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박은식, 《한국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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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이 있으면 국백(國魄)은 회복된다
_ 박은식, 《한국통사》

 

나이 마흔에 개화 독립파가 되다

공자는 나이 사십에 ‘불혹(不惑)’했다고 했다. 나이 사십이 되면 학문과 경륜에서 흔들림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달랐다. 박은식은 사십의 나이에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자 자신이 가졌던 사상을 전환하여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40세 이후에 세계의 학설이 수입되고 언론 자유의 시기를 만나서 나도 하나의 학설에 파묻혀 굳어 있었던 것을 알았다. 적이 변동함으로 우리 선배들이 금지했던 노자와 장자의 사상, 양자와 묵자의 사상, 신불해와 한비자의 학설은 물론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꿰뚫게 되었다. 지금은 과학의 실용이 인류에게 요구되는 시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은식, <학(學)의 진리는 의(疑)로서 쫓아 구(求)하라> 중에서

박은식은 명망 있는 성리학자였다. 성리학에서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 양자와 묵자의 사상, 신불해와 한비자의 사상,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모두 이단이라 하여 금지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특히 적이 변함에 따라 이들 사상에 대해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박은식은 의(疑), 즉 알고 있는 진리를 의심하여 학문의 진리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래서 동양의 학설은 물론 인류의 요구가 과학의 실용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린 자세로 박은식은 철저한 독립운동가요, 민족의 아픔을 담아내는 역사가의 삶을 살았다.

박은식은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박은식은 조선시대 말기의 유학자인 이항로의 문하생인 박문일, 박문오 형제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박은식은 자신의 방에 주자(朱子)의 초상을 갖다놓고 매일 아침 절을 올릴 정도로 주자의 학문, 즉 성리학에 몰두했다. 스물세 살 때에는 정약용의 실학사상을 섭렵하여 그 내용을 성리학의 체계 내로 편입했다. 그래서 박은식은 서도(西道, 황해도와 평안도를 지칭함) 제일의 유학자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

1876년 개항 이후 외세의 침입이 노골화되던 시기에 박은식은 위정척사파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자 했다. 박은식의 할아버지 스승이 되는 이항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위정척사파였다. 박은식은 시대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의 정신을 올바르게 세워 이단의 학설을 배격하고 오랑캐로부터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은식은 서른여섯 살 때(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을 경험하게 되었다. 박은식은 동학농민운동을 동학비적들의 반란, 갑오개혁을 이단적 학설에 따른 정책이라고 배척했다. 이 무렵 박은식은 한양에 거주하다가 두 사건에 크게 실망하여 강원도 원주로 이사했다. 세상과 담을 쌓기 위해서였다. 마흔 살 때인 1898년에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 내각이 무너지자 박은식은 다시 한양으로 올라왔다. 위정척사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은식은 한양에서 독립협회 운동을 접하면서 커다란 충격을 경험했다.

박은식은 자신이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동안 세계 각국의 사상들이 우리나라로 쏟아져 들어왔고,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박은식은 새롭게 접한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사상적 기반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 ‘학문의 진리는 의심으로 추구하라!’ 박은식은 자신의 과거 사상을 비판적으로 분석, 검토했다. 그래서 개화 독립파로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바꿨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다

박은식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서 신채호 등과 함께 애국계몽 논설을 발표했다. 그리고 국민에게 세계정세와 신지식을 가르치는 신교육의 보급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 설립을 지원하면서 한성사범학교의 교사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1910년에 일본이 조선을 강제 합병하자 박은식은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5년에 상하이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박은식은 중국에 망명하면서부터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쓰기 시작했다. ‘나라는 없어질 수도 있지만 역사는 없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역사를 기록해두고자 했던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했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라도 오롯이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를 저술하는 이유다. 정신이 없어지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책은 갑자년(1864년) 이후 50년사에 불과할 뿐이니, 어찌 우리 4000년 역사 전부의 정신을 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 민족이 우리의 조상을 잊지 않는 데 있을 것이다. …… 오늘날 우리 민족은 우리 조상의 피로써 뼈와 살로 삼고 우리 조상의 혼으로써 영혼을 삼고 있다. 우리 조상은 신성한 가르침을 갖고 있고, 신성한 정치와 도리를 가졌으며, 신성한 학문과 무공(武功)을 가졌으니, 우리 민족이 어찌 다른 것에서 구해야 옳겠는가.

《한국통사》는 1915년에 완성되어 발간되었다.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고종이 즉위한 해인 1863년부터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쇠퇴하여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박은식은 이 시기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통사(痛史)’, 즉 비통한 역사라고 제목을 달았던 것이다.

《한국통사》는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은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에는 지리를, 2장에는 단군신화에서부터 고종의 즉위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기록했다.

2편은 모두 51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고종의 즉위부터 1896년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 성립 직전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대원군의 개혁 정책과 쇄국 정책, 명성왕후 정권의 문호 개방 정책, 임오군란과 청일 양국군의 주둔,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명성왕후 시해 사건, 의병 운동, 아관파천과 열강들의 이권 쟁탈전 등이 서술되어 있다.

3편은 모두 6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896년 아관파천부터 1911년 105인 사건까지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대한제국의 성립, 독립협회의 활동, 일본의 경제적 침략, 러일전쟁, 을사조약, 애국․매국 인물들에 대한 서술,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헤이그 특사 사건, 고종의 퇴위, 군대 해산과 의병 운동, 안중근 의거, 한일 강제 합병 이후의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통사》는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다루면서 일본의 침략과 이에 맞선 저항과 독립 운동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박은식은 시종일관 일본 침략의 간교함과 잔학상을 세밀하게 폭로 규탄함으로써 반일본 제국주의 의식을 높이고자 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저항과 국권회복운동을 서술함으로써 독립을 향한 주체적 의식과 노력을 고양하고자 했다.

 

독립 운동의 교과서

《한국통사》는 발간되자마자 중국과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들 사이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교민들의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또한 국내에도 비밀리에 대량 보급되어 일본 경찰은 《한국통사》를 금서로 지정하고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억압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통사》의 영향력에 당황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한국통사》가 발간된 이듬해인 1916년 급하게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가 작성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 따르면 《한국통사》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가를 알 수 있다.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의 야만 반개(半開)의 민족과 달리 옛날부터 역사서가 많고 또 새로운 저작들이 적지 않다. 이 중에서 전자는 독립 시대의 저술로서 현대와 관계가 없는데도 헛되이 독립국의 꿈을 꾸게 하는 폐단이 있다. 후자는 근대 조선에 있어서 일본과 청,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 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의 향배를 설명하고, 혹은 《한국통사》라 칭하는 재외 조선인의 저서와 같이 일의 진상을 규명하지 않고 함부로 망설을 지어낸다. 이들 역사책들이 인심을 좀 먹고 유혹하는 해로움은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중에서

박은식은 독특한 입장에서 역사 서술을 했다. 즉 국혼(國魂:민족정신)과 국백(國魄:나라의 형태)을 구별하고, 국혼의 유지 강화가 매우 중요함을 역설했다. 국백을 빼앗겼어도 국혼을 가지고 있다면 능히 국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은식은 국혼 또는 민족혼을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한국통사》는 투철한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서 동시대사를 연구한 책이다. 《한국통사》는 최초로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체계화하여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놓은 고전이다. 《한국통사》는 일제강점기에 많은 학생과 젊은이에게 조국의 역사를 가르치고 조국의 독립 의식을 드높인 교과서였다.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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