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2- 플라톤,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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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영혼

 

인간이 추구할 만한 가치는 무엇인가?

플라톤의 철학은 영혼의 정화를 지향한다. 그 정화의 수단이 곧 철학이다. 정화의 최종 목표는 신의 곁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알고 보니 플라톤에게 중요한 것은 영혼의 불멸이 아니었다. 플라톤에게 중요한 것은 영혼이 신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파이드로스』에서 플라톤은 철학자의 경우 세 번의 윤회를 겪은 후 신의 나라로 가게 된다는 신화를 기술하였다.

플라톤의 신은 인간이 자신의 혼을 정화함으로써 다가갈 수 있는 신이다. 플라톤에게는 신적 실재와 결합하기 위해 철학이 있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스승 디오티마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에로스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자는 젊을 때 아름다운 몸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아름다운 몸에서부터 아름다운 행실로, 그리고 행실에서부터 아름다운 배움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배움에서 마침내 저 아름다운 것 자체에 대한 배움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그는 아름다움 바로 그것 자체를 알게 됩니다. 친애하는 소크라테스, 살 가치가 있는 삶은 아름다움 자체를 바라보면서 사는 것일 겁니다.”

아름다움 그 자체를 아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철학자는 불멸성의 영역 안으로, 신들이 늘 거주하는 곳으로 들어선다고 한다. 철학이란 불멸의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신들의 거처로 들어선다는 디오티마의 이 언급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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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에게 있어서 삶은 비극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이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하루살이에 불과한 인간이지만 죽는 날까지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생겼다. ‘인간은 일종의 신의 장난감’(법, 803c)이었다. 인간은 하루살이와 다름없는 비천한 존재였고, 그날그날 신들이 이끄는 대로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플라톤은 달랐다. 인간의 혼(psyche)에서 하루살이 이상의 것을 찾아냈다. “철학적 품성이야말로 진실로 신적인 것”(국, 497b)이며 “철학자들은 신적인 것과 가까이 지내므로 신적인 인간이 될 것”(국, 500d)이라는 희망을 플라톤은 품었다.

인간은 왜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가? 이 물음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국가』를 쓰게 한 시초의 물음이었다. 플라톤의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이 올바른 삶을 추구해야 하는 까닭은 올바름이 신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젊어서 시를 쓰고자 했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만나고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시를 불태웠다. 하루살이에 불과한 이 인간에게 과연 삶을 걸고 추구할 가치가 있었던가?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만나 인간의 실체는 몸이 아니라 영혼임을 배운다.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으니, 살아서 인간이 추구할 것은 몸의 즐거움이 아니라 영혼의 돌봄이다.

플라톤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철학자의 영혼은 신의 곁에 다가설 수 있다. 절망의 존재에게 구원의 빛이 나타나는 순간이다. 플라톤의 표현 그대로 고심할 가치가 없는 인생이지만, 한 가지 고심할 가치가 있는 일이 생긴 것이다.

델포이 신전의 기둥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금언은 ‘너의 영혼을 보살피라’는 말이었다. 너의 영혼이 늘 아름답고 올바르고 좋은 영혼이 되도록 보살피다 보면, 언젠가 아름다움 그 자체, 올바름 그 자체, 좋음 그 자체가 되리라.

우리는 기독교를 통해 서양의 유일신을 접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세계사에 의하면 서구 문명은 기독교(Hebraism)와 그리스문명(Hellenism)이라는 두 기둥 위에 구축된 집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공부를 해 보니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의 전통 위에서 발전한 종교였다. 기독교의 신은 물론 유대교의 여호와 하나님이지만, 기독교의 영혼과 도덕주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만든 철학의 연장에 있다.

 

 

 

황광우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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