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 빠진 아이를 보면 왜 구하고 싶어지는가?
_ 맹자 《맹자(孟子)》
흐르는 물은 구덩이를 채워야 흐른다
맹자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어머니의 지극한 교육열에 힘입어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런데 공부를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어머니가 보고 싶어 집으로 돌아왔다. 어떻게든 아들을 공부시켜 인재를 만들고자 했던 어머니의 소망이 무너지려는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물었다. “공부는 마쳤느냐?” 맹자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왔습니다.” 어머니는 즉시 칼을 들어 짜고 있던 베의 날실을 끊어버렸다. 맹자가 놀라 물었다. “어머니, 왜 그러십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네가 공부를 그만둔 것은 내가 오랫동안 고생해서 짜던 베를 자르는 것과 같다.” 맹자는 그 길로 되돌아가 학문에 전념했다.
중국 전한(前漢) 시대 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에 나온 이야기다.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 단호했고 헌신적이었다.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역시 어머니의 지극한 교육열을 보여주는 격언이다. 어머니의 정성과 자신의 노력이 결합하여 맹자(孟子, BC 372?~BC 289?)는 큰 학자가 되었다. 맹자는 공자 다음으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맹자는 매우 심한 좌절을 겪기도 했다. 세상을 다니며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맹자는 꺾이지 않았다. 맹자는 어려움을 긍정했다. 어려움은 새로움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이겨낸 자만이 새로운 단계, 새로운 세상에 진입할 수 있다. 맹자는 어떻게 어려움을 이겨냈을까? 맹자의 삶과 사상은 용기의 표본이었다. 《맹자》는 그러한 맹자의 삶과 사상을 전해주는 소중한 책이다.
세상을 바꾸는 의지, 용기
맹자는 항상 생존을 걱정해야 했던 시대에 살았다. 맹자는 그 시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나뒹군다.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다. 풍년에도 내내 고생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신하로서 자기 임금을 시해하는 자가 있고, 자식으로서 자기 아비를 시해하는 자가 있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사회를 바꾸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했다. 그러나 맹자는 위험을 감수했다. 맹자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을 경멸했다. 맹자의 용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용기와 다르다. 맹자의 용기는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당당함이다. 내가 당당하면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용기는 당당함에서 온다.
제자인 공손추(公孫丑)가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잘하십니까?” 맹자가 답했다. “나는 남의 말을 잘 이해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하늘의 도(道)와 정의에 뿌리를 둔 공명정대한 기운이다. 호연지기를 기르면 아무 거칠 것이 없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 이 기운 역시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키워나가는 것이다. 호연지기가 길러져야 사람은 당당해진다.
당당하게! 당당하게!
맹자는 비굴하게 부귀와 지위를 구걸하지 않고, 어떤 시련에도 자신의 뜻을 펼쳤다. 맹자는 왕 앞에서도 당당했고 떳떳했다. 제(齊)나라 선왕(宣王)과 나눈 대화를 보자. 선왕이 물었다. “탕왕(湯王)이 걸왕(桀王)을 가두고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쳤다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걸과 주는 중국의 대표적인 폭군이다. 걸과 주의 학정이 심해지자 그들의 부하였던 탕과 무가 그들을 몰아냈다. 맹자가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심드렁한 답변이다.
맹자는 선왕이 질문하는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선왕이 다시 물었다. “신하가 자기 임금을 죽이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이것이 선왕의 의도다. 아무리 폭군이라도 어찌 신하가 임금을 몰아낼 수 있느냐. 이에 맹자가 대답했다. “인(仁)과 의(義)를 해치는 자를 도둑놈이라고 합니다. 도둑놈은 일개 사내에 불과합니다. 저는 사내를 잡아 죽였다는 얘기는 들어보았지만 임금을 죽였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걸과 주는 인과 의를 해쳤기 때문에 임금이 아니라는 말이다. 심지어 맹자는 “임금이 잘못하면 간언을 하고, 여러 차례 간언을 해도 듣지 않으면 그 임금을 바꾸라”고까지 했다. 임금 앞에서 감히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그다음이 나라이며 임금은 가장 가벼운 존재라고 했다. 따라서 백성을 잃으면 임금의 자격이 없다. 민심을 잃은 걸과 주는 임금이 아니라 도둑놈일 뿐이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려면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모아주고,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했다. 이것이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다.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하리라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문제는 선택의 기준이다. 그런데 만약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선택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택할까? 맹자는 무엇을 택했을까? 그 시작은 물고기와 곰발바닥이다. “물고기는 내가 바라는 바다. 곰발바닥도 내가 바라는 바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하리라. 사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요, 의 또한 내가 바라는 바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함께 얻을 수 없기에 사는 것을 버리고 의를 취하리라. 사는 것보다 더 깊이 바라는 바가 있기에 구차히 삶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죽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바이지만 죽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기에 환난(患難)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바라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다면 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쓰지 않으랴? 또 사람의 싫어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다면 환난을 피하기 위해 무엇인들 하지 않으랴? 그렇지만 그 방법을 따르면 살 수 있는데도 그것을 하지 않음이 있고 그 방법을 따르면 환난을 피할 수 있음에도 그것을 하지 않음이 있다. 사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있을 수 있고 죽음보다 더 절실하게 싫어하는 것이 있다.……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물을 얻으면 살고 얻지 못하면 죽는다. 그러나 혀를 차고 꾸짖으면서 주면 길가는 사람도 받지 않으며, 발로 차면서 주면 걸인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맹자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기에 맹자는 삶 대신 의를 택한다. 죽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기에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그 선택은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김이다. 스스로가 존귀하기에 맹자는 스스로의 가치를 버리려 하지 않는다.
‘우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용기는 위대한 사람들만의 것일까? 맹자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맹자의 가장 큰 믿음은 너와 내가 모두 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맹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존귀하다. 너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도 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 이론적 바탕이 성선설이다. ‘성선설’은 ‘인간의 본성은 원래 착하다’는 학설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증거로 ‘우물에 빠진 아이’를 예로 든다.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힐끗 보기만 해도 모두들 겁을 내고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그것은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친교를 맺기 위해서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과 벗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 아이가 지르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도 아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본 순간 누구든지 순수한 마음이 생긴다. 바로 이런 마음 때문에 사람들은 아이를 구하려고 한다.
맹자는 사람들에게 네 가지 순수한 마음이 있다고 한다. “측은해하는 마음은 인(仁)의 실마리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실마리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실마리이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知)의 실마리다. 사람이 네 가지 실마리를 지니고 있는 것은 그들이 팔다리를 가진 것과 같다.” 이것이 맹자가 말한 ‘사단(四端)’, 즉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네 가지 마음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실제로는 모두 착하지 않을까? 맹자는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우산(牛山)의 나무는 아름다웠다. 그런데 우산은 큰 나라의 교외에 있기 때문에 도끼로 그 나무들을 찍어 냈으니 아름다워질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자라고, 비와 이슬의 윤택함을 받아 싹이 돋는 일이 없지 않았지만 소와 양을 끌어다 자라는 족족 먹이곤 했다. 그래서 저렇게 밋밋한 산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밋밋한 것을 보고 거기에는 재목이 있어본 일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는가? 사람에 들어 있는 본성이 인의를 따르는 마음이 없겠는가? 본래의 마음을 베어버리는 일은 도끼로 나무를 다루는 것과 같다. 매일매일 찍어내는데 어찌 아름다워지겠는가?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악해진 이유는 도끼로 산의 나무를 찍어버리듯 사람들 스스로가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인간 본성을 찾으려 한다면 모두는 다시 착하게 될 수 있다. 맹자의 용기, 기상은 본래 선한 것을 잘 기른 결과다.
맹자의 관심은 바른 정치에 있다. 어떻게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가? 맹자는 제나라 선왕의 일화를 소개한다. 제나라 선왕이 제사의 희생물로 끌려가는 소가 벌벌 떠는 모습을 보았다. 선왕은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소가 끌려가는 걸 차마 보지 못하겠구나.” 그리고 소를 놓아주라고 했다. 이 일화를 들은 맹자가 말했다. “차마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으니 차마 그냥 못 본 척할 수 없는 정치가 있다. 차마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그냥 못 본 척할 수 없는 정치를 하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에서 움직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백성의 처지를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 못 본 척하지 않는 정치, 이것이 맹자가 주장한 왕도정치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