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만이 실패할 수 있다
_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배움에는 왕도가 없다
나는 당신과 함께 이 시대를 살고 있음을 신에게 감사드립니다. 나의 자식 알렉산드로스를 당신의 학원에 입학시키고자 하니, 나의 자식이 마케도니아 왕국을 계승할 만한 인간이 되도록 교육시켜주실 것을 염원합니다.
기원전 343년 어느 날,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신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쳐달라는 내용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훗날 인도 북부까지 영토를 넓혔던 ‘정복왕’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이렇게 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자 시절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7년 동안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쳤다. 그때 나온 유명한 말이 “배움에는 왕도가 없다”는 것이다. 쉽게 배울 방법이 없느냐는 알렉산드로스의 물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이었다. 배움의 길에는 왕도, 즉 왕의 길이 따로 없다. 배움의 길은 똑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열정적으로 공부한 사람이었다. 열여덟 살 때 플라톤이 세운 학원인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가 20년 동안 공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에서 공부하는 것에 만족했고, 특히 스승인 플라톤을 존경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높이 평가하여 ‘학원의 두뇌’, ‘학원의 정신’이라고 칭찬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견해에 항상 동의했던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인 라파엘로(Sanzio Raffaello)는 <아테네 학당>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을 담았다. 그림을 보면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철학적 차이였다. 플라톤은 현실 바깥에 있는 ‘이데아’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 안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이 죽자 아카데메이아를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메이아 다음으로 아테네에서 유명한 학원인 ‘리케이온’을 세웠다. 리케이온은 옛날 소크라테스도 즐겨 찾던 숲이 있는 지역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숲길을 걸으며 철학을 이야기했고, 제자들은 스승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가까이 붙어서 스승과 함께 걸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는 ‘소요학파(한가로이 걸어 다니는 학파)’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광범위하게 자료를 모으고 조사를 하여 글을 썼다. 대표작인 《정치학(Politika)》을 쓰기 위해 그리스에 있는 158개 도시국가를 조사하여 자료를 모았다. 《정치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리케이온에서 제자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정치학》의 주제는 바람직한 도시국가다.
가장 단순한 공동체, 가족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가족에 대해 말한다. 가족은 국가 구성의 최소 단위다. 가족 관계에는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있다. 이는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주인이 노예를 지배하는 관계다. 아이들은 이성적으로, 정신적으로 아직 미성숙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지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노예는 주인보다 정신적인 능력이 떨어진다. 노예는 생산적인 일, 육체적인 일에는 적당하지만 판단을 내리는 일에는 적당하지 않다. 따라서 노예는 주인에게 지배를 받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의 옹호자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노예는 그리스 민족이 아니라 이민족이어야 한다. 이민족은 천성적으로 복종하는 경향이 있고 정신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산 문제도 다룬다. 재산은 가정 운영에 이용되는 도구다. 특히 노예는 재산 중에서 가장 유용하다. 재산을 획득하는 방법에는 ‘자연적인 획득’과 ‘비자연적인 획득’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리대금업과 같은 비자연적인 획득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것으로 얻는 이득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주장한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플라톤은 국가를 통치하는 집단들의 경우 재산과 부인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산을 공유하면 게으른 자와 부지런한 자가 공동으로 혜택을 보게 되어 불만이 생긴다는 점, 그리고 재산을 가진 자가 베푸는 즐거움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들어 플라톤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재산을 소유하되, 이용은 공동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재산의 소유는 도시국가의 정치와 관련해서도 중요하다. 재산은 사람들에게 여유를 만들어준다. 재산이 없으면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 정치적인 주제를 연구하고 고민할 시간이 없다. 그러면 현명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올바른 정치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재산이 있어야 한다.
이상적 국가, 현실적 국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족을 다룬 다음 국가에 대한 검토로 넘어간다. 어떤 국가형태가 바람직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치 형태를 ‘이상적 통치 형태’와 ‘실제적 통치 형태’로 나눈다. 이렇게 나눈 이유는 플라톤의 ‘이데아 국가’처럼 이상적인 통치 형태만 다루면 현실적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치 형태를 왕정, 귀족정, 과두정, 법치적 민주정, 민주정, 폭군 정치 등 여섯 가지로 나눴다. 왕정은 거의 신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한 ‘철인 왕’이 통치하는 경우이고, 폭군 정치는 대중 선동가가 선동을 통해 왕이 되어 자기 자신을 위한 통치를 하는 경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두 가지의 통치 형태를 양극단으로 하여 다른 통치 형태를 나열했다. 귀족정은 업적이나 공적이 있고, 자질도 뛰어난 사람들이 통치하는 형태다. 이에 반해 과두정은 엄청난 부(富)를 가진 소수가 통치하는 형태다. 법치적 민주정은 일종의 혼합 정치로 법률을 염두에 두면서 국가 구성원 전체를 위해 통치하는 형태다. 민주정은 가난한 사람들이 다수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통치하는 형태다. 이에 반해 법치적 민주정은 다수가 통치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부자들도 위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이상적인 통치 형태는 왕정과 귀족정이라고 했다. 반면 폭군 정치와 민주정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폭군 정치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므로 최악의 통치 형태이고 민주정은 평등을 내세우지만 부자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적인 통치 형태가 불가능하다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통치 형태는 무엇인지를 모색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투쟁하지 않고 조화롭게 하나의 국가 안에 묶이도록 다수의 ‘중간계급’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이상적인 통치 형태가 왕정과 귀족정이지만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일종의 혼합정인 법치적 민주정을 주장했던 것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를 매우 중시했다. 그 밑바탕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다. “국가는 최선을 실현하며, 따라서 자연적이다. 자연은 언제나 최선의 실현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국가 안에서 살아야 하는 동물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인간은 본래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최선을 실현하려는 목표를 가진 존재다. 따라서 최선의 실현을 위해 국가에 참여하고 정치를 할 수밖에 없다. 가족이 어느 정도 재산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정신을 집중하여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왕정이나 귀족정을 이상적인 통치 형태라고 주장하면서도 혼합정을 주장했던 이유도 인간의 본성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혼합정은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성대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통치 형태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사상사에 우뚝 솟은 봉우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까지 내려온 고대 그리스 학문을 집대성했다. 분야도 광범위해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학, 경제학, 예술론 등 인문 사회과학 전 분야와 생물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 분야를 포괄했다. 학문의 집대성이라는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중국의 철학자 순자와 비견될 수 있다. 순자는 유학의 입장에서 당시까지 내려온 제자백가 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서양사상사에서 하나의 학문적 출발점을 제공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중세를 거쳐 근대로까지 이어졌다. 중세 후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유럽에 소개된 후 근대로 넘어오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지대해졌다. 사회계약설을 주장하는 홉스, 로크, 루소 등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또 독일의 철학자들인 칸트, 헤겔, 마르크스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가 집대성한 학문적 토대를 거쳐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려 40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물론 이들 저서가 모두 전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후대로 이어지는 사상의 길을 놓았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꿈을 꾸었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반대든 찬성이든 계승이든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꿈 안에서 이루어졌다.
생각 플러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의 덕목으로 ‘중용’을 주장한다. 그래서 중용을 실천할 수 있는 중간계급이 다수인 국가를 최선의 국가라고 했다. 중용을 주장한다는 면에서 동양의 철학과 유사점이 있다. 다음 글들을 읽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글과 동양의 고전인 《중용》에 나타난 중용이란 개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보자.
《정치학》
윤리학의 명제들, 즉 진실로 행복한 생활이란 모든 장애로부터 벗어난 선(善)의 생활이며, 선이란 중용에 있다는 명제들을 받아들인다면 최선의 생활 방식은 중용, 즉 각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중용에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아가 시민들이 어떠한 생활 방식을 갖고 있는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정치 질서를 평가하는 데도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치 질서란 시민들의 생활 방식이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에는 세 개의 계급이 있다. 아주 부유한 사람들, 아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계급 …… 국가는 가능한 한, 평등하며 동등한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여야 한다. 다른 어떤 계급보다 중간계급이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중간계급에 기초를 두는 국가가 최선의 질서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중간계급이야말로 국가를 구성하는 자연스러운 요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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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
중(中)이란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음이다. 군자는 중용에 따라 행동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하여 행동한다. 군자의 중용이란 군자의 덕을 갖추고 있으면서 때에 따라 중에 맞추어 행동함이다. 소인이 중용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소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동함이다. 군자는 자신의 현재 처지에 따라 행하고 그 밖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부귀한 처지에 있다면 부귀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고, 가난하고 천한 처지에 있다면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며, 오랑캐와 같은 처지에 있다면 오랑캐가 해야 할 일을 하고, 환난에 처해 있다면 환난에 처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군자는 어떤 처지에 놓인다 하더라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윗자리에 있을 때는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아니하며, 아랫자리에 있을 때는 윗사람에게 매달리지 아니한다. 자기를 바르게 하고 남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으면 원망이 없게 될 것이니,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않고 아래로는 사람들을 탓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편안하게 처신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것을 행하면서 요행을 바란다. 문왕과 무왕의 정치가 보여주었듯이 걸맞은 사람이 있다면 그 정치가 흥성하게 될 것이고 걸맞은 사람이 없다면 그 정치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무릇 정치는 갈대와 같다. 정치의 성패는 사람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