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매화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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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화를 보며

 

김정희

지난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며칠 전에도 봄의 문턱에서 32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고 야단들이었다. 큰 아이의 고등학교 입학식 날 치마 정장을 차려 입고 나갔다가 얼마나 떨었던지 집에 돌아와 이불을 쓰고 눕고 말았다. 우수 경칩이 지나고 날씨가 풀릴 때도 됐는데 연일 눈 소식이 들린다. 요즘 같아서는 도무지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오늘도 눈보라가 몰아 쳤지만 반납할 책이 있어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 뜨락에 함박눈을 맞으며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순간 폐부 깊숙이서 뭔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환희의 탄성이었고 진한 감동의 일렁임이었다. 나도 모르게 잔뜩 웅크렸던 어깨를 펴고 한동안 넋 놓고 매화를 바라보았다. 홍매화는 흰 면사포를 쓴 고운 신부 같았다. 수줍은 꽃잎이 파르르 몸을 떠는 것만 같은 애잔함이 눈물겨웠다. 찬란한 봄은 쉽게 오지 않고 많은 역경과 시련을 거치면서 경련 하듯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삭풍은 물러가고 따스함을 얹은 바람과 금빛 햇살이 찾아올 텐데 왜 이다지도 힘들게 꽃을 피우는지 안타까웠다. 그 가냘픈 내면에 어떤 강함과 불씨가 있기에 저리 의연할 수 있을까.

홍매화를 들여다보며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녀는 올해 마흔 다섯의 나이로 젊은 아이들을 물리치고 서울 모 대학 단과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나는 한 모임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위였지만 우리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늘 나의 수다스런 푸념과 부끄러운 속내를 웅숭깊은 마음으로 과묵하게 받아 주었고 배려해 주었다.

어느 날 그녀는 모임에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늘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기에 내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알지 못할 배신감으로 부글부글 속을 끓였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그녀의 과감한 결단이 부러웠다. 그녀에게는 아직 손이 많이 가야할 두 아이가 있다. 또한 대소사가 많은 집안의 맏며느리였기에 완벽한 그녀의 성격으로는 쉽지 않은 결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격려해 주었다. 공부에만 전념할 여건이 아니었는데도 그녀는 졸업 때까지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가 실업계 여고를 나왔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더 힘들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나는 또 한 번 놀랬다. 그녀가 계속 일등을 차지하자 동급생인 젊은이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 때문에 시댁일 때문에 자신의 건강 때문에 몇 번씩 휴학을 결심하기도 했단다. 학문에 대한 뜨겁고 치열한 순도 높은 갈망이 없었던들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열심히 하기에 계속 수석을 하세요.???? 하고 물으면 그녀는 ????맨날 잠만 자요.????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에게 내숭 떤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진심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만족할 만큼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루 종일 공부만 해도 부족하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아마 늘 새벽까지 책에 얼굴을 묻고 있었으리라. 그녀는 공부를 하면서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그녀는 졸업을 앞두고 4년 동안 받았던 장학금과 얼마간의 돈을 합하여 학교에 기증했다. 그녀는 공부를 시작한 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한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공부를 봐주는데도 관점이 바뀌었고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나는 그녀가 겨울의 시련을 결곡한 의지로 이겨내고 아름다이 꽃피운 홍매화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도 늘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산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안주하듯 내 일을 버리고 남편의 삶에, 또 아이가 태어나자 아이의 삶에 내 자신을 맞추며 살아 왔다. 그리고 내가 뭔가를 시작하지 못하는 것에 늘 그들을 끌어들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많은 핑계거리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어떤 가능성으로부터도 유폐 당했다고 단정 지어 버렸다. 사실,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원인은 나에게 있는데도 말이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자고 나면 ????내가 아닌 새로운 나????로 변화되어 있기만을 소망했다. ????새로운 나????는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았으며 현실에서의 나는 변함없이 단순한 일상에 관성처럼 매달려 있었다.

매화꽃을 보면서 느꼈던 절절함이 내 마음속에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안녕하세요. 사단법인 인문연구원의 웹진 동고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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