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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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정치적으로 악용되다
_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로마제국의 집정관

375년 유럽의 역사를 바꾼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게르만족이 동쪽의 훈족의 침입에 밀려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게르만족은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로마로 몰려들었다.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이후 사실상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어 있었다. 동로마는 아시아 나라들과 교역을 하며 경제적으로 번영했지만 서로마는 인구 감소와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동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아냈지만 서로마제국은 이미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아낼 힘을 상실하고 있었다. 476년 게르만족의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제국의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고대 시대가 막을 내렸다.

사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기원전 2세기 말에 유틀란트반도에 살던 게르만족의 일부가 로마를 침략해왔다. 로마의 마리우스 장군이 가까스로 침략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로마인들은 게르만족을 대단히 위험한 종족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58년에 갈리아의 지방장관이 되어 갈리아전쟁을 수행하면서 게르만족까지 소탕했지만 곧 암살당하고 로마의 내정이 혼란에 빠지면서 게르만족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후로도 로마제국은 게르만족 소탕 작전을 여러 차례 펼쳤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로마제국은 영토를 지키는 데 급급할 뿐이었다.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55?~117?)가 태어날 무렵 로마제국과 게르만족의 투쟁은 소강상태였다. 타키투스는 아버지가 재무관으로 근무하던 지금의 벨기에(혹은 북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네로 황제가 폐위되고 자살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혈통이 끊기자 장군들끼리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그래서 68~69년 사이에 황제가 네 번이나 바뀌었다. 이때 소년 타키투스는 최악의 공화정이 최선의 제정보다 낫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타키투스는 공직에 진출했다. 타키투스는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하여 재무관이 되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제위에 오른 뒤에는 그의 신임을 얻어 법무관이 되었고 작은 속주의 총독으로도 근무했다. 타키투스를 신임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의 귀족 다수를 제거하는 등 공포정치를 자행하다가 암살당했고 그 뒤를 이어 네르바가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네르바는 트라이야누스를 양자이자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후 로마에는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시기인 오현제(五賢帝: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 시대가 열렸다. 이때 타키투스는 네르바와 공동 집정관이 되었다. 그 뒤 타키투스는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여러 관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말년의 타키투스는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역사 서술로 여생을 마쳤다.

타키투스는 다섯 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게르마니아(Germania)》다. 게르마니아는 게르만족이 살고 있는 지역의 이름이다. 《게르마니아》는 게르만족의 기원과 주거지에 관한 일종의 전공 논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게르만족에는 오늘날의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스웨덴인, 네덜란드인, 영국의 앵글로색슨족이 포함된다.

 

도덕적 타락을 경계하다

《게르마니아》는 아주 짧은 글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200자 원고지 300장 정도밖에 되지 않는 분량이다. 구성도 단순하다. 총 46장 가운데 1~27장은 게르만족의 나라, 제도, 관습, 사생활 등을 다뤘고 28~46장은 각각의 게르만족 부족들에 대해 기술했다. 즉, 《게르마니아》는 게르만족의 민속지다.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에 대한 정보를 주로 게르만족에 관한 글과 북유럽을 오가는 상인들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인다. 타키투스에게 영향을 미친 책으로는 플리니우스의 전쟁사와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등이 있다.

그러면 타키투스는 왜 《게르마니아》를 지었을까? 타키투스가 직접 저술의 동기를 밝히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로마인들은 게르만족을 위협 세력으로 여겼기 때문에 게르만족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여 글을 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글의 내용이 게르만족에 대한 단순한 소개이기 때문에 게르만족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기 위해 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타키투스의 서술 의도는 당시 도덕적으로 타락하던 로마인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건전한 원시 부족의 생활 방식과 관습을 소개함으로써 로마인들의 경계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타키투스는 황제들의 절대 권력이 로마의 정치, 사회, 문화에 끼치는 영향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면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모두 타락하게 마련이다. 황제는 잔인해지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며, 신하들은 위선적이고 사리사욕만 꾀하게 된다. 지배자들이 타락하면 피지배자들 역시 타락한다. 로마의 시민들 역시 향락에 물들어 타락했다고 타키투스는 생각했다. 그래서 타키투스는 절대 권력에 따른 도덕적 타락을 경계하고 건전한 로마 제국의 부활을 꿈꿨다. 그래서 타키투스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경계를 삼기 위해 글을 썼다.

이제 타키투스가 소개하는 게르만족의 기원을 들어보자.

게르만족은 유일한 역사 기록인 옛날부터 전해오는 서사시에서 투이스토 신이 대지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서사시에 따르면 투이스토 신에게서 게르만족의 시조인 만누스가 태어났다. 만누스는 세 명을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들의 이름을 따서 대양에서 가장 가까이 사는 자들을 잉가이보네스족, 중앙에 사는 자들을 헤르미오네스족, 나머지를 이스타이보네스족이라 불렀다. …… 하지만 게르만이라는 이름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근래에 와서 사용되었다. 맨 먼저 레누스 강을 건너 갈리족을 내쫓은 지금의 퉁그리족을 게르만족이라고 불렀다. 종족이 아니라 부족의 이름으로 차츰 통용되었으니, 처음에는 갈리족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승승장구하던 퉁그리족만이 자신들을 게르만족이라고 불렀지만 나중에 이 이름이 통용되자 종족 전체가 스스로 자신들을 게르만족이라 불렀던 것이다.

게르만족의 신화는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신화의 내용과 유사하다. 특기할 만한 것은 게르만족이 다양한 종족을 아우르는 이름이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가장 강한 종족만을 게르만족이라고 하다가 점차 여러 종족들이 스스로를 게르만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게르만족은 다양한 혈통의 부족을 포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이 원주민이며 이주나 교류를 통해 이민족들과 거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타키투스의 이 주장은 훗날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다.

 

정치적으로 악용되다

15세기에 《게르마니아》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1455년에 원본이 발견되고 1470년에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게르마니아》 초판이 발행되었다. 3년 뒤에는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간행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무려 50쇄가 발행되었다.

《게르마니아》가 알려지면서 이 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게르마니아》 4장이 주로 정치적 이용의 대상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게르마니아 주민들은 다른 종족과 혼인으로 피가 섞이지 않았으며, 유례없이 순수한 특별한 종족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래서 그들은 인구가 많음에도 매섭게 쏘아보는 푸른 눈, 붉은 머리털, 순간적으로 힘쓸 때만 효과적인 큰 체구 등 모두 생김새가 비슷하다. 외모와 달리 그들에게는 힘들고 지속적인 노력을 견뎌낼 만한 참을성이 없으며, 갈증과 더위는 전혀 참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후와 토양 덕분에 추위와 굶주림에 익숙하다.

《게르마니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은 게르만족의 순수 혈통을 강조한다. 초기에는 순수 혈통을 내세워 게르만족은 갈리아와 달리 로마에 정복당한 적이 없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19세기 초 나폴레옹전쟁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고 독일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일어나면서 주장이 공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서 게르만족의 특질은 로마시대부터 변한 것이 없으므로 민족성을 견지하기 위해 프랑스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피히테는 게르만족이 생물학적으로 우수한 종족이라는 논리를 펼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독일에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자 사정이 달라졌다. 나치 정권의 이론가들은 게르만족의 혈통적 순수성, 자유에 대한 사랑, 도덕적 올바름, 충성심, 용기 등 타키투스가 제시한 여러 가지 자질을 부각시키면서 게르만족의 인종적 우수성을 내세웠다. 나치 정권은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유대인을 탄압하고 학살했다.

타키투스는 고대 로마인들의 도덕적 타락을 경계하기 위해 《게르마니아》를 썼다.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의 인종적 우수성이 아니라 순수한 도덕을 소개했다. 타키투스를 악용한 자들은 오히려 게르만족의 도덕심을 타락시켰을 뿐이다.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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