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황종희, 《명이대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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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는 나그네일 뿐이다
_ 황종희,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명나라를 다시 세우는 꿈이 사라지다

황종희는 명나라 말기에 태어나 청나라 초까지 살았던 중국의 대학자다. 황종희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활동과 사망에는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황종희를 살펴보려면 무엇보다 이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황종희의 사상은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도 다른 모든 위대한 학자와 사상가처럼 결국은 ‘시대의 아들’이었다. 황종희가 살았던 시대의 명나라는 거의 통치 능력을 상실하기 직전이었다. 무엇보다 정치가 극도로 문란했다. 명나라는 중기를 넘어서면서 환관 외의 몇몇 권문세가가 정권을 장악하고 휘둘렀다. 특히 환관의 횡포는 일찍이 다른 왕조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환관들은 왕을 자기 손 안에 넣고 주물렀으며, 이를 배경으로 모든 관리들을 통제했다. 다음으로 국가 재정의 파탄 났다. 명나라 말기에는 조선의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등 이른바 만력 연간(명나라 신종이 다스리던 1573~1619년)의 ‘3대 정벌 전쟁(역사적으로는 ‘3대정’이라고 부름)’으로 재정이 핍박을 받았다. 여기에 더하여 각 지방의 반란을 평정하고 궁전과 황실 묘의 건축을 건축하고 황자를 결혼시키는 등으로 막대한 돈이 지출되면서 국고는 텅 비어버렸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재정관과는 별도로 환관을 각 지역에 파견하여 강제로 세금을 늘려 거두어들였다. 이 때문에 각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명 왕조는 더 이상 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명나라는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황제 숭정제가 자살하면서 멸망했다.

명나라를 대체한 왕조는 청나라였다. 만주족은 1616년 청나라를 세우고 명나라를 압박했다. 1644년 이자성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하자 청나라가 이자성을 공격하며 북경으로 입성했다.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득세는 한족 학자들에게 커다란 굴욕이었다. 한족 학자들은 중화의식으로 항상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한족이 결국 야만인인 만주족에게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이에 청나라에 맞서 각 지방에서는 의용군이 조직되고 의식 있는 선비들이 참가하여 저항을 했다. 선비들은 청나라가 들어섰어도 결코 이민족의 국가를 인정하지 못하고 가슴속에는 명나라를 다시 부흥시키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러나 명나라 부흥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상당수의 명나라 선비들은 세상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들은 유신, 유민, 유노 등으로 불린다. 황종희와 더불어 명말 청초의 유명한 학자였던 고염무(顧炎武)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고염무의 어머니는 청나라에 반대하여 남경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그런데 남경이 청나라 군에 함락되자 15일간 단식하다 죽으면서 아들에게 “독서하고 은거하며 두 임금을 섬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고염무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평생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고 결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고염무의 학덕이 높아 청 왕조에서는 몇 번이나 등용하려 했지만 고염무는 한사코 거절했다.

 

학문에만 전념하다

황종희는 암울했던 명말 청초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성장했다. 어렸을 때인 1616년에 청나라가 건국되었고 장년이 된 1644년에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었다. 황종희는 명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집안 내력 때문에 더욱 절실히 느꼈다. 황종희의 아버지 황존소(黃尊素)는 어사의 직책에 있으면서 동림파에 속했던 인물이었다. 황존소는 환관의 폭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오히려 환관에 의해 파면되고 감옥에 갇혀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황종희의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비록 혼란기였지만 황종희는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유학 경전과 역사책, 제자백가의 사상서를 광범위하게 읽고 학문적 토대를 쌓아나갔다.

명나라가 망하자 황종희는 의용군을 조직하여 청나라에 맞서 싸웠다. 1663(2?)년에 지은 《명이대방록》은 명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강한 열망과 희망에서 나온 책이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었고 황종희의 꿈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청나라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명나라 부흥의 꿈이 사라지자 황종희는 고향에서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 황종희의 학문이 높고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왕조에서는 관리로 등용하려 했다. 청나라 왕조가 한족에 대한 회유 정책으로 실시한 특별 임용으로 황종희는 ‘박학홍유(博學鴻儒, 학문이 넓고 위대한 유학자)’에 천거되어 관직에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황종희는 이를 거절하고 죽을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황종희는 명나라 말기의 혼란과 나라의 멸망을 몸소 체험하면서 비극의 원인을 연구하고 당시의 모든 일에 대해 예리한 비판의 눈을 돌렸다. 황종희뿐만 아니라 명말 청초의 대학자로 불리는 고염무, 왕부지(王夫之)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학문에 대해 공허하다고 비판했다. 당시의 학문이 실제 현실을 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비판과 함께 황종희 등이 내세웠던 학문은 바로 ‘경세를 위한 학문’, 즉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이었다. 황종희의 생각에 따르면 유학은 원래부터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자학(朱子學)이나 양명학(陽明學)은 이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 인식 아래 황종희는 과거의 역사를 연구했다. 또한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등을 연구하고 비판하면서 많은 정치론, 경제론을 펼쳤다.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은 바로 이런 학문의 흐름 속에서 나온 대표작이다.

 

동양의 루소가 쓴 정치 원리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은 한마디로 말하면 정치 원리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은 제목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명이대방록’에서 ‘명이’란 《주역(周易)》에 나오는 64괘 중 하나다. 명이의 뜻은 ‘밝음이 이지러져 있어서 아직 충분히 빛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자가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고 비방을 두려워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의미한다. ‘대방’은 글자 그대로 방문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즉 지혜로운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물어보기 위해 현자를 찾아주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황종희는 ‘군주’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했다. 옛날의 군주는 스스로를 지나가는 나그네라고 생각했다. 천하가 주인이었고 군주가 하는 일은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군주는 그렇지 않았다. 군주 자신이 주인이고 천하의 사람들은 나그네라고 하여 군주와 천하의 관계를 역전시켰다.

후대의 군주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천하의 이해와 관련된 권한이 모두 자신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여 천하의 이익은 모두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천하의 손해는 모두 남에게 돌렸다. …… 군주들은 천하를 자신의 재산으로 생각하고 자손들에게 물려주어 영원히 누리게 했다. …… 옛날에는 천하가 주인이고 군주는 지나가는 나그네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군주가 하는 일은 천하를 위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군주가 주인이고 천하의 사람들은 오히려 지나가는 나그네가 되었다. 따라서 천하의 사람들이 어디를 가든 편안하게 쉴 곳이 없는 이유는 군주 때문이다. 천하를 얻지 못했을 때는 천하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고 사람들의 자손들을 흩어지게 하여 자신의 재산을 늘리면서도 조금도 참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종희는 “천하에서 가장 해로운 것은 군주뿐”이라고 결론지었다. 황종희는 군주 비판에 이어 군주와 신하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 다루었다. 황종희는 천하를 다스리는 일을 큰 나무를 옮기는 일에 비유했다. 큰 나무를 옮기려면 사람들이 협력해야 한다. 그래서 황종희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협력하는 관계라고 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마치 큰 나무를 옮기는 일과 같다. 앞 사람이 ‘영차’ 하면 뒷사람이 ‘영처’ 하고 화답한다. 군주와 신하 역시 나무를 함께 운반하는 사람들과 같다. 나무를 끌어야 할 앞사람이 손으로 밧줄을 잡지 않고 발로 땅을 구르지 않으면서 그저 웃으며 놀고 있는데 뒷사람이 아무리 밀어야 나무를 옮길 수 있겠는가.

앞에서 나무를 끄는 사람이 군주이고 뒤에서 나무를 미는 사람이 신하다. 군주가 놀고 있다면 신하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천하가 다스려질 리 없다. 협력하여 이끌고 밀어야 나무를 옮길 수 있듯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이런 황종희의 사상은 군주와 신하를 상하 관계로 보는 전통적 사고에 대한 비판이었다. 황종희는 옛날 사례를 들어 군주와 신하의 올바른 관계를 말했다. 옛날에는 신하가 절을 하면 군주가 답절을 했다. 신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군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군주가 가마를 타고 있을 경우에도 신하가 인사를 하면 군주가 가마에서 내려와서 인사를 했다. 이렇듯 군주와 신하는 대등한 관계였다는 것이다.

황종희의 주장은 우리나라의 대학자인 정약용이 《통치자론(原牧)》과 《탕임금론(湯論)》에서 주장한 것과 유사하다. 또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의 주장을 연상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종희를 ‘동양의 루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황종희는 명나라 말기에 자기가 직접 겪은 병폐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하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황종희가 보여준 탁월한 역사적 안목과 우국충정은 중국에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19세기 말 중국이 혼란에 빠졌을 때 《명이대방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발췌본이 다시 간행되기도 했다.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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