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공부모임 7월 12일 공부 스케치]
소크라테스의 “변론”
기원전 387년 플라톤 40세에 기록된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대화체라 잘 읽힙니다. 동시대 동양고전과 비교해 읽어 보고 차이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아테네는 폴리스 500개의 법적 문화적 중심지로 아테네 시민은 지도자 국가로서의 자긍심 있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과학을 가르치고 지식을 파는 소피스트이고 무신론자임으로 추방해야 한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섰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은 내 관심사가 아닙니다. 젊은 시절 자연과학에 관심이 있었으나 이후 인간에게로 관심이 이동했고. 나는 가르치려 한 적이 없습니다. 대화를 했을 뿐입니다. 라며 스스로를 변론 합니다.
아테네는 종교적 신화적 사고가 발달 했습니다. 그들이 모시는 신은 질투하고 욕망하는 본능에 충실한 신입니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신은 정신적이고 추상적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신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존재여서 제우스처럼 바람을 피우지도 헤라처럼 질투를 하지도 포세이돈처럼 복수하지도 아테나처럼 살육을 즐기지도 않습니다. 아테네인의 전통적 사고가 친구에게 도움을 주고 적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이 정당하듯, 아테네인의 신들도 그렇습니다. 이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행위와 무관하게 선한 행위가 올바른 행위라고 믿습니다. 그의 신 역시 그렇습니다.
법정에서 변론 시작 전 고소자의 거짓말과 미사여구를 꾸짖던 소크라테스의 언어가 기억납니다. 이어서 황광우 성생님의 “ 평화를 사랑하는 미국 시민에게 드리는 편지” 속 다른 시대의 비슷한 고민에 담긴 바램을 읽었습니다. 지도자 국가가 떳떳하다면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지 않을 텐데 명분 속 숨겨지고 덧칠해지고 가려져 늘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안개 속 형체를 잃어버린 채 부유하는 개인은 흐름을 따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도덕적 인과율로 움직이지 않는 그 흐름 속 나약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 너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하는 것 같은데 도덕이라 제시된 드높은 정신의 그림자의 그림자만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강연 안내] 황지우 시인과의 만남
•주제: “누구에게나 시적 순간은 있다”
•일시: 7월 18일 6시~8시
•장소: 광주 용봉중학교 본관 3F “영어전용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