈다.

광주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 처음 무등산 장원봉 아래에 세워졌다. 그러나 호랑이의 잦은 출몰로 성의 동문 안(지금의 대인동)으로 옮겨진다. 그런데 성안에 자리 잡았던 향교는 여러모로 불편했던 모양이다. 1879년 발간된 『광주읍지』에 의하면 “옛날의 향교가 성안에 있었는데 지대가 낮고 좁으며 건물이 기울고 헐어 자못 거처할 수가 없으므로 이에 밭을 사들이고 터를 정하여 읍의 서쪽 2리 되는 곳에 신축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읍의 서쪽 2리에 새로 터를 잡은 곳이 현재의 위치인 남구 구동 22-3번지인 광주공원 자락이다. 이때가 성종 19년(1488), 이를 이뤄낸 분이 당시 현감 권수평이었다.

광주향교 전경

향교를 세울 때 현감 권수평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땅을 사고 서적과 건축자재 등을 댄다. 이에 광주읍민들이 감동하여 너도나도 향교 짓는 일에 나선다. 광주향교가 몇 달 만에 완공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전소되고 만다. 1600년에 다시 세웠지만, 1841년 또 화재가 나서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불에 탄다. 이 해에 부임한 목사 조철영이 다시 짓고, 이후 여러 번의 수리와 재건축이 이루어져 오늘의 모습이 된다.

광주향교에는 어떤 건물이 있는지, 기능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향교에 들어가기 전,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하마비와 비각이다. 하마비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릴 위치를 표시한 비다. 공자님이 계신 곳이니 오만함을 버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지나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향교에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에 향교의 건립 및 이전, 건물들의 신축과 보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을 모아 관리하는 건물이 있다. 이 건물 이름이 비각이다. 비각 안의 중수비와 중건비 등은 향교의 소중한 역사다.

‘광주향교(光州鄕校)’란 이름표가 붙은 외삼문이 향교가 바깥세상과 통하는 문, 즉 출입구다. 외삼문에 들어서면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는 학교 공간이다. 학교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건물로는 교실에 해당하는 명륜당과 기숙사 격인 동재·서재, 과거 1차 합격자인 생원·진사들이 공부하는 문회재(사마재)가 있다. 이 중 대표 건물은 명륜당이다. ‘인륜을 밝히는 집’이란 뜻의 명륜당은 규모가 가장 큰 8칸 집으로 학생(교생)들을 모아놓고 ‘강’이란 문답식 수업을 했던 장소, 지금으로 말하면 교실인 셈
이다. 교생들이 기숙하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명륜당의 좌우에 위치한다. 동쪽에 있는 집이란 뜻의 동재는 양반의 자제들이 사용하는 기숙사였고, 서쪽에 있는 집이란 뜻을 지닌 서재는 평민 자제들이 사용하는 기숙사였다. 향교는 양인 이상이면 모두 입학할 수 있었지만, 거처하는 곳은 이처럼 신분에 따라 달랐다.

서재 뒤편 건물이 문회재다. 문회재는 학문을 하기 위해 모이는 집이라는 뜻인데, 사마재라고도 부른다. 과거 1차 합격생인 생원·진사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로, 지금의 대학에 해당한다. 선비를 양성하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양사재는 육영재라고도 부른다. 영재 40명을 선발하여 과거시험을 준비시키던 일종의 입시학원이었다.

내삼문을 통하면 바로 제향의 공간인 사당이 나온다. 따라서 내삼문은 학교와 사당을 구분하는 경계가 된다. 안쪽에 있는 세 칸의 문이란 뜻을 지닌 내삼문을 들어가는 법도가 따로 있다. 해가 뜨고 지는 자연법칙에 따라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와야 하며, 중문인 가운데 문은 제사 음식만 출입이 가능하다.

공자 등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제향 공간에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는데 중심 건물은 대성전이다. 공자님의 궁전이란 뜻의 대성전에는 중앙에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동쪽에 안자와 자사가, 서쪽에 증자와 맹자가 모셔져 있다. 이 외에도 공자의 열 제자와 설총, 최치원, 안향, 이황, 이이 등 우리나라 성현 18현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다. 지금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대제라는 제사를 드린다. 동무와 서무는 대성전에 비해 격이 낮은 건물로 동쪽과 서쪽의 행랑채라는 뜻이다. 1951년 이전까지는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1951년 성균관에서 “대성전에 중국의 유학자를 모시고 우리나라 유학자들은 격이 낮은 곳인 동무·서무에 모시는 것은 사대주의적인 발상이다.”라고 결의한다. 그렇게 해서 위패가 공자가 있는 대성전으로 옮겨진다. 천만번 잘한 결정이다.

 

오늘, 권수평 현감이 설립한 광주향교는 임진왜란과 몇 번의 화마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모습을 지키고 있다. 광주 문화의 원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광주향교에는 어딘지 모르게 외로움이 묻어 있다. 근대 교육에 밀려 학교 기능이 사라지면서 설립 목적 하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선현에 대한 제사와 전통혼례, 성인식, 유교 경전의 재해석 등을 통해 잃어버린 남도 문화의 현대적 부활은 가능할 수 없는지를 묻는다.

 

사립 중등 교육기관 서원

향교가 관학이라면 16세기 후반부터 사림들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한 또 다른 교육기관인 서원은 사학이다. 서원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존재하던 강학 장소인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지만, 서원은 강학은 물론이고 선현을 봉사하는 사당을 가지고 있는 점이 달랐다.

광주향교 현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이었다. 백운동서원은 명종 5년(1550) 퇴계 이황의 요구로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으며 사액서원이 된다. 서원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우수 교원이 부임하면서 향교보다는 서원으로 학생들이 몰리게 된다.

향교와 서원은 교육 기능과 선현에 대한 제사 및 지방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향교와 서원은 많은 차이가 있다. 설립 주체가 향교는 국가이고 서원은 개인이다. 향교는 도시 중심부에 위치했지만 서원은 경치 좋은 외곽에 위치했다. 향교 학생들이 제사지내는 멘토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성인과 한국의 18현으로 모두 똑같았지만, 서원은 모두 한국인이었고 서원마다 제사 지내는 대상이 달랐다. 향교의 교수진이 과거 급제자이거나 중앙 관리임에 반해 서원은 유명한 학자나 양반들이었다. 향교는 평민이나 양반 모두 입학 자격이 있었지만, 서원은 양반 자제만 입학이 가능했다.

조선 전기, 광주의 교육은 관학인 향교가 중심이었다. 그러다가 중기 이후가 되면 서원이 교육의 중심이 된다. 15~17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광주읍지』에 보면 광주 지방의 교육을 주도했던 학교로는 관학인 향교를 비롯, 사학인 월봉서원(1578)과 포충사(1601), 의열사(1604) 등이 있었다. 월봉서원은 기대승을, 포충사는 고경명을 그리고 의열사는 박광옥 등을 기리는 당대 최고의 사립학교였다.

 

노성태
'다시 독립의 기억을 걷다', '광주의 기억을 걷다' 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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