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파괴하는 은유: 성적 상대자는 물건(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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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파괴하는 은유: [성적 상대자는 물건(음식)]

나익주(한겨레말글연구소)

 

“일본군은 14~20세의 약 20만 명의 여성을 위안소에서 일 시키기 위해 강제로 모집해 징용했다.······ 도망치려 했다가 살해된 ‘위안부’(각주 1)도 있었다.······ 일본군은 위안부’를 천황의 선물 군대에 바쳤다.”(각주 2)

윗글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와 인근의 공립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세계사 교과서에 실린 일본군 ‘위안부’를 기술하는 내용의 일부이다. 일본 외무성은 2015년 8월 이 교과서를 간행한 출판사 맥그로힐(McGraw-Hill Inc.)에 이 내용이 허위라며 수정을 요구했다. 일본군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중국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11군 제14병참병원 육군 군의 소위 아소 데스오(麻生徹男)가 일본군의 성병 예방을 위해 상해의 일본군 주둔지역에 끌려온 100명의 여성―그중 80명은 조선 여성―에 대한 성병검진결과를 보고하면서 직접 작성한 보고서 <화류병의 적극적 예방법>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위안부’들은) 천황의 군대 장병에게 주는 선물이다.······ (위안소는) 위생적인 공동변소이므로······ 술을 마시고 들어가서는 아니 된다.”(각주 3)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는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에서 발굴한 일본군 포로 심문 보고서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다음 내용은 미군이 버마(현 미얀마)에서 일본군 포로 류 이츠시에 대한 심문 내용의 일부이다.

“(버마의)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는 모두 조선인이다.······ 이들이 전투지대에 보내졌다면 성에 굶주린 일본군에 의해 다 죽었을 것이다.”(각주 4)

이 글에서 나는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 어떤 주장을 펼치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관심은 일본 병사들에게 끝없는 성폭행 피해를 당한 이 피해 여성들에 대해 일본군 지휘관 아소 데스오(麻生徹男)가 지니고 있던 인식이다. 군의장교 데스오 소위는 이 여성들을 천황이 자신을 비롯한 병사들에게 주는 선물(皇軍將兵へノ贈り物)이라 묘사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이 성폭행 피해 여성들을 어떤 종류의 선물로 인식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포로인 류 이츠시가 미군의 심문을 받으면서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동사 ‘굶주리다’의 중심적인 의미는 원래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곯다”를 지시한다. 하지만 ‘성에 굶주린 일본군’이라는 표현에서 류 이츠시는 “오랫동안 성관계를 갖지 못하거나 이성과의 접촉을 갖지 못하다”라는 속된 의미로 이 동사를 사용하여, 성적 욕망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를 장기간의 굶주림에 비유했다. 그의 인식에서 ‘위안부’로 끌려온 여성은 자신을 비롯한 군인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음식에 불과했으며, 장병들의 성적 욕망은 굶주림을 해소하고픈 욕망에 대응했다. 또한 병사들이 성욕의 충족을 위해 성관계의 대상을 찾아 성관계를 하는 것은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음식물을 구하여 섭취하는 것에 해당했다.

군의장교 데스오의 인식도 포로인 류 이츠시의 인식과 다르지 않으며, 데스오가 사용한 표현 ‘천황이 황군장병에게 주는 선물’은 바로 성적 상대자를 식욕을 돋우는 음식으로 보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천박한 인식에서는 당연히 이 피해 여성들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나 공감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나올 수 없다. 지휘관인 장교의 인식이 이러할진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신들의 동물적인 성욕 충족을 위한 성폭행의 피해자였던 이 여성들을 ‘야계(野鷄)’라 부르며 비하한 일본군 장병들의 비인간적인 언행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자신들이 성폭행을 가했던 여인들이 그들에게는 마치 들판에서 잡아와 요리한 닭고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절망스런 현실에서 절규하던 이 여인들의 고통이 절절이 다가오며 가해자 집단인 일본군의 비인간성에 치미는 분노를 어찌할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을 주라는 것인지?

성적 상대자로서의 여성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물건―특히 음식물―로 인식하는 천박한 은유적 사고는 침략 전쟁을 벌였던 1940년대 초반의 비인간적인 일본군만이 지닌 태도가 아니다. 이러한 인식은 21세기 현재 한국사회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도층 인사들이 했던 발언에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그러한 발언의 한 사례이다.

“(여자)아나운서로 성공하려면 모든 것을 다 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느냐”

이 표현은 몇 년 전 어떤 국회의원이 대학생들과의 술자리에서 아나운서를 꿈꾸는 한 여학생에게 한 발언이다. 성희롱 논란을 야기한 이 발언으로 이 정치인은 소속 정당으로부터 제명을 당하고 여성아나운서를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기소를 당했다. 일본군 군의장교 가스오의 발언과 마찬가지로 이 발언도 역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물건으로 인식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물론 군의장교 가스오의 발언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아무런 결정권도 갖지 못하며 천황이 장병에게 특별히 주는 선물이지만, 이 발언은 여성아나운서가 자신의 ‘무언가’―아마도 ‘몸’―를 누군가(?)에게 줄지 말지를 선택하는 결정권자라는 것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람이 과일인가 따먹게, 아니면 횟감인가 자연산이게?

성적인 맥락에서, 한국인들은 여성을 어떤 종류의 물건에 비유하는가? 성적 상대자로서의 여성을 식욕을 돋우는 음식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한국인들의 사고체계 속에도 들어 있다. 이것은 2011년 어떤 도지사가 어떤 공적인 강연에서 한 다음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다’와 ‘먹다’의 결합에서 나온 ‘따먹다’(따서 먹다>따 먹다>따먹다)의 중심적 의미는 행위자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어떤 과일에 힘을 가한 결과로 자신의 손에 넣은 그 과일을 소화기관을 통해 섭취하는 과정”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 도지사의 발언에서 ‘따먹다’는 은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변 사또가 권력을 이용해 춘향을 성폭행하려 하는 사건”을 지시한다. 그 결과 춘향은 변 사또의 식욕을 돋우는 음식에 해당하고 변 사또의 성폭행은 음식 먹기에 대응된다. 이러한 인식에서 발현된 이 발언 때문에, 이 도지사는 한국인들에게 고매한 정절의 표상이라 각인된 여인 ‘춘향’을 저급하게 비하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춘향전이 뭡니까. 변 사또가 춘향이 따먹으려는 거 아닙니까?······ (변 사또가) 재산 뺏어가고 부패만 저지르는 게 아니라 처녀 몸, 생사여탈을 제 맘대로 하는 썩어빠지고 형편없는 이런 관리들에 의해 이 나라 백성이 수 천 년 간 피해를 보고 살아왔는데 이 시대 공무원들은 얼마나 잘 합니까?”

한국인들은 여성을 과일에만 비유하는 것이 아니다. 2010년 당시 집권당의 대표였던 한 국회의원은 성형을 하지 않은 여성을 생선회에 비유하는 성희롱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아래 참조). 물론 이러한 비유는 이 정치인만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이나 광고와 같은 특수한 맥락에서는 ‘가장 물 좋은 성인나이트클럽’이나 ‘돈을 미끼로 여성을 낚다’와 같은 표현을 별다른 의식 없이 사용하며, 이러한 표현이 은유적인지조차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은유가 한국 문화에서 생겨난 사고체계의 일부라 하더라도 이 은유를 사용하는 데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정치인이 특히 비난을 받았던 이유는, 이 ‘자연산’ 발언이 비록 개념적 은유 [성적 상대자는 식욕을 돋우는 음식]의 발현임에는 틀림없지만 상당한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나올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그룹(=티아라)이 유명한가?······ 연예인 1명에게 성형비용이 1년에 2~3억원이 든다.······ 요즘은 룸(살롱)에 가도 오히려 자연산만 찾는다고 하더라.”

남성이 성적 상대자를 음식에 비유하는 은유에서 발현되는 언어 표현이 훨씬 더 많이 존재하지만, 남성 상대자가 음식물로 간주되는 은유적 이해 방식이 한국어에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 후보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한 여성기업인이 농담으로 했던 다음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영계’의 지시적 의미는 “병아리보다 조금 더 자란 닭”을 가리키지만, 흔히 성적인 함축을 지닌 것으로 해석되어 성희롱 논란을 야기하는 이 표현은 젊은 남성을 흔히 백숙으로 요리되는 어린 닭에 비유하는 사고방식―[성적 상대자는 닭요리]―의 발현이다.

“내가 영계를 좋아하니 가까이 와서 사진을 찍자.”

 

[성적 상대자는 음식] 은유의 발현은 완전히 통제 불가능한가?

인지언어학자들이 주창하는 ‘신체화된 인지’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은 신체화된 경험으로부터 발생하고 사고는 대부분 은유적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의 인지는 거의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 세계의 어느 곳에 살든지 우리 인간은 현재와 같은 신체를 지닌 존재로서 상당히 많은 경험을 공유할 수밖에 없고 우리의 사고는 문화 속에서 형성된 이 신체적 경험의 제약을 받는다. 이 이론으로부터 우리는 성과 관련해서 한국인과 일본인, 미국인의 경험이 상당히 유사한 측면이 있고 성적 경험의 측면이 성에 대한 은유적 사고를 형성하며 이 은유적 사고는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 추론이 완전히 엉터리가 아니라는 것은 영어 화자들과 한국어 화자들, 중국어 화자들이 성적 사용자를 음식에 비유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음 표현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He is sex-starved. (그는 성에 굶주려 있다.)
I hunger for your touch. (나는 네 애무에 굶주려 있다.)
You have a remarkable sexual appetite. (너의 성적 식욕은 놀랍다.)
I thirst for your kisses. (나는 네 키스에 목마르다.)

‘여성클리닉 전문의가 쓴 맛있는 섹스 레슨’
맛있는 섹스를 찾은 사람들: 박혜성 박사의 맛있는 부부이야기
육감적(肉感的)인 여인의 유혹
성에 목마른 광기의 여자

性飢渴 (채워지지 않은 성욕)
吃豆腐 (두부를 먹다 => 성희롱하다)
吃禁果 (금과를 훔쳐 먹다 => 남자와 여자가 남몰래 성관계를 가지다)
男主人公在钓女人方面都有非凡的魅力 (남주인공은 여자를 낚는 비범한 능력이 있다)

인간의 사고가 은유적 개념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면, [성적 상대자는 음식] 은유에서 발현되는 언어 표현을 사용해도 정당하다는 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인지적 무의식’은 은유적 사고가 뇌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자세하게 접근할 수 없을 정도 빠르게 인지적 의식 아래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인지적 무의식’은 어떤 은유적 개념을 사용할 때 의식적인 인식의 층위에서 작용하는 수많은 과정을 하나하나 다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은유의 사용을 절대로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며, 조금만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면 자신이 사용하는 은유가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다른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는 은유를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은 ‘인지적 무의식’의 이름으로 용인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을 은유적으로 음식으로 개념화하는 방식―즉 [성적 상대자는 음식]―에서 발현되는 언어 표현을 사용하여 성희롱 논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사용했다―즉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다―고 말하는 변명은 통할 수가 없다. 문제의 당사자들이 그렇게 변명하는 경우는 없었고 대개는 친근감을 표시하기 위한 농담이었다는 식으로 해명했다. 그들이 자신들이 사람을 성적인 관점에서 생명 없는 물건으로 대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조금만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면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성적 상대자는 음식] 은유는 왜 위험한가?

이 개념적 은유―즉 [성적 상대자는 음식]―에서 발현되는 언어적 표현들은 한국인들이 일상의 대화에서, 문학 작품에서, 광고에서, 영화의 대사에서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비록 이 은유가 우리의 개념 체계 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이 은유를 아예 사용하지 않거나 최대한 절제해야 한다. 특히 정책의 입안이나 제도의 시행을 결정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엄청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행사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이 개념적 은유에서 발현되는 언어 표현을 세심한 주의 없이 사용하는 것은 성희롱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 수치심과 모욕감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생명을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은유의 비인간적인 파괴력은 바로 ‘위안부’ 제도에서 실증된다. 이 제도를 도입하고 실행할 영향력을 지닌 일본제국주의 통치자들과 군 지휘관들의 머릿속에서 활성화되었던 은유는 바로 [여성은 물건]―더 구체적으로는 [여성은 식욕을 돋우는 음식]―이었다. 이 은유로 인해, 그들은 잔인한 인권 침해로 인한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위안부’는 인간이 아니라 다 쓰면 버려도 되는 물건―특히 음식―이고 병에 걸리거나 부상당한 ‘위안부’는 그냥 부패한 음식물이었기 때문이다.

2015년 말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창조적 대안을 이끌어냈다고 발표한 합의문을 듣고 실소가 나왔다. 이 합의문 어디에도 국가가 자행한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범죄에 대해 일본 정부의 법적인 책임을 묻는 내용도, 일본 정부가 이 사실을 인정한다는 내용도 없었다. 우리 정부의 관계자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진정으로 감정이입을 했을까, 설마 ‘위안부’ 피해자들을 처리하기 어려운 ‘물건’으로 보지는 않았겠지, ‘‘위안부’ 피해자 재단’에 일본 정부가 내기로 했다는 약 100억 원의 기금을 ‘어떤 이름의, 어떤 성격의 돈’이라고 생각하고 덜컥 합의했을까 등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한 마디로 ‘[위안부는 물건] 은유가 작용하지 않았을까?’라는 우려였다. 이 우려가 그냥 발칙한 나의 상상이었으리라 믿는다.

적게는 3만 명에서 많게는 22만 명에 이른다는 여인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절망, 죽음을 초래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기저에 깔려 있는 은유―[성적 대상자는 물건(음식)]―를 한국인들이 별다른 의식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이 사실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은유적 사고가 현재 우리 사회에 고착화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닌지.

*이 글은 ‘말과 글’ 2017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

 


  1. ‘위안부’는 일본의 관점을 반영하고 성폭행을 자행한 일본 장병들이 무언가 위안을 받아야 할 정도로 고난에 찬 책임을 수행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동원되어 일본군의 성노예로 이용된 피해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타당하지 않다. 1990년대 일본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종군‘위안부’’도 역시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를 동원했던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타당한 용어로 볼 수 없다. 국가(일본)의 제도에 의한 성폭행 피해자들의 관점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용어는 유엔인권위원회가 사용하는 ‘(전시) 군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이다. ‘위안부’는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용어이지만 한국 문화의 특수성으로 인해 생존 피해자들이 ‘성노예’라는 용어로부터 정신적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작은따옴표를 붙여 일본군 ‘위안부’라 쓴다.
  2. 출처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113010006271 아시아투데이 2015.1.13.
  3. 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5605&rccode=lvRc 이동석. 「종군위안부 1992: 두 일본인을 만나다④」. 프레시안.
  4. 출처 http://news.kbs.co.kr/news/view.do?ref=A&ncd=3027668

 

나익주
낮에는 영어 교사, 밤에는 언어학자로 살아온 두 얼굴의 사나이. ‘동고송’의 전신인 '고전을 공부하는 교사모임'의 창립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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