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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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김정희(고전공부모임 회원)

얼마 전 일이다. 새로 바꾼 냉장고의 냉장실에 둔 음식들이 살포시 얼기 시작했다. 몇 번의 점검과 수리를 받았지만 아무리 온도를 높여도 고쳐지지 않았다.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에이에스를 받는다는 것은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남 앞에서 냉장고에 있는 물건을 모두 꺼내는 것은 내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처럼 달갑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고장 수리 받는 것을 거부하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던 중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를 하는 김에 냉장고를 제대로 고치고 싶어 서비스센터 직원과 통화를 했다. 다시 두 번의 수리 후 처음부터 고장 난 물건이었으니 교환을 요구했지만 일 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막무가내였다. 내가 그렇게 얘기를 해도 불가능하던 일이 남편이 나서자 쉽게 풀렸다. 논리를 내세울 것도 없이 몇 마디 말로 해결된 것이다. 나의 존재는 뭐란 말인가. 뿌리 깊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자의 말은 무시당하기 일쑤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자라는 이유로 집안 어른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늦은 밤 오랜 산고 끝에 나를 낳고 시간을 물었으나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내 위로 오빠가 있는데도 집안 어른들은 또 아들 낳기만을 원하셨던 것이다. 어머니의 짐작으로 자시에 태어난 나는 호적에 기입된 생일보다 하루 늦게 생일을 쇠다가 다시 원래의 날로 되돌린 적도 있었다.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은 모두 나를 귀여워해 주셔서 나는 이런 사실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대학 입시 때도 뼈저리게 남녀차별을 느꼈다. 원서를 쓰려고 하니 아버지는 강경하게 딸은 객지에 내보낼 수 없다고 하셨다. 고3 내내 밤늦은 시간에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렸다 무거운 가방을 들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빠와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절망감으로 한동안 나는 입에 빗장을 지르고 지냈다.

결혼을 할 때도 당당하게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나보다 먼저 결혼한 동기들의 이야기가 망설임 없이 사표를 내는데 한 몫을 했다. 결혼을 하고도 계속 근무를 하겠다고 하니 가여운 시선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 남편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는 것이다. 사기업처럼 압력이 있었던 것도 아닌 공무원 신분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때는 결혼하면 그만둔다는 각서를 쓰고 사립학교에 들어간 친구들도 있었다.

결혼을 하자 남편은 나의 전지전능한 보호자처럼 군림하려 들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하지 말아라하며 애들이나 잘 키우라고 했다. 결혼 후에도 여성이라는 굴레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종손으로 자란 남편의 권위 의식에 내 의견은 묵살 당하기 십상이었다.

병약한 탓에 어머니의 애지중지한 보살핌 속에서 자란 나는 여자라서 특별히 차별당한 일은 없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일상생활 속에서 수없는 차별을 당하고도 인습에 굳어진 내 머리는 으레 그러려니 하며 아무런 의식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가부장적 속성에 길들여져 살아가고 있다. 그 고정관념 때문에 남녀차별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나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차별을 당해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지나친다. 실생활에서 남녀차별을 겪으면서도 분노할 줄 모르는 내 자신이 더 문제다. 마치 아Q가 정신 승리법으로 모멸을 이겨내듯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니 여성이라는 존재의 억눌린 삶에 대해 진심으로 아파해 본적도 없다. 견고하고 질긴 남성 중심 사회가 성채처럼 버티고 서있지만 가부장적 인습과 편견에 젖어 그 실체를 파악하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여성들이 더 많이 교육 받고, 폭 넓은 사회진출을 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평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여성들이 살고 있는 사회 조건이 외형만이 아니라 내면까지, 정말 많이 달라졌는지 생각해 볼 때다.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려면 여전사 아마조네스는 아니더라도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최소한 자신의 권리를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암암리에 도사리고 있는 여성차별에 당당히 저항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동고송
안녕하세요. 사단법인 인문연구원의 웹진 동고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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