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
_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들고 읽어라
몹시 괴로운 마음으로 말하고 울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 수 없으나 이웃집에서 어린아이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마치 노래하듯이 “책을 들어서 읽어라, 들어서 읽어라” 하고 여러 차례 되풀이했습니다. …… 나는 넘쳐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일어났습니다. 그 목소리는 성서를 펴서 처음 시선이 가는 대목을 읽으라는 하느님의 명령임에 틀림없었습니다. …… 나는 성서를 손에 들고 맨 처음 눈에 띄는 대목을 말없이 읽었습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 13절).” 나는 더 이상 읽지 않았습니다. 더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구절을 읽고 나자 즉시 모든 걱정으로부터 벗어난 듯이 평안하고 밝은 빛이 내 마음속에 가득 찼습니다. 의혹의 그늘은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가 참회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했다. 젊은 시절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장차 기독교 교회의 위대한 교부가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억지로 학교에 다니면서 난폭한 학생 집단과 어울려 노는 악동이었다. 카르타고와 로마 그리고 밀라노에서 수사학 선생으로 일할 때도 결코 깨끗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애인과 동거하다 아이가 생기자 애인을 버렸다. 훌륭한 가문의 여자와 결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한 여자와는 약혼했다가 새 애인이 생기자 파혼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른두 살이 되던 386년 아우구스티누스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흔세 살이 되던 397년부터 4년여에 걸쳐 《고백록(Confessions)》을 집필했다. 《고백록》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의 기록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참회했다. 그리고 기독교가 무엇인지, 기독교도적 삶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은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백록》에 영향을 받아 장 자크 루소와 톨스토이(Lev Tolstoi)도 각각 《참회록》를 써서 자신들의 삶을 고백하고 참회했다.
밖으로 나가지 마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자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건 속에서 자신을 만나고 이해하며 발견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한 특질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파악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밖으로 나가지 마라. 그대 자신 안으로 돌아가라. 인간 내면에 진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대의 본성이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거든 그대 자신도 초월하라. 하지만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초월하는 순간 그대는 추론하는 영혼까지 초월하고 있음을! 그러니 이성의 원초적 광명이 밝혀져 있는 그곳을 향해서 나아가라! 제대로 추론을 하는 모든 이는 진리 말고 어디에 도달하겠는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이전의 철학과 달랐다.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을 우주의 구성원으로 파악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인간을 공동생활을 하면서 행위하는 자, 즉 사회적 동물로 파악했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인간을 세계 안에 존재하는 신성(神性)의 한 부분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각을 가진 인간, 자기가 경험한 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었다. “나는 이 (플라톤주의 철학) 책을 통해서 나 자신 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아 내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께서 내 구세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아갈 때 내 영혼의 눈은 비록 희미하지만 내 정신 위에 두루 비치는 빛을 보았습니다.” 이런 철학에 따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생에 대해 아무런 변명 없이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자서전을 쓸 수 있었다.
누구나 죄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솔직하게 지난날의 모든 죄악을 고백하고 참회하고자 했다. 책임감 없이 벌였던 연애 관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웅변술로 거드름을 피운 일, 학생 시절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했던 일, 구구단을 외우기보다 트로이의 화재 이야기를 더 좋아했던 일, 극장에 자주 가곤 했던 일. 그는 이 모든 것을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젖먹이 시절 젖을 달라고 보채며 울었던 일조차 죄를 지은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참회하여 구원받기 위해 고백성사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그 심연으로 들어가 악의 근원을 탐구했다. 깊은 늪에 빠져든 것처럼 끊임없이 누가 나를 만들었는지, 누가 나를 죄짓게 했는지 알고자 했다. “누가 나를 만들었는가? 그것은 오직 선한 분이시자 선 자체이신 나의 하느님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는 악을 원하고 선을 원하지 않는가? 내가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완전한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누가 이런 것을 내 속에 옮겨 고난의 어린 나무를 심었는가?”
진실을 향한 고뇌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만물을 선하게 창조했으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죄악에 빠지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불의가 무엇인가를 탐구한 결과 불의는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 최고의 실체이신 하느님에게서 몸을 비틀어 빠져나와 비천한 사물들에게 내려감으로써 자신의 내적 삶을 거절하고 외적 물질로 부풀어 오르는 의지의 배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영혼은 안식을 추구하나 불안할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인간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그런 잘못된 것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런 갈망의 상태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 중의 하나가 생겨난다. 바로 불안이다. 불안에서 벗어나 안식을 추구하려면 영혼 깊숙한 곳으로 회귀해야 한다. 육체가 영혼을 거스르고 영혼이 육체를 거스르는 죄악은 신을 통한 회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의 근원과 불안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탐구하면서 원죄설과 예정설을 토대로 하는 중세 교부철학을 잉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도 바울의 원죄설을 받아들인다. 원죄설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아담의 죄가 인간을 근본적으로 타락시켰기 때문에 그 이후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숙명적으로 죄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설을 받아들이자마자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원죄설에 따르면 인간의 죄는 숙명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는 그 자신의 책임과 자유 아래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게 된다. 따라서 원죄와 자유에 대한 사상 사이에 모순이 생겨난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예정설을 도입한다. 예정설에 의하면 모든 인간의 행위나 운명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유를 포기하게 된다. 인간은 신의 결정에 따라 구원받기도 하고 단죄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의 신비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결론을 내렸다.
기억의 창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끝없이 진리를 추구한다. 또한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 진리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알기 위해 진리를 찾았고 진리를 찾기 위해 인간을 찾았다. 진리를 향한 열정은 기억과 시간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기억의 놀라운 힘과 기억이 저장하는 것들 그리고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를 고찰한다. 인간의 영혼은 기억과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기억의 동굴에서 자신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억을 끄집어내 자신을 만나고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 신의 진리를 알고자 한다. “진리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가지 않은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나는 감각을 통해 가능한 한, 이 세상을 관찰하고 내 신체를 살게 하는 생명과 내 감각 자체를 고찰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기억의 깊은 곳까지 진입했습니다. 그 기억의 깊은 곳에는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무수한 저장물이 소장되어 있는 온갖 거대한 방이 있었습니다. …… 나는 주님의 존재를 찾기 위해 계속 내 기억의 광대한 저장물 속에서 어떤 존재를 자세히 조사하고, 어떤 존재를 다시 수용하고, 어떤 것을 끌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과거-현재-미래에 대해 고찰하고 시간의 영원성을 향해 나아간다. 시간도 신이 창조한 것이다. “주님께서 모든 시간을 창조하셨으니, 만일 주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 어떤 시간이 존재했다면 주님은 그때 하시던 일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 그 자체도 주님께서 창조하셨고 주님께서 시간을 창조하기 이전에는 시간이 흘러가는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 지상에는 영원이 존재했다. 영원은 천지창조와 함께 소멸되었다.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구분이 유효하지 않고 다만 현재라는 시간만이 존재한다. 과거는 현재의 기억으로, 미래는 현재의 기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를 통해 불안을 쫓고 평화를 느꼈다. 뭔가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신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모든 것을 알고자 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위대한 고대 철학자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