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사적지 답사] 1. 녹천 고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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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書生)의 가슴속에는
저절로 갑병(甲兵)이 들어있는 법이니…

-녹천 고광순의 자취를 찾아-

 

박전일(고전공부모임 회원)

 

호남은 ‘의향義鄕’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왜’ 의향인가? 이 질문에 선뜻 답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언제부턴가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반성이 있었고, 발분했다.
그러던 차에 아시아문화진흥원이 주관하는 <호남 의병 사적지 답사>를 알게 되었다.
(정확한 명칭은… 기해년 ‘3·1운동 백주년’ 항일애국지사 사적지 답사였던 것 같다.)

유난히 더웠던 지난 6월 25일 화요일.
녹천 고광순, 성재 기삼연의 자취를 찾아 장성과 담양을 다녀왔다.
동고송에서는 황광우 상임이사, 유미정 사무국장, 그리고 글쓴이가 참여했다.

제한된 시간에 두루 다니지는 못했다.
다녀와서 짧은 답사기를 쓰려 했다.
그러나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숙제를 냈고, 숙제를 하느라 며칠을 끙끙댔다.
이렇게 해서 녹천 고광순 의병장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시간이 턱 없이 부족하여 성재 기삼연에 대해서는 아직 정리중이다.)

 

*일러두기 : 참고한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홍영기,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동학농민혁명과 한말 의병항쟁』
-고광렬, 『삼의사행장(三義士行狀)』 중 「녹천공행장(鹿泉公行狀)」 [내려받기_녹천공행장.hwp]
-홍순권, 「한말 호남의병의 계보와 사상-고광순 의병활동의 사상적 배경을 중심으로」
-조동수·김동영, 「의병열전」 중 한말 고광순 편, 전남일보(1977. 1. 15~28)
-그 외 신문기사 자료들.

그리고
곽병찬, 『향원익청』1의 「고광순과 고정주_ 제봉 가의 길, 녹천의 칼과 춘강의 붓」을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 [한겨레신문 연재 기사 원문 보기]

 

0.

먼저
효당 김문옥이 짓고, 고당 김규태가 썼으며, 구례군민이 세운 고광순 의병장 추모비 비문이다.

고광순 공께서 돌아가신지 수십 년.
이 산하도 일제 침략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이 제비골의 영명한 혼들은 밤마다 밤마다 구슬피 울음소리를 내어도
지나가는 이 술 한 잔 내오는 이 없다.

대지와 집들이 이미 깨끗해진 지금
구례선비들이 생각하기를 공께서 순절하신 이곳,
이 흙과 돌이 아직도 공의 영혼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으니
어찌 표지 하나 없을까 보냐.

돈을 모아 큰돌을 하나 다듬었다.
친척 두흠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고하며 나에게 공의 사적을 써달라 부탁하였다.
오호라! 천만년을 지나도 웅장한 저 지리산은 무너지지 않는다.

저 우뚝 솟은 충의와 절개는 또 이 산과 더불어 우뚝 서리라.

-1958년 2월 초순에 광산김씨 문옥 짓고 김규태 쓰고, 구례군민 일동 세우다.

 

1.

고광순은 1848년 2월 초이렛날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태어났다. 13달 만에 출생하여 아버지 고정상과 어머니 김씨의 애를 태웠다.
고광순은 8살 때 고경주의 양자로 들어가 의열공 학봉 고인후의 봉사손(奉祀孫)이 되었다. 고인후는 그의 아버지인 충열공 제봉 고경명과 더불어 임란 때 의병을 모아 출전했다가 금산 싸움에서 부자가 함께 순절한 인물이다.

“하물며 신(臣, 고광순)의 선조는 충렬공 고경명과 효열공 종후, 의열공 인후 등 삼부자가 임진왜란 당시 순절하였던 까닭에 세상에서는 충효의 고가(古家)라 부릅니다. … 신은 곧 의열공의 사손(祀孫)입니다.”

뒷날 고광순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대적한 것도 이런 역사적 연원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호남 의병은 왜란이나 호란 당시 의병에 참여한 조상을 둔 경우가 많았다. 고광순·기삼연·양회일·안규홍 등이 그러하다.

자(字)는 서백(瑞伯), 호(號)를 녹천(鹿川)이라 지은 고광순은 글을 익힐 나이가 되자 외할아버지인 황주(黃洲) 김경찬(金京燦)에게서 지도를 받았다[우연히 황주 김경찬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관련 기사 바로가기]. 성격이 강직하여 좀처럼 남을 칭찬할 줄 모르는 외조부였으나 외손자 고광순에게만은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주위 사람들이 이를 보고 주문공(朱文公=朱子)이 황로(黃輅)를 사랑하듯 한다고 빗대어 말하곤 했다[황로는 주희의 외손자이다].

어느 날 이런 일도 있었다. 학동들이 엽전 꾸러미들을 들고 와 셈을 하느라 야단인 중에도 고광순은 꼼짝달싹하지 않고 책만 읽고 있었다. “너는 어찌 달려가서 돈을 계산하지 않느냐?”는 외할아버지의 물음에 고광순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외할아버님께서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돈을 몰라야 선비가 된다고요. 그런데 이제 와서 돈을 헤아리라 하시니 앞뒤가 맞지 않는 교훈이라 감히 받들어 이행하지 못하겠습니다.” 말은 정중했지만 손자가 할아버지를 꾸짖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기특하게 생각하면서도 탄식하며 아쉬워했다. “외손자 4명 가운데 가장 똑똑한 놈을 양자로 빼앗겼구나.”

열다섯 살이 되자 마을 뒤 상월정이란 정자에 올라가 꼬박 10년 동안 문을 닫고 앉아 사서와 육경을 깊이 파고들었다. 글 속에 담긴 은미한 사연과 심오한 뜻을 조목조목 깨우치며, 격물․치지․성의․정심의 공부와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도(道)를 항상 스스로 닦았다.

양모(養母) 허(許)씨는 성격이 몹시 엄하여 작은 잘못에도 화를 내고 꾸짖으며, 때로는 사정없이 회초리로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고광순은 전혀 원망하는 기색 없이 자신의 허물로 돌리며 공경하니 마침내 허씨도 친척들에게 아들 자랑을 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의 효성은 옛날 민자건에게 견주어도 부족할 것이 없네. 나는 노망해서 가끔 무단히 성을 내는데 우리 아이 같은 효성이 아니면 누가 받아주겠나?”
양모 허씨가 세상을 뜨자 고광순은 몸부림치며 애통해 했으며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치상(治喪)을 한 다음 3년 동안 죽과 소찬을 먹으며 지내니 그의 효심을 모두 칭송했다. 10대를 내려온 종가(宗家) 살림이 차츰 기울어져 갔지만 제삿날이면 심력을 다하여 제수를 장만하고, 목욕재계 한 후 엄숙 공경하게 제사를 받들었다.

고광순은 일에 임하고 이치를 논하는데 있어서 정의와 사욕을 분명히 구별하여 확고부동했다. 이에 그를 아는 사람들은 “옛날 진(晋)나라, 초(楚)나라의 부력(富力)과 맹분과 하육[중국 전국시대, 용맹이 뛰어난 이들]의 용맹으로도 어쩔 수가 없다”고 혀를 내두르곤 했다.
이와 같은 강직함은 고광순이 과거를 보러가서도 드러났다. 일찍이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했을 대 당시 집권자 민응식이 그를 보고서 수석을 약속했다. 그러나 관서 지방 사람들이 돈 1백만 냥의 뇌물을 써서 고광순은 결국 낙방했다. 고광순은 민응식을 찾아가 꾸짖었다. “대감이 돈 1백만 냥으로 국사를 희롱하니 참으로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인물이구려. 내 어찌 세도가의 이용물이 되겠는가? 내가 망령이외다.” 하고 옷소매를 떨치고 나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아니했다.

 

2

1895년 8월,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이어 단발령, 의관제도 개정 등이 내려지자 고광순은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에서 그는 “국사를 그르친 큰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빨리 나라를 망치는 왜놈들을 무찔러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통렬히 주장했다. 제천 의병장 의암 유인석의 격문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섰다. 호남에서는 장성의 송사 기우만과 성재 기삼연, 창평의 녹천 고광순과 나주의 이학상 등이 상호 연대를 결의했다. 마침내 1896년 2월 그믐날 광산부 광산관(광주향교)에 집결했다.

기우만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한 이들은 북상할 계획을 세웠으나 때마침 조정으로부터 선유사(宣諭使) 신기선이 내려와 해산을 명했다. 기우만이 황제의 영을 거역할 수 없다 하여 순순히 해산 결정을 내리므로 하는 수 없이 거의(擧義)의 뜻을 꺾고 말았다. [전기 의병은 대체로 근왕(勤王)이 목표였다. 즉 성리학적 도를 지키기 위해 근왕의병을 일으켜 외세를 토벌하고 개화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의병 해산 뒤 고광순은 비분강개하여 국치를 씻고자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다시 의병을 일으킬 생각만 했다.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영․호남 지방 곳곳을 돌며 만나는 사람마다 눈물로 호소했다. “우리가 이처럼 왜놈들에게 수치를 당하고도 가만히 앉아있어야 되겠소?” “지금 비록 우리가 눌려있다 하나 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반드시 토복(討復)할 날이 있을 것이오. 너무 낙심 말고 때를 기다립시다.”

1896년 의병 해산 이후 1906년 다시 의병을 일으킬 때까지 10년을 이런 행각을 하고 다니며 동지를 규합했다. 그가 규합한 동지 가운데 가장 뜻이 잘 통했던 사람의 하나가 집안 할아버지뻘 되는 인봉 고제량이었다. 촌수로는 할아버지였지만 고제량은 고광순보다 한 살 아래였다. 고제량은 어렸을 때부터 기량이 활달하여 병정놀이를 하고 놀 때도 항상 주장이 되어 진(陳)을 벌이거나 대오를 편성하곤 했다.

고제량은 언젠가 고광순에게 이런 말을 농담조로 했다. “왜놈들이 나라를 삼키려고 하는데 그대 같은 유생(儒生)을 장차 어디다 쓴다 말인가?” 고광순의 문약(文弱)을 비웃는 질문이었다. 고광순은 웃으며 대답했다. “서생(書生)의 가슴속에는 저절로 갑병(甲兵)이 들어있는 법이니 공(公) 같은 호기(豪氣)는 다만 한 모퉁이를 담당할 뿐입니다” 호기만 가지고 무슨 일이 될 줄 아느냐는 대답이었다. 농담 속 진담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알고 허락함이 깊었던 것이다.

 

3

1905년 고광순의 나이 57세 때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당시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민영환은 자결로 항거했다. 민영환이 순국하던 날 면암 최익현은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이를 보고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듬해 1906년 봄 최익현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린 후 마침내 호남을 무대로 항일 의병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호남뿐만 아니라 이때부터는 전국 곳곳에서 불길처럼 의병항쟁이 전개되었다.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이 정읍을 거쳐 그 해 4월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광순은 고제량과 함께 달려갔다. 하지만 최익현은 이미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다시 장성의 기우만, 광양의 백낙구를 찾아가 거사할 것을 모의하고 의병을 모아 오고자 떠났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일이 발설되어 기우만과 백낙구가 그만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다행히 체포되지 않은 고광순은 이에 조금도 좌절하거나 실망하기는커녕 분발할 결심이 더욱 굳어만 갔다.

고광순이 토복(討復)할 것을 자나 깨나 잊지 않는다는 소문에 고종은 그해 12월 비밀리에 애통의 밀조(密詔)를 내려 그에게 호남의병대장을 명했다. 12월 11일(양력 1907년 1월 24일) 드디어 고광순은 여러 동지들과 함께 담양군 창평면 저산(猪山)에서 창의의 깃발을 들었다[창평의진]. 이날 모인 총인원은 5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 진용은 주장에 고광순, 부장에 고제량, 선봉장 고광수, 좌익장 고광훈, 우익장 고광채, 참모 고광문·박찬덕, 호군 윤영기, 종사 신덕균·조동규·박병선·김응삼·박주일·조규현·김현섭·이항선 등이었다.

창평 저산 봉우리에 의병기를 세운 고광순은 참모들과 함께 각처에 연락하여 토적격왜(討賊擊倭)의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때마침 남원에서 일어난 양한규 의병장으로부터 요청이 왔다. 합동작전을 해 남원을 치자는 것이었다. 거사일은 10여일 뒤인 그 해 섣달 그믐날로 결정했다. 남원진위대 병정이 휴가를 나가 성안의 병력이 적은 틈을 노렸던 것이다.

양한규는 정예병 1백 명을 뽑았다. 여기에 참봉 유병두가 1일(양력 2월 13일) 새벽닭이 울자 양한규의 지휘로 칼을 빼들고 읍내로 쳐들어갔다. 몇 명이 남아있지 않던 진위대 군사와 순검들은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양한규의 의병진은 큰 싸움 없이 남원성중(南原城中)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장 양한규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다 총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지휘자가 쓰러지니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의병들은 당황했다. 게다가 적측에서는 이쪽의 동정을 살핀 뒤 대열을 재정비하여 반격을 개시해 왔다. 모처럼의 남원 입성도 수포로 돌아가고 의병은 읍을 다시 내어준 채 흩어졌다.

고광순 부대는 이런 줄도 모르고 남원에 이르렀다. 성내 동정을 살피니 의외로 조용했다. 한식경을 기다려도 잠잠했다. 기다리다 못한 고광순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일단 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고광순의 명령에 의병들은 3방면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대며 진격했다. 그러자 저쪽에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반격을 해왔다. 날이 밝기 시작하고 몸을 숨길 곳도 마땅치 않았다. 고광순은 후퇴명령을 내렸다. 안에서 호응하기로 했던 양한규의 군사는 그림자도 안 보이고 명절을 맞아 허술하리라 여겼던 적의 군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가기만 하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남원 포위망을 뚫고 비홍치 고개에 집결한 고광순이 군사를 점검해 보니 큰 피해는 없었다. 음력 설날 산상(山上)에서 작전 회의를 열어 창평 본진 복귀를 결정했다.

창평에 돌아왔으나 적의 감시가 심해 본진(本陣)을 유지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남원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후 서울로부터 적의 병력이 대폭증강 돼 관련자 색출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피하면서 고광순은 군사를 정돈하고 무기를 갖추느라 날마다 뛰어다녔다. 집안일은 아예 잊어버렸다.

 

4

고광순에게는 부인 오씨 사이에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다. 딸은 기산도에게 시집보냈다. 큰아들 재환은 불행히도 말 못하는 벙어리였다. 38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아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어찌 어찌해서 장성의 울산 김씨 집안 처녀와 짝을 지어주긴 했지만 종가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삼기에는 마땅치 않아 동생 고광훈의 아들 재춘을 양자로 맞아들였다.

고광순의 사위, 기산도(奇山度, 1869∼1926)

기산도 또한 한말 의병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기산도의 아버지 기재(奇宰)는 노사 기정진의 학풍을 잇는 행주 기씨 가문의 젊은 선비였다. 당시 호남에서 잘 알려진 유학자이자 장성의병을 이끈 기우만이 기산도의 11촌숙이며, 성재 기삼연은 기산도의 종조부이다.
기산도는 1906년 2월 17일에 동지들과 함께 을사오적 중 한 명인 군부대신 이근택을 자택에서 난자하여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할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또 옥고를 치렀다. 이후 모진 고문에 반신불수가 된 몸을 추스르며 떠돌이로 살다가 1928년 51세로 운명하면서 “유리언걸지사 기산도지묘(流離焉乞之士 奇山度之墓)”란 나무 비 하나만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벙어리 아들 재환은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석양 무렵 아버지 고광순이 옷을 입고 출타할 채비를 하면 재환은 대문 밖에 나와 섰다가 옷소매를 붙잡았다. 재환은 기성을 지르며 손짓 발짓으로 가지 말라는 시늉을 해 댄다.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켜 밤이면 남몰래 나다니는 걸 눈치 챘던 것이다. 아버지 신변이 위험하니 제발 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버지 또한 이를 알아들었다. 그러나 잡은 손길을 뿌리치려 하면 재환은 완강히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버럭 소리를 질러도 막무가내였다. 부여잡은 아들의 팔뚝을 후려쳐도 아들은 울면서 옷소매를 놓지 않는다. 동구 밖까지 끌고 당기는 소동이 벌어진다. 실랑이를 하다 지친 아버지는 아들을 후려치던 작대기로 땅바닥에 글씨를 쓴다.
이번에는 글로 아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면 재환이 슬며시 옷자락을 놓아준다. 그러나 어떤 때는 이런 수법도 통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일단 집으로 들어갔다가 아들이 잠든 연후에 살며시 빠져 나오기도 했다. 부자간의 이런 실랑이는 한 달에도 몇 차례씩 벌어져 이를 보는 동네 사람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위해 집을 나서야하는 육순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효심에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5

고광순 의병 부대는 그해(1907) 3월 13일(양력 4월 25일) 화순읍에 진격했다. 의병들은 일인들이 거주하는 집과 상점 10여 호를 찾아 모두 불 질러 버렸다. 이를 보고 평소 그들에게 시달려 온 관민들이 후련하게 여겼다. 이튿날에는 다시 화순 동복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전날 화순읍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부에서 급히 파견되어 온 관군과 도마치 고개에서 맞붙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의병진은 패하고 군사는 일시 흩어졌다.

동복에서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한 고광순은 다시 흩어진 의병들을 모았다. 훈련과 전술의 미비를 절감하고, 이제부터 유격전을 펴기로 한다. 그 이후부터 고광순 부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유격전을 펴니 왜경은 이에 시달리고 지친 끝에 창평 녹갈재 밑 녹천 본가(고씨 종택)에 불을 질러 버렸다. 아예 고광순 부대의 뿌리를 뽑아버릴 요량이었다. 종가가 불타는걸 보고 때마침 집을 지키던 종형 광윤이 불을 지르는 왜경들에게 달려들어 말렸다. 구두 발에 채이면서도 울면서 호소했다. “다 태워도 좋으니 제발 조상을 모시는 사당만은 남겨주시오.” 이리하여 사당은 탈 없이 보존되었으나 광순의 집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고광순은 본가가 불타고 벙어리 아들 재환이 일군의 칼에 마구 찔리고 가솔이 오갈 데 없이 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그럴수록 더욱 집안과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다시 광주의 신덕균 등 동지를 규합하여 또 한 차례 대규모의 거사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동안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새로운 총기 등을 개량 제조하고 여러 전법을 훈련했다. 이는 대개 고제량의 연구지도로 행해졌다.

고광순은 또 태극기 위에 ‘불원복(不遠復)’이라는 세 글자를 크게 써넣은 불원복기(不遠復旗)를 고안하여 군기로 사용했다. ‘복(復)’은 주역에 나오는 괘이기도 하다. “‘불원복’이란, ‘머잖아 반드시 회복된다’는 것이니 힘껏 싸우자”며 군사들을 고무 격려했다. 이 글자가 쓰인 태극기를 흔들며 고광순이 돌격 명령을 내리면 의병들은 죽기를 다해 싸웠으며, 아침저녁으로 이 국기 겸 군기에 절하면서 국권회복을 염원했다.

주역의 24번째 괘, 지뢰 복(地雷 復)

‘복(復)’은 ‘돌아온다’는 뜻인데, 본래 상태로 회복됨을 의미한다. 복괘는 초효만이 양효이고, 나머지 다섯 효는 모두 음효로 이루어져 있다. 음의 기가 내리덮고 있는 속에 양의 기가 싹트기 시작하여 봄기운이 발동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괘의 형상도 땅속 깊은 곳에 봄기운이 발동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오랫동안의 괴로움도 이제 한순간뿐이다.
내·외괘로 보면 땅 속에서 우뢰가 있는 모습으로 10월 음이 극성한 때를 지나 11월 동지달 하나의 양이 처음 움직이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1년 중에서 가장 추운 동지달, 얼어붙어 있는 땅 아래에 새로운 생명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움직이기 시작하는 양기는 매우 미약함으로 첩첩히 쌓여 있는 음기를 뚫고 성장하는 데에는 많은 고난이 따른다. 그러므로 괘사에서 “복괘는 형통하다. 나가고 들어오는 데에 문제가 없으며 벗들이 와야 허물이 없다.”고 하여 어린 생명에 상처를 주지 말고 동류(同類)들의 도움이 절실함을 말한다.

 

고광순 의병 분대는 능주 양회일, 담양 이항선, 장성 기삼연 의병부대 등과 제휴하여 게릴라 전술로 능주와 동복을 공략하는 등 인근 고을을 넘나들며 기습을 거듭했다. 그러나 훈련받지 못한 비정규군에 빈약한 무기 그리고 부족한 군량 등의 악조건으로는 최신의 무기를 갖춘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기 어려웠다. 또한 관군과 일군들이 의병의 근거지를 겨냥하고 차츰차츰 죄어 들어오는 기미가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광순은 전략을 바꾸어 지난달 영호남을 왕래하며 보아 두었던 지리산의 심산유곡으로 본진을 옮기고 일군을 그곳으로 유인한 계책을 세웠다.

지리산. 전남, 전북, 경남의 3도와 남원, 구례, 하동, 함양, 산청 등 5개 군에 걸쳐 있는 웅대한 이 산이야말로 의병의 본거지로 삼기에 알맞았다. 호남과 영남의 의병진 간에 연락을 도모하기도 편리하였다. 그리하여 고광순은 1907년 8월 4일(음력) 밤 8시, 축문을 지어 월봉산 국수봉을 향하여 천지신명께 고유제를 올렸다. 부대를 다시 정비하여 자신은 도독이 되고, 고제량은 도총, 박성덕은 선봉장, 윤영기·신덕균을 참모라 삼아 이튿날 지리산을 향하여 출발했다. 중간에 ‘꼭 쳐들어갈 곳이 한 군데 있다’는 신덕균의 제의로 동복 분파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후 순천·곡성·광양·구례 등지를 지나면서 그는 격문을 곳곳에 보내 민심을 달래고 백성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의병대열에 자진해서 참가해 온 군사가 1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이 화개동을 거쳐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 당도한 때는 추석을 나흘 앞둔 1907년 8월 11일(음) 오후였다.

지리산 연곡은 남으로 화개와 북으로 문수골을 끼고 있는 골짜기다. 예로부터 화개는 호남에서 영남을 오가는 관문이었다. 특히 마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찾아든 지리산 포수가 많이 살고 있어 전투력 증강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더욱이 문수골은 천연의 요새이니 군사를 머무르고 예기(銳氣)를 기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축예지계(畜銳之計)]. 이 두 곳의 지리를 이용하여 유격전술을 쓴다면 대일항전에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산골짜기가 최후의 장소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연곡사에 본영을 설치한 그는 영남과 호남 각 지방에 격문을 보냈다. 격문을 보고서 의병이 되겠다고 연곡사를 찾아오는 장정이 끊이지 않았다. 군량과 무기를 갖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광순은 부대를 유격전에 편리하도록 소단위로 재편성한 다음 매일같이 훈련을 거듭했다.

어느 날 고광순은 구례 광의면에 사는 매천 황현에게 사람을 비밀리에 보냈다. 격문을 한 장 초(草)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황현은 당시 52세로 우국시인(憂國詩人)이자 유명한 학자였다. 벼슬길도 마다하고 산골에 묻혀 고결하게 책을 벗 삼아 지내는 곧은 성품의 선비였다. 대문장가의 글을 받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심부름 간 사람이 그냥 돌아왔다. 이유를 물었더니 “격(檄) 유무(有無)가 상관없으니 오직 노력만 하면 될 것 아닌가?”하며 써주지 않더라는 것이었다[황현은 사람을 돌려보낸 두 그날 밤 격문을 다 써놓고 이튿날 종일 기다렸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나중에 황현이 쓴 고광순의 약전略傳에 들어있다].

 

6

고광순이 지리산에 들어오기 전 동복 분파소를 습격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전북 순창 우편취급소와 경무고문 분파소를 습격한 의병장이 있었다. 바로 충남 회덕 사람 김동신이다. 김동신은 한 해 전인 1906년 3월 홍주에서 기병한 민종식의 선봉장 노릇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뒤 전북 무주 덕유산과 정읍 내장산, 장성 백양사 등을 전전하며 기우만․고광순 등과 연락을 갖고 군사와 무기를 모았다. 그 후 김동신은 적을 때는 1백 명, 많을 때는 1천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지리산을 근거로 삼아 유격전을 벌여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었다.

그 김동신이 영남지방을 무대로 싸우다가 세가 불리하자 후퇴하여 구례군 토지면 문수골에 있는 문수암에 들어왔다. 적은 끝까지 김동신을 추격하여 문수암까지 이르렀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김동신이 자취를 감춘 뒤라 화가 나 암자를 불태워버렸다.

문수암을 잿더미로 만든 왜병은 화개동으로 내려와 그 곳에 주둔했다. 화개에 아예 진을 치고 앉아 지리산을 본거지로 한 의병활동을 봉쇄할 작정으로 나섰다. 화개는 연곡사에서 그리 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연곡사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이었다. 만약 화개가 일군의 손아귀에 넘어가면 영남 의병들과의 연락이 끊어져 영호남 양쪽 의병진이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고광순은 9월 9일 새벽에 군사들을 보내 적진을 급습했다. 적 2명에게 중상을 입히고는 상당량의 무기를 노획하여 돌아오니 군사들의 사기가 충천했다.

고광순은 적들이 9일의 기습에 보복하고자 병력을 크게 보강하여 화개동을 기지로 삼아 반드시 연곡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고 판단하여, 미리 선제공격으로 군사들을 두 갈래로 나눠 내려 보냈다. 고광수의 일진은 화개동 어구에, 윤영기의 일진은 연곡사 뒤쪽 상치재에 매복하고 있다고 적이 연곡으로 들어오면 한꺼번에 적의 앞뒤를 공격한다는 작전이었다. 이렇게 군사를 보내고 나니 막상 본진인 연곡사에는 주장 고광순과 부장 고제량, 그리고 10여 명 남짓한 부하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왜병들은 화개에 집결하지 않고 쌍계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적은 곳곳에서 의병들의 습격을 받자 대대적인 섬멸작전을 펼쳤다. 광주 주둔군 기노 중대와 오카사키 경찰대, 그리고 진해 주둔 중포대대의 도코로 소대까지 징발, 의병의 본거지인 연곡사를 공격 목표로 하여 쌍계사에 집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불길한 징조가 거듭 나타났다. 낮에 구렁이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고, 여우가 밤새 연곡사 앞 뒷산을 돌아다니며 전에 없이 울어댔다.

9월 10일. 여우가 연곡사 주위를 맴돌며 슬피 울던 그 시각에 적은 쌍계사를 출발하여 곧장 가파른 계곡을 타고 밀물처럼 기어올랐다. 9월 11일 새벽 6시 무렵 적은 연곡사를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7

희끄무레 날이 밝아 왔다. 초병으로부터 연곡사가 적에게 완전 포위되었다는 보고가 왔다. 고광순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 일순간 어젯밤의 여우 울음소리와 구렁이가 떨어져 죽던 일이 생각났다. 그제야 아군과 적의 진격로가 엇갈렸음을 깨닫고, 마침내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적 소대장이 쏜 권총 1발을 신호로 적은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사찰은 화약 냄새가 가득했다. 의병들도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군사 10여명이 쏘아대는 총소리는 적의 집중포화에 묻혀버렸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잠시 총소리가 그쳤다. 이어서 항복을 권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광순은 “의를 위하여 목숨을 던지는 것은 큰 종기에 침질 한 번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던 평소의 신념을 행동으로 보일 때가 온 것을 직감했다. 잠시 감았던 눈을 뜨고는 부하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고 난 뒤 무겁게 입을 떼었다.

“지금 이 병력으로는 적과 싸워 승산이 없으나, 나는 이미 나라를 위하여 한 몸 바치기로 한 사람이니 적탄에 맞아 죽으려니와, 인봉은 군사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 뒷날을 도모하라. 특히 광훈은 네가 맡은 각종 군부(軍簿)들이 절대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군령이다.”

고광순은 말을 마치자마자 총을 들고 뛰쳐나가 적을 향해 소리쳤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 네 놈들은 우리 국가의 원수요. 내 집안의 원수다. 살아서 너희 나라를 없애지 못했으니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네 놈들을 씨(種子) 없이 죽이고 말겠다.”

고광순은 동백나무 등걸에 기대서서 적을 겨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10여명의 의병들도 각자 흩어져 왜병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적은 30여분 동안이나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고광순과 부하 10여 명은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1907년 9월 11일(양력 10월 11일) 오전 7시께였다.

고광순을 비롯한 의병들이 모두 쓰러지자 왜병들은 연곡사를 완전히 불태워 없애버렸다[연곡사는 임란 때 한 번 불타고, 이때 또 불탔다. 정말 깊은 악연이다]. 의병이 은신할 거처를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해서였다. 불길은 때마침 불어오는 동풍을 타고 인근 숲까지 번져 고광순․고제량의 시신마저 화염에 휩싸일 지경이었다. 이를 보고 절 부근에 사는 임준홍이란 농부가 왜병의 눈을 피해 두 사람의 시체를 승려들이 가꾸던 채소밭에 옮겨 솔가지로 덮어놓았다. 한편 형 광순으로부터 마지막 당부를 받은 광훈은 의병들의 이름이 나열된 부대 편성 서류를 들고 절 뒷산으로 빠져나가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나흘 뒤인 9월 15일 고광훈이 상포(喪布)를 준비해 솔가지로 덮어둔 고광순․고제량의 시체를 거두어 절 부근 땅에 임시로 묻고 봉분을 만들었다. 이미 숨졌는데도 그들은 성난 눈을 부릅뜬 채로 있었다. 고광훈은 손바닥으로 두 사람의 부릅뜬 눈꺼풀을 쓸어내려 감겨주며 오열을 삼켰다.

다음 날 매천 황현과 박태현이 와서 고광순의 무덤에 곡한 다음 삯꾼을 사서 흙을 더 얹어 봉분을 다듬었다. 그리고 시 한 수를 지었다. 우국시인 황매천이 무덤 곁에서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들국화를 바라보며 지은 칠언시(七言詩)는 다음과 같다.

千峯燕谷鬱蒼蒼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 울창하기 그지없네.
小刦虫沙也國殤  나라 위한 한평생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戰馬散從禾壟臥  전장의 말들은 흩어져 논두렁에 누웠고
神烏齊下樹陰翔  까마귀 떼만이 나무그늘에 날아와 앉아 있네.
我曹文字終安用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 것인가
名祖家聲不可當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네.
獨向西風彈熱淚  홀로 서쪽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新墳突兀菊花傍  새 무덤 옆에 국화향기 뿜어 올리네.

 

8

고광순이 연곡사에 본부를 정하고 왜적과 대항하게 된 뒤부터 구례에서 하동에 이르는 백리 길의 연도 주막 집 여인들은 밤마다 분향하며 의병군 승리를 기원해왔다. 그런 백성들인지라 고광순이 패전하고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자 골목마다 곡성이 연일 그치지 않았다.

부녀자들은 자기 집에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비통에 싸여 울부짖었다. 이듬해인 1908년 4월, 따스한 봄날을 골라 고광순의 종형 광윤과 고제량의 아들 용주가 연곡사로 가서 무덤을 창평(고광순)과 화순(고제량)으로 각각 옮겼다. 영구가 연곡을 출발하여 구례․곡성 등지를 거쳐 장지에 이를 때까지 고을마다 백성들이 나와 길가에 늘어서서 탄식하고 눈물을 뿌리는가 하면 향화(香花)를 아낌없이 바치는 통에 몇 발짝 못 가서 길이 막히곤 했다. 만장과 제문이 수 없이 밀려들었다. 이로 인해 상여꾼들은 정해진 상행(喪行) 시각을 맞추느라 진땀을 흘렸다고 한다.

고광순의 부인 오씨는 남편이 순절한 다음해에 세상을 떠나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고향 뒷산에 나란히 묻혔다. 광순의 무덤 바로 위에는 임란 때 금산 싸움에서 의병으로 순절한 의열공 고인후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유천리에는 고광순을 기리는 사당 포의사가 자리하고 있다.

고광순. 그는 충의 하나만을 믿고 창과 칼을 베개 삼아 10여 년 간 풍찬노숙하기를 하루 같이 여겼다.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데도 지주(砥柱)처럼 우뚝 서서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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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文, 人問, 人聞... 허생처럼 책읽기!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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