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평전 후기] «이현상 평전» 뒷이야기 (2)
*«이현상 평전» 뒷이야기 첫 번째편과 함께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신화가 된 사람, 이현상”(바로가기)]
«이현상 평전»이 출간되고 나니 출판사로 수십 통의 항의 전화가 쏟아졌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빨치산 두목을 기리는 책을 냈다며 출판사를 불태우겠다느니 등등 온갖 협박이 쏟아졌다. 다행히 내게 직접 협박 전화하는 일은 없었지만 출판사는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만일 내게 항의전화가 왔다면 나는 화내고 싸우기는커녕 그 사람들 편에서 위로를 해주었을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사상도 전쟁을 일으켜 사람을 죽일 만큼 위대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일파가 어떻고 미군정이 어떠니 하는 수천가지 이유를 들이댄다 해도 무장폭동과 전쟁을 일으킬 이유는 되지 못하다고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단언할 수 있다.
이현상 자신은 반란을 일으킨 적도 없고, 전쟁을 일으킨 적도 없고, 단 한 명의 사람도 직접 죽인 적이 없지만, 반란과 전쟁을 일으킨 편에 서서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건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죽은 이들의 후손들이 이현상을 기리는 작가에게 화를 낸다면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를 했을 것이다.
정작 항의 전화를 해온 것은 엉뚱한 사람이었다. 평전에서 매우 좋은 인물로 그려놓은 토벌대 연대장 차일혁의 아들 차길진씨가 직원을 통해 연락해온 것이다.
평전에는 차일혁의 수기를 여러 군데 인용했는데, 이현상부대가 전남북 도당의 부대들과 달리 민간인은 물론이요 자기 대원을 절대 죽이지 않고, 잡은 토벌대원들이며 미군들까지 살려서 차비까지 주어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이현상이 사망한 후 차일혁이 그 시신을 섬진강변에서 화장하며 조총까지 쏘는 예를 갖춘 이야기도 있었다.
문제는 에필로그 부분이었다. 차일혁은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되어 금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외아들 차길진은 이 일의 충격 때문인지 무당기가 들어 영매가 되었고 그 세계에서는 아주 유명해져서 미국을 순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에 이민해 살았던 나의 후배 하나가 미국에서 차길진씨가 자기 아버지가 일찍 죽은 것은 사람을 많이 죽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간접 증언만을 믿고 에필로그에 그대로 써버렸다.
직원을 통해 전달되어 온 차길진 씨의 말인즉, 자기는 그런 연설을 한 적이 없는데 마치 수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처럼 묘사해놨으니 서점에 깔린 책을 모두 회수시키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이와 비슷한 재판으로 10만 달러를 청구한 적도 있다고 했다.
차길진 씨의 강연회에 가본 적도 없는 후배의 간접 증언만 듣고 그대로 써버렸으니 낭패였다. 더구나 후배에게 확인해 보니 자기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단다. 하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다보니 다른 데서 들었거나, 아니면 내가 뭔가 스스로의 기억을 왜곡했음이 분명했다. 사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차길진씨의 법당은 서울 강동구의 깨끗한 주택가에 있었다. 책을 모두 수거해 폐기하고 10만 달러를 줘야 한다니, 지옥문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차길진 씨는 환하게 웃으며 너무나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었다. 이현상과 자기 아버지를 좋게 써줘서 고맙다고, 꼭 오도록 하려고 직원이 겁을 좀 준거라면서 안심부터 시키는 것이었다.
사연이 없던 건 아니었다. 차일혁 연대장은 식민지시대 말기에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들어가 대일전에 참전한 적이 있어 사회주의계열 운동가들에게 온정적인 사람이었다.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준 일 말고도 체포한 빨치산들을 죽이지 않고 전향시켜 수십 명씩이나 자기 집에서 먹여 살린 사람이었다.
그런데 같이 살던 빨치산 몇이 북한과 내통하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의 모든 행위들이 감사 대상이 되었고 몇 차례나 특무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부하들과 함께 금강으로 야유회를 갔던 그날은 수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들과 나란히 바위 위에 앉아 있던 차일혁은 아무 말 없이 물속에 뛰어들었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다음날 금강 하류에서 발견되었다.
이현상이 그랬던 것처럼, 차일혁은 참혹한 전쟁의 와중에도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 사람이었다. 평전의 다른 줄거리는 틀리지 않았으나 차일혁이 사람을 많이 죽여서 급사했다는 말은 매우 부적당했다.
그날, 차길진 씨는 잘 아는 중앙일보 기자와 직접 통화해서 담배갑 크기의 정정보도 광고를 하기로 했다. 광고비도 본인이 내고 문안도 본인이 써서 며칠 후 작은 광고가 나갔다. 아마도 내 이름이 조선, 동아, 중앙일보 지면에 실린 최초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지금까지 30권의 책을 썼지만, 내가 기억하기로 조중동은 한 번도 소개 기사를 실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차길진와의 좋은 인연은 그뒤로 꽤 오래 이어졌다. 만날 때마다 진귀한 과일을 잔뜩 챙겨주고, 건강과 건필을 축복해주던 마음씨가 지금도 고맙다. 여러 해 전에 큰 병을 앓아서 거동이 어려워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가 뵙지 못한 게 미안스럽다.
아, 말하다보니 생각난다.
차길진 씨는 자신의 아버지 차일혁 연대장의 일대기를 내게 써달라고 부탁해 왔다. 경찰 이야기를 쓴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차일혁은 써주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수락했다. 그런데 경찰관계자들이 차일혁 전기를 안재성이 쓰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난리가 났다. 경찰의 상징과도 같이 추앙되고 있는 차일혁을 좌익작가가 쓰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친구들이며 중요한 신도들이 온통 경찰이다 보니 차길진 씨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미안했던 차길진 씨는 얼마 후, 아버지의 동지였던 항일운동가에 대해 써달라고 부탁해왔다. 중국 시절을 함께 했던 동지로, 경찰과는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써도 될 것 같았다. 유족대신 차길진씨가 챙겨주는 대로 취재비까지 넉넉히 받아서 생존한 부인을 만나 몇 시간이나 녹음을 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집에서도 난리가 났다. 그 아들이 전화를 걸어왔는데, 다짜고짜 절대로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써서는 안 되며 어디든 쓰면 고소를 하겠노라고 요란하게 협박을 하고 끊는 것이었다. 설명을 일체 하지 않으니 이유는 모르겠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차길진 씨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그냥 웃고 마는 것이었다. 덕분에 취재비만 챙겼으니 나야 손해 본 건 없었다. 써주기로 한 인물과 동지들이 중국에서 한 일이라고는 밀정으로 의심되는 조선인 몇 명을 살해한 것뿐이니, 그런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는 게 싫었나보다 짐작할 뿐이다.
사실 출판사 또는 유족들이 전기를 써달라고 부탁해온 인물은 많다. 큰 인물만 보아도 박정희, 김일성, 조봉암, 이승엽부터 최근의 김원봉과 노회찬까지, 사적인 인물들의 전기까지 부탁을 다 들어주었다면 20권은 더 써야 했을 것이다. 그중 돈을 싸들고 온다 해도 절대 안 써줄 인물은 절대 권력을 누린 박정희와 김일성뿐, 다른 이들은 하나같이 꼭 써주고 싶은 분들이었지만 평전이란 게 한두 달 만에 쓸 수 있는 게 아니다보니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지금 대충 세어보니 앞으로 쓰기로 혹은 써주기로 한 책이 무려 7권이다. 목록을 벽에 붙여놓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중압감으로 머리가 터져 버릴 테니 말이다. 하나같이 돈하고는 관계없는, 7권을 다 쓴다 해도 생활에 거의 보탬이 안 되는 책들이니 서두르지도 말고 머리에 담아두지도 말고, 되는대로 쓰다가 죽지 뭘… 이런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