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황현, 《매천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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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뜨거웠던 46년간의 기록_ 황현, 《매천야록》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네

난리 속에 살다 보니 백발이 되도록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못 이루었구나
오늘은 참으로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 창공에 비치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의 별이 옮겨가니
구중궁궐 침침하여 낮 시간도 더디구나
이제부터 어명조차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한 장의 어명을 적시네.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네

일찍이 나라를 지탱하는 데 조그만 공도 없었으니
다만 어짊을 이룰 뿐이지 충성은 아니었구나
겨우 윤곡의 행적을 따르는 정도이지
진동의 행적을 따르지 못함이 부끄럽네

 

1910년 9월 10일 황현(黃玹, 1855~1910)은 4편의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 합병을 당한 지 11일 만이었다. 황현은 여러 차례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또한 인간 세상에서 자신처럼 글 아는 사람의 역할이 매우 어렵다고 했다. 윤곡은 송나라 사람으로 몽골군이 침략하자 항의하여 자결했다. 진동은 송나라 사람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싸웠다. 황현은 두 송나라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행동이 윤곡의 행적을 따르는 것이지 진동의 행적을 따르는 것은 아니어서 부끄럽다고 했다. 이 ‘절명시’는 <대한매일신보>에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황현의 숭고한 순국정신이 기려졌다.

황현은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 때 한양으로 올라와 평생의 친구가 되는 이건창, 김택영, 이기 등과 사귀게 되었다. 스물여덟 살 때 과거 시험에 응시하면서 당시의 정치 현실을 통감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초시와 초장에서 황현의 답안이 장원으로 뽑혔지만 문벌이 없는 시골 사람이라 2등으로 바뀌는 수모를 겪었던 것이다. 그래서 황현은 출세를 포기하고 고향에 파묻혀 은둔 생활을 했다.

비록 세상을 등지고 살았지만 나라의 운명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황현은 마흔 살 때인 1894년부터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쓰기 시작했다. 매천은 황현의 호다. 황현은 나라의 운명을 낱낱이 기록함으로써 후대에 경계를 삼고자 했던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강제합병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소식이 지리산 자락 구례까지 전달되는 데는 며칠이 걸렸다. 황현은 분통을 참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매천야록》이 쓰인 것은 1910년 이전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출판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해방 후인 1955년에야 빛을 보게 되었다.

 

가장 뜨거운 46년의 기록

《매천야록》은 고종이 즉위한 1864년부터 1910년 8월까지 46년간의 사실을 기록한 역사서다. 황현은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고 외세의 침략이 나날이 거세지는 시기에 나타난 지배층의 행태, 사회의 실상 그리고 일본과 청나라와의 외교관계, 민족 반역자들의 행태, 의병들의 구국 항쟁 등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이때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기다.

《매천야록》은 6권 7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게 보면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으로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내용이 나뉜다. 특히 1894년부터 1910년까지를 자세히 기록하여 책 전체의 약 80퍼센트를 할애했다. 1894년 이전에 일어난 일로는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천주교도 학살, 병인양요, 신미양요, 민란,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대원군과 명성왕후의 알력, 명성왕후를 중심으로 한 외척의 발호와 어지러운 정치, 일본의 침략과 병자수호조약, 매관매직, 과거제도의 문란, 궁중의 타락한 생활, 임오군란과 외세의 간섭, 갑신정변과 청일 양국의 각축 등도 기록되어 있다.

1894년 이후에 일어난 일로는 동학농민운동과 청군의 주둔, 청일전쟁과 일본의 승리, 갑오개혁과 을미사변, 러시아 세력의 침투와 아관파천, 러일전쟁, 독립협회와 일진회, 을사조약 체결과 이후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 정책,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의 매국 행위, 이에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과 의사들의 활동, 탐관오리의 비행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내용들이 아주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서술되어 있다. 특히 아주 자세히 기록된 의병들의 활동은 황현의 사상적 관점을 드러내준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조선 내에는 조선의 현실과 미래를 둘러싸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위정척사파는 정통 유학을 배경으로 하여 외세를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정척사파는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유인석, 최익현 등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일으켰다. 개화파는 일본을 통해 수입한 유럽 학문의 영향을 받아 유럽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자고 했다. 개화파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실패했다. 이후 개화파는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조선의 정체성은 지켜야 한다는 동도서기파 등과 연합하여 갑오개혁의 주축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최제우는 서학, 즉 기독교를 배척하고 민중의 요구에 바탕을 둔 새로운 종교, 즉 동학을 창시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동학에 참여했다. 또한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대항하는 농민들의 봉기가 발전하면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반외세, 반봉건을 내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이렇듯 강화도조약 이후는 다양한 세력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며 실천했던 시기다. 그러므로 이 시기를 ‘개화기’라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개화를 내건 개화파는 여러 세력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황현은 정통 유학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다. 황현은 기본적으로 위정척사파와 입장을 같이 했다. 개화파나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비판에서 황현의 입장이 잘 드러난다. 황현은 개화파가 외세를 등에 업고 갑신정변을 추진한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특히 개화파 인사 상당수가 친일파로 변신했음을 매우 준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는 전통적 체제를 뒤흔드는 반체제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황현은 동학농민운동을 ‘동비들의 반란’이라 불렀다. 즉 동학 비적들의 반란이라는 말이다. 특히 동학 세력의 일부가 일진회 등을 만들어 매국 행위를 한 것에 대해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개혁적 유학자

그렇지만 황현이 위정척사파의 입장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황현은 일본보다 먼저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혁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 유학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화파의 장점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전통 유학자들에 대한 황현의 비판은 서원 철폐에 대한 기록에서 나타난다. 서원은 유학자들이 붕당을 맺는 터전이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은 서원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서원을 철폐했다. 황현은 유학자이지만 서원 철폐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주도한 것을 비판했다. 아울러 서원 철폐에 대한 유학자들의 반대를 비판했다.

서원의 책임을 맡은 자가 백성들을 잡아다 때리는 일이 많았다. 그 폐단이 많아서 사람들은 서원을 가리켜 가죽을 뚫고 골수를 빨아먹는 좀이라고까지 불렀다. 서원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수령들조차 두려워서 감히 죄책을 묻지 못했다. …… 서원의 설치는 처음에는 좋은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서원에서 몸과 마음을 수양하다 나라에 변란이 생기면 자진해서 창을 메고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많은 곡식을 쌓아두고 물질적으로 풍부해지자 그 성격이 변했다.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고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 명령이 대원군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비난받는 것이다. 서원 철폐를 할 때 백성들은 별다른 일이 없었지만 서원 내의 유학자들이 상소를 올리고 미쳐 날뛰며 반대하니 양식 있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당시의 사회상과 그 시대를 움직였던 인물들을 비판적으로 평가․묘사함으로써 근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마치 인물 사전과 같이 치밀하게 묘사한 인물평은 대단히 생동감이 있다.

황현은 당시 지배자인 고종, 순종, 대원군, 명성왕후를 둘러싼 다양한 야사와 더불어 일본을 중심으로 청나라와 러시아의 다양한 각축전 양상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서술함으로써 그것들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했다. 특히 황현은 민족 반역자들의 태도와 그들을 부추기면서 교묘하게 침략해오는 일본의 간교한 정책에 대해 탁월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황현은 의병 운동의 역사와 흐름, 의병에 참가한 주요 인물들의 활동을 자세하게 기록함으로써 격동의 시대를 주체적인 노력으로 헤쳐 나가고자 했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황현은 유학의 세계관을 옹호하면서 새로운 시대적 조류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황현은 내적 개혁을 통해 외적 고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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