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추모제와 나주역사기행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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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주기 합수 추모제와 나주 역사기행을 다녀와서

이은주(일동초 교사)

 

1.

6월 22일 토요일, 오늘은 일 년 중 낮이 제일 길다는 하지(夏至)이다. 그렇다고 하루 24시간이 더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1박 2일 집을 비워야하는 엄마로서 바쁘기는 매한가지였다.

매년 이맘 때 “합수 추모식”이 있고 1박 2일 역사 기행을 떠나기에 부랴부랴 식구들의 먹거리를 준비했지만, 이미 시계는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국립 5.18 민주묘지 ‘역사의 문’에 도착하니 행사는 이미 시작되었고, 추모사가 한창이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앉았다.

작년 11주기에는 노회찬 의원이 추모사를 했는데, 올해는 ‹몽양 여운형 기념사업회›의 이부영 이사장이 추모사를 했다. “북미 협상이 지지부진한 이때 합수라면 무어라고 말했을까, 합수라면 무엇인가 말을 했을 터인데… 작금의 한국, 한국의 촛불은 너무 조용하다.”면서 이부영 이사장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돌파구는 없는가? 광주에게 무언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오성인 시인이 추모시를 낭송했다. 역시 통일이 주제였다. 황광우 상임이사는 미국에서 진행된 민권센터의 활동을 보고하였다. 합수의 미국 활동이 과거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힘주어 역설하는 보고였다.

이어 합수의 육성이 들려왔다. 카랑카랑한 쇳소리였다. 대동 정신을 강조하는 합수의 살아있는 외침이었다. 부인 신경희 씨는 참석자 모두에게 감사인사를 하였고, 특히 음식을 준비해주신 윤경자님께 감사를 드렸다. 추모제를 마치고 묘지 참배를 하였다. ‘역사의 문’에서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두 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나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2.

가도 가도 버스는 멈추지 않았다. 광주에서 30여분 가면 도착하는 곳이 나주인데, 1시간이 지나도 차가 멈추지 않았다. 군데군데 배나무 과수원이 보였고 남도의 황톳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버스가 가는 곳은 나주가 아니라 영암이었다.

붉은 황톳길을 따라 가다 보니 대형 고분들이 창밖에 보였다. 영암 시종 마을의 삼포천에 내렸다. 강을 바라보며, 조현종 전 광주박물관장의 설명을 들었다.
마한은 백제가 아니었다. 근초고왕 이래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는데, 잡초처럼 마한은 길게 그 생명을 지속하였다. 지하에 묻힌 고분이 이를 증거한다는 것이었다. 백제의 지층 아래 숨어있는 마한을 찾는 게 조현종 관장이 자임한 미션이었던 것 같다. 그 마한의 중심지가 영암이고 나주였다. 영산강 가 갈대숲에 묻힌 아늑한 마을들이 마한이란다.

이어 마한문화공원을 들렀다. 영암의 고분박물관 몽전(夢殿)을 지나 남해신당에 당도했다. 남해신에게 제를 지내던 곳이다. 남해신당 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시원하였다. 남해신당 뒤쪽에 서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우람하였다.

 

영암에서 나주로 돌아 왔다. 고분으로 가는 길가엔 삐비가 우거져 있었다. 들판에 우거진 삐비꽃은 우리들 모두를 동심으로 돌아가게 했다. 조현장 관장은 우리더러 고분 위에 직접 올라가도록 하였다. 무덤 위에 올라가는 것은 결례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관장께서 무덤 위에 올라가 보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무덤 위로 올라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마치 목장의 풀을 뜯는 양떼들처럼 마냥 평화로웠다. 올라가 보니 꼭대기는 네모지고 평평한 풀밭이었다. 무덤 위에서 멀리 강을 내려다보았다. 또 다른 고분군들이 숲속에 우거져 있었다. 무덤이 동산처럼 보였고 동산 앞엔 시골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한은 아직 미지의 실체였다.

 

버스는 나주의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의 높은 분들이 죄다 나와 우리를 영접하였다. 알고 보니 유인태 국회사무총장이 우리의 일행이었다. 박물관 측에서는 ‹합수기념사업회›가 관람을 하러 온 것에 대해 매우 감동하였던 모양이다. “‹합수기념사업회›의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전자간판에 번쩍이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자유롭게 박물관의 옹관묘와 부장품들을 관람하였다. 문화재 관리사 허경도 회원은 1층 입구에 서 있는 석등이 예사롭지 않은 석등임을 강조하였다. 또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이 신라의 금관과도 다르고 백제의 금관과도 다른, 아주 독특한 금관임을 역설하였다.

강당에서 조현종 박물관장의 강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모두들 몸이 피로하였으리라. 조현종 관장의 박학다식한 강연은 우리의 피로를 물리치기에 충분하였다. 전 세계에 산재한 지석묘는 5만여 기이다. 그 중 4만여 기가 한반도에 있고, 그 중 2만여 기가 호남에 있다고 한다. 이게 뭔가? 영산강 유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일군 마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또 강조하였다.

유인태 사무총장은 서울의 일정 때문에 이즈음 떠났다. 나랏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쁘실 분이 멀리 이곳까지 왕림하신다는 것, 합수에 대한 진정성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중흥리조트로 가는 길도 심상치 않았다. 빗방울이 한두 점 떨어지고 있었다. 나주호는 넓기만 했다. 호수 길을 따라 가는 버스는 좀체 목적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3.

저녁 시간은 역시 반가웠다. 더러는 김치찌개를 먹었고 더러는 오징어 볶음을 먹었다. 반주도 빠트릴 수 없었다.

이내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형문화재 김용철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는 시 ‹승무›보다 더 보드라운 춤, 선비 춤이었다. 날 듯 멈추고 멈추었다 살포시 걸음을 옮기는 절제미가 두드러져 보였다. 옛 선비들은 흥이 나며 저렇게 춤을 추었고나…

이어 오정묵의 7080 콘서트가 이어졌다. 오정묵은 전남고 출신, 전남대의 학생운동가였다. 젊어서 합수와 인연을 맺었다. 그 인연을 이 자리에서 풀어내고 있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최초로 부른 가수라한다. 가야금을 가져오지 않았다며 가야금 없는 가야금 연주를 시작하겠다고 하였다. 무엇인가 들어보니 목소리로 가야금을 흉내 내는 연주였다. 처음에는 장난하는 줄 알았는데 갈수록 신기에 가까웠다. 가야금 산조의 대가 황병기의 연주를 흉내 내기 위해 800회 이상 들었단다. 대단하였다. 입으로 연주하는 가야금, 전 세계 유일한 가야금 연주가 아닐까?

  

이어지는 오정묵의 노래는 동과 서를 넘나들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청중을 사로잡더니, 엘비스 프레슬리의 팝송으로 넘어가드만, 다시 사이몬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로 치달려갔다. 오정묵의 입담은 참가자들의 배꼽을 빼놓았다. 이런 공연을 왜 이곳에서만 듣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오정묵이 기타를 놓자 다시 김용철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설장고를 들고 나왔다. 휜칠한 키, 잘 생긴 용모, 김용철의 설장고는 대번 좌중을 압도하였다. 설장고는 파괴력이 넘쳐났다. 예서 그칠 수 없다며 김정희 회원이 마지막 마이크를 잡았다. 평소 갈고 닦은 판소리 공연을 하였다. 밤은 깊어가면서 나는 그야말로 귀 호강을 누린 것이다.

 

4.

23일 아침, 다들 비실거렸다. 밤새 주님을 크게 모신 탓이었으리라. 황태해장국으로 뱃속을 달래고 우리는 곧장 불회사로 갔다.

불회사로 가는 길은 숲길이었다. 비자림이 우거진 숲길 말이다. 공기도 상큼하였다. 전라도에 살면서 이 좋은 절을 왜 이제야 들리는 것인가? 절 입구엔 석장승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해학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불교와 토속 신앙이 어우러져 나온 문화재란다.

불회사 대웅전 앞에서 문화재 관리사 허경도 씨가 나섰다. 안동에서 온 허경도의 사투리가 경쾌하였다. 불회사의 부처님은 종이로 만든 부처상이라 한다. 불이 나면 불상이 가벼워 안고 대피하기가 편리하다는 것이다. 대웅전 단청의 건축 기법이 부안의 내소사와 해남의 미황사와 비슷하다고 풀이하였다. 역시 전문가였다. 절을 지은 목수가 같은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같은 계파의 목공들이었을 거라고 허경도는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절의 창문은 주기적으로 단청을 해주어야 아름답고 보존력도 높아지는 법이다. 그런데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좋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단청을 미루고 있는 곳이 있어 안타깝다고 한다. 대웅전 천정의 그림도 특이하였다. 허경도는 꼭 천정 위를 보라고 주문하였다. 자세히 보니 게와 물고기, 자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용이 입에 물고 있는 것도 여의주가 아니고 물고기였다. 이 지역의 해상세력이 불회사를 지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란다.

불회사를 뒤로 하고 미천서원을 향했다. 미천 서원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에서 이종범 ‹한국학호남진흥원› 원장은 “제발 문제의식을 갖고 올라가라”는 주문을 하였다. “무엇 때문에 다른 지역의 사람을 이곳 미천서원에 모시는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미천서원의 마당에서 이종범 진흥원장은 마이크를 잡길 거부했다. 원장님의 육성은 마이크보다 더 쩌렁쩌렁 울렸다. 모두가 서울로 올라가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호소하였다. 울분에 쌓인 강연이었다. “지금, 여기, 이 자리, 내가 있는 곳을 알아야 한다.”고 목 놓아 열변했다.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와 곤재 정개청으로 이어지는 원장님의 강연은 너무 해박하여 우리 같은 천학비재는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제발 우리 지역의 역사를 바로 알자.”는 메시지만큼은 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점심은 드들강에서 먹었다. 메기 매운탕이었다. 한 곳을 더 들렀다. “엄마야 누나야”, “부용산‘의 작곡가 안성현의 시비가 서 있는 곳이었다. 비가 내린 다음 날, 드들강의 물은 넘쳐흘렀다. 정민호 회원이 열창하였다. 작곡가 안성현의 월북으로 한 때 금지곡이었다는 ‘엄마야, 누나야’, 빨치산이 불렀다 하여 금지곡이 되었다는 ‘부용산’ 노래를 불렀다. 어처구니없는 세월이었다. 드들강은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다.

 

 

 

동고송
안녕하세요. 사단법인 인문연구원의 웹진 동고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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