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쑨원, 《삼민주의(三民主義)》

0
71

 

두 개의 중국이 함께 추앙하다
_ 쑨원, 《삼민주의(三民主義)》

 

중국 혁명의 아버지

1949년 중국 대륙에는 마오쩌둥이 지도하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편, 한때 중국 전역을 지배했던 장제스(蔣介石)의 중국 국민당은 대륙에서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가서 ‘중화민국’을 수립했다. 이후 ‘두 개의 중국’은 서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다. 두 나라가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통치 이념은 서로 다르다. 따라서 그들의 정치체제와 경제 운영도 다르고 중국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 대한 평가에서 두 국가가 일치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쑨원에 대한 평가다. 두 국가에서 모두 쑨원을 ‘중국 혁명의 아버지’ 혹은 ‘위대한 혁명가’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현재 두 개의 중국은 이념의 차이를 초월하여 쑨원을 존경하고 추앙하고 있다.

쑨원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쑨원은 중국에서 혁명의 횃불을 최초로 든 사람이다. 동시에 쑨원의 삶은 중국 혁명의 역사, 바로 그것이었다. 쑨원은 1866년 광둥 성 샹산 현(지금은 ‘중산 현’이라고 한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태평천국군에 참가한 친척의 영향으로 혁명 정신을 키웠다. 열세 살 때 하와이로 가서 교육을 받았고 의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에는 홍콩에 병원을 개업하려 했지만 허가를 받지 못하고 한의원을 개업했다. 그러나 의사 생활은 생활의 방편일 뿐, 쑨원은 오로지 중국 혁명을 생각했다. 1911년에 중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났다. 쑨원은 여기에 적극 가담하여 무장 봉기를 준비하고 확대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마침내 1912년 1월 1일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1912년 2월 12일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퇴위함으로써 진나라 시황제 이후 2000년 넘게 유지되어온 중국의 군주제는 무너졌다.

그러나 혁명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중국은 각 지방에서 군대를 장악한 장군, ‘군벌’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쑨원은 다시 군벌과 싸움에 들어갔다. 군벌과 싸우기 위해 자신이 만든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연합을 추진하여 1924년에 이른바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국공합작을 바탕으로 군벌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바야흐로 그동안 꿈꾸어왔던 혁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쑨원에게도 운명의 순간이 멀지 않았다. 1925년 3월 12일 59세의 혁명가 쑨원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쑨원은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국민 혁명에 힘을 바치기 무릇 40년. 그 목적은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찾는 데 있었다. 40년의 경험을 통해 혁명의 목적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민중을 일깨우고, 세계에서 평등하게 우리를 대하는 민족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혁명은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 동지들은 마땅히 계속 노력하여 혁명을 완성시켜야 한다.

 

나는 혁명학을 공부한다

《삼민주의》는 쑨원이 1924년 1월 27일부터 몇 차례에 걸쳐 강연한 내용을 몇 사람이 받아 적어서 책으로 낸 것이다. 삼민주의란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에서 ‘민’을 따서 붙인 이름으로 1905년 일본에서 ‘중국동맹회’가 결성되었을 때부터 쑨원이 내건 강령이었다. 쑨원은 결코 학자가 아니었다. 중국혁명에 참여하면서 틈틈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일찍이 쑨원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연구하는 것은 혁명학이다. 나의 혁명 지식이나 능력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어떤 학문도 나의 연구 재료가 될 수 있으며, 나의 혁명학을 형성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

쑨원이 주장한 모든 사상은 ‘혁명학’이다. 외국 열강의 지배를 받는 중국, 낡은 군주제와 군벌들의 통치 하에 고통받고 있는 중국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내놓은 ‘해답’이었다. 《삼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삼민주의’는 한마디로 ‘중국혁명을 지도하는 정치사상’이다. 쑨원은 이 책에서 중국이 궁극적으로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할는지, 중국의 정치는 어떤 원리와 원칙에 근거해야 하는지 등을 제시했다.

그러면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쑨원의 민족주의는 시기에 따라 내용이 달랐다. 1894년부터 1905년 ‘동맹회’가 성립할 때까지 쑨원이 주장한 민족주의는 ‘만주족의 청나라 조정을 타도하자’는 것이었다. 이 민족주의는 만주족이 한족을 지배하는 상황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때 민족주의의 중심 주체는 한족일 수밖에 없다. 1919년 이후 민족주의의 내용은 바뀐다. 만주족의 청나라 조정을 타도하자는 민족주의는 이미 1911년 신해혁명으로 달성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쑨원은 “중국에서 민족주의는 완성되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국제적인 협력을 얻으려던 소망이 빗나가면서 민족주의의 내용이 바뀌게 되었다. 즉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여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달성하자’는 것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중국 내부에 있는 여러 민족이 평등하고 조화롭게 살아가자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중국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이 문제도 심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내용의 민족주의는 1924년 그가 행한 연설에 등장한다.

다음으로 민권주의란 무엇인가? 민권주의는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용어로 표현하면 민주주의다. 그런데 쑨원이 주장한 민권주의는 좀 독특하다. 쑨원은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쑨원이 바라보는 평등은 ‘인간의 원초적인 불평등’을 인정한 평등이었다. 쑨원이 보기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능력이나 소질에서 불평등하고, 이런 불평등은 없앨 수 없다. 대신 필요한 것은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다. 그래서 쑨원이 강조한 것이 교육이었다. 교육은 사람들의 차이를 줄여주고 모두가 잘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또 쑨원은 자유를 주장했지만 개인적인 자유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쑨원은 자유가 일반인의 몫이지,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할 군인과 관료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민권주의와 관련하여 쑨원이 주장한 특이한 점은 ‘치권(통치권)’과 ‘정권(주권)’을 나눈 것이다. 여기서 치권은 행정부나 대통령 등이 가지고 있는 통치권, 행정권이고, 정권이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주권이다. 쑨원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쑨원이 보기에 현대 국가는 점점 커지고 할 일이 많아졌다. 따라서 행정을 힘 있고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통치권이 절대적으로 강화되어야 한다. 특히 혁명을 수행하는 중국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국가권력의 증대는 국민들의 기본권, 더 나아가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원리인 국민주권과 충돌할 수가 있다. 이 때문에 쑨원은 통치권과 주권을 나누었다. 통치권은 국가원수인 대총통이 갖는다. 국민은 이 통치권에 대해 간섭할 수 없다. 대신 국민은 주권을 갖는다. 그리고 국민의 주권은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토지와 자본의 해법을 제시하다

마지막으로 민생주의란 무엇인가? 쑨원은 “민생주의는 사회주의이며 공산주의이며 대동주의”라고 말했다. 이 말로만 보면 쑨원은 사회주의자인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쑨원이 생각하는 사회주의란 ‘공상적 사회주의’다. 그리고 쑨원은 공산주의가 현실적으로 실행될 수 없다고 보았다. 쑨원이 주장한 민생주의는 국가가 주도하여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사전에 없애자는 것이다. 지금의 용어로 표현하면 ‘복지국가’라고 할 수 있다.

쑨원은 당면 과제가 공업화를 통해 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 역사 발전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계급투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급 간의 상호 의존과 협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쑨원은 토지와 자본 집중의 억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당시 중국에는 토지 문제가 심각했다. 전체 인구 가운데 얼마 되지 않는 지주들이 전국 땅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쑨원이 제시한 해법은 ‘토지 소유의 균등화’였다. 토지 소유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토지의 가격을 성실하게 신고한다. 만약 토지 가격을 낮게 신고하면 국가가 그 토지를 매입할 수 있다. 그리고 토지 개발로 땅값이 올라 지주가 이득을 보면 국가는 그만큼의 세금을 걷어간다. 이렇게 되면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어봤자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토지를 팔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러면 국가가 그 토지를 사들인다. 이렇게 서서히 토지를 국가 소유로 만들자는 것이 토지 문제에 대한 쑨원의 해법이었다. 이 제도는 1949년 이후 타이완에서 실시되고 있다.

반면 자본 집중은 당시 중국에서 시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쑨원 역시 중국의 당면 과제로 공업화를 제시했다. 그런데 굳이 자본 집중의 억제를 다룬 이유는 서구 사회의 문제점을 보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거대한 독점자본이 등장하여 국가 산업을 장악하면서 많은 문제가 생겨났다. 예를 들면 빈부 격차의 확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대립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쑨원은 공업화를 진행하고 있는 중국에서도 사전에 독점자본을 막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 대안이 바로 ‘자본의 규제(절제자본)’였다. 이 제도 역시 1949년 이후 타이완 정부에 의해 채택되었다.

《삼민주의》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점도 많은 책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 중에는 현재에도 유효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민생주의의 ‘토지 소유의 균등화’ 제도나 ‘자본의 억제’ 제도 같은 것들이 그렇다.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