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유성룡,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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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일을 징계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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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징비록》

 

요직을 두루 거친 정치가

이순신의 자는 여해이며 본관은 덕수다. …… 이순신은 활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했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문관이었는데, 이순신은 무과에 올라 권지훈련원봉사에 임명되었다. 그때 병조판서 김귀영이 서출인 자기 딸을 이순신에게 첩으로 주려 했으나 이순신이 거절했다. 다른 사람이 그 까닭을 물자 이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처음 벼슬길에 올랐는데 어찌 권세 있는 집안에 의지하여 승진하기를 원하겠는가?” …… 이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정했으며 항상 몸과 마음을 닦아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담력과 용기가 뛰어났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 또한 평소 자신의 뜻을 드러낸 것이었다. …… 이순신은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운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의 이력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순신이 가진 백 가지 경륜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죽어 몹시 애석하다고 했다. 유성룡과 이순신은 돈독한 관계였다. 임진왜란 중에도 두 사람은 편지를 보내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유성룡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여러 차례 기록해놓았다.

유성룡은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유학 서적을 가까이 했고 스물한 살 때는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스물다섯 살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요직을 거쳤다. 그리고 경상감사, 예조판서, 형조판서, 대제학,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내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다. 좌의정 시절에는 인재를 천거하라는 임금의 명령에 따라 정읍 현감이던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형조 정랑이던 권율을 의주 목사로 천거했다.

그러나 유성룡은 당파 싸움에 휩싸여 파란 많은 관직 생활을 하기도 했다. 유성룡은 이황의 제자로서 동인의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당파 싸움의 향방에 따라 유성룡의 관직이 부침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은 선조 임금과 함께 평양으로 피난을 떠났다. 명나라에서 구원병이 왔을 때는 명나라 장군 접대와 군량 조달의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명나라 장군 이여송과 함께 전략을 숙의하여 평양성 탈환에 성공하기도 했다. 유성룡은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온 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유성룡은 주로 군부대의 정비와 훈련 등 일본의 재침략에 대비하는 일을 했다. 일본이 재차 침략하자 유성룡은 도체찰사가 되어 수도 방위를 위하여 경기 지방을 순회하면서 군대를 독려했고 울산 전투에 출정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유성룡은 당쟁에 휘말렸고 관직에서 쫓겨나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갔다. 그후 복권되었지만 벼슬을 사양하고 저술 활동과 인재 양성에 몰두했다. 이때 쓴 책이 《징비록》이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죽은 후인 1633년에 아들 진이 《서애집》을 발간하면서 그 속에 포함시켜 간행했다.

 

임진, 정유왜란 7년을 기록하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연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로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 문학으로도 가치가 있다. 유성룡이 이 책을 지은 이유는 ‘자서(自序)’에 잘 나타나 있다.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란 뒤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에 간혹 임진란 이전의 일까지 섞여 있는 것은 임진란의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생각하면 임진왜란이야말로 참담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10여 일 동안 세 도읍(한양, 개성, 평양)이 함락되었고 온 나라가 모두 무너졌다. 이로 인해 임금은 마침내 파천까지 해야 했다. 그러고도 오늘날이 있다는 것은 진정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니라고 누가 말하겠는가? 바꿔 생각하면 임진왜란을 극복한 일은 조종의 어지신 은덕이 넓게 우리 백성에게 미쳤던 것이기도 하다.

백성이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치지 않았고, 또 임금의 사대하는 마음이 명나라 황제를 감동시켰다. 그래서 중국은 몇 번이나 구원군을 보냈던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필경 나라가 위태로웠을 것이다. 《시경》에 이런 말이 있다. “내 지나간 일을 징계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노라.” 이것이 내가 이 《징비록》을 쓴 이유라 하겠다.

《징비록》은 크게 1권과 2권 그리고 잡기로 구성되어 있다. 1권에는 임진왜란의 배경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지, 두 사신인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 이순신의 수군절도사 발탁, 임진왜란 발발, 피난길에 오른 선조 임금과 쉽게 함락된 한양, 포로가 된 두 왕자(임해군과 순화군), 명나라 구원병, 이순신의 거북선과 승전보, 의병 궐기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2권에는 평양성 탈환, 한양 수복과 진주성 함락, 정유재란, 모함받은 이순신과 패전한 원균,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죽음 등이 실려 있다.

《징비록》의 몇 대목을 살펴보자.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로부터 17일 만에 선조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그때의 상황을 유성룡은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4월 30일 새벽, 임금께서 서쪽을 향해 출발하셨다.

(신립이 충주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곧 성 안이 떠들썩했다. 조정에서도 초저녁에 재상들을 불러 피란을 의논했다. …… 대신들이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잠시 평양으로 가시도록 하옵소서. 그런 다음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후일을 도모하십시오.” 그때 권협이 임금 뵙기를 청하더니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말했다. “바라옵건대 한양을 반드시 지키십시오.” 말이 끝났을 때 내가 말했다. “아무리 위급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군신간의 예의를 지키시오. 할 말이 있으면 물러가 장계를 올리시오.” 그러나 권협은 막무가내였다. “좌상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줄 몰랐습니다. 한양을 버리는 일이 정녕 옳은 일입니까?” …… 대신들은 궐문 밖에 나와 임금의 명령을 기다렸다. 잠시 후 명령이 떨어졌다. …… 조영선과 신덕린을 포함한 10여 명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한양을 버려서는 아니되옵니다.” …… 임금의 가마가 대궐을 빠져나갔다. 궁중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달아나느라 어둠 속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혔다. …… 경복궁 앞을 지나갈 무렵 길 양쪽에서 백성들의 통곡 소리가 요란했다. …… 돈의문을 지나 사현 고개에 닿을 무렵 동이 트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성 안을 바라보니 남대문 안의 커다란 창고에 불이 나서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 마산역을 지날 무렵 밭에서 일하던 사람이 일행을 바라보더니 통곡하며 말했다.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시면 우리는 누굴 믿고 살아간단 말입니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1597년 2월 26일 정유재란이 한창일 무렵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체포되었다. 그때의 상황을 유성룡은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하옥시켰다.

그 무렵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수하 병사인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에 출입시키면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때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공격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요시라는 몰래 김응서를 찾아왔다. “며칠 후 가토가 바다를 건너올 예정입니다. 수전에 뛰어난 조선 군사가 나서면 반드시 이를 격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응서는 이 내용을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도 이 내용을 믿었다. 윤근수는 기회가 왔다면서 계속 임금께 보고 드리고 이순신에게도 빨리 전진할 것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계략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고민하면서 주저했다. 그러자 요시다가 다시 찾아왔다. “가토가 이미 상륙했소이다. 왜 가토를 치지 않는 것입니까?”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모두 나서서 이순신의 잘못을 지적했다. 대간은 이순신을 잡아 국문할 것을 요청했고 현풍에 사는 박성이란 자는 이순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의금부 도사를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게 했다. 임금께서는 남이신을 한산도에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하도록 했다. 남이신이 전라도 땅에 닿자 병사와 백성들이 모두 나와 길을 막으며 이순신이 무고하게 잡혀갔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남이신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대신들이 그의 죄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때 정탁이 홀로 이순신을 변호했다. …… 조정에서는 한 차례 고문한 다음 사형을 감형하고 삭탈관직만 시켰다. 이순신의 노모는 아산에 살았는데 아들이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옥에서 나온 이순신은 아산을 지나는 길에 상복을 입고 권율 휘하에 들어가 백의종군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안타깝게 생각했다.

유성룡은 이순신이 백의종군한 이후부터 노량해전에서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세세히 기록했다. 이순신이 적의 총탄을 맞자 주위 사람들이 이순신을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옮겼다. 그때 이순신은 “지금은 싸움이 급한 상태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지금도 유명한 이순신의 마지막 한마디는 유성룡의 기록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징비록>
유성룡은 선조 대에 활약한 문신으로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병조판서, 영의정 등의 직책에 있으면서 도체찰사를 겸임하여 군사를 총지휘했다. 《징비록》은 왜란 과정의 수기(手記)와 왕에게 올린 글 및 각종 문서를 모은 것이다. 전란 전의 대일 관계, 전쟁의 진행 상황, 향후의 대비책 등을 포괄적으로 개진하고 있어서 그의 문집인 《서애집(西厓集)》과 함께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자료다. -이태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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