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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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히드라다_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포로수용소에서 쓴 박사 학위 논문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수천 가지이지만 의도를 가지고 하는 행동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일상적 행위는 우리가 의식하지 않은 동안 일어난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행동이 무수히 되풀이되면서 우리 시대까지 이어졌다. 이런 습관적 행동은 우리를 도와주기도 하고 옥죄기도 하며 우리 대신 우리의 삶을 결정하기도 한다. …… 이처럼 수백 년 전의 과거는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현재까지 흘러왔다. …… 이 모든 것들이 물질문명이라는 용어로 파악하려 했던 내용들이다. ……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역사, 200~300년 혹은 1000년 전에도 있었을 역사이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눈앞에서 옛 모습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역사 속에 살고 있다. 물질문명은 역사를 거치면서 인류의 삶과 결합해왔다. 마치 우리 몸속의 내장처럼 깊숙한 곳에 흡수되어 있다. 오래전부터 경험했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1976년에 브로델이 미국의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했던 강연 내용이다. 브로델은 물질문명이 오래전부터 내려온 것이어서 누구나 당연하게 여긴다고 했다. 우리가 먹는 쌀밥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끼니때마다 자장면, 스파게티, 햄버거가 아니라 쌀밥을 먹을까?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쌀밥을 먹어왔기 때문에 누구도 쌀밥을 먹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처럼 오래전에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면서 일상이 되어버린 것을 브로델은 물질문명이라 했다. 브로델은 물질문명이 우리 삶의 토대를 이룬다고 보았다.

브로델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그는 포로 생활을 하면서 순전히 기억에 의지하여 16세기 지중해 지역의 역사에 대해 논문을 썼고, 전쟁이 끝난 2년 후인 1947년에 그 논문으로 소르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6~1968년에 브로델은 프랑스의 역사학자 뤼시앵 페브르(Lucien Febvre),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와 함께 <아날(Annales)>지 편집진이 되어 아날 학파를 형성하고 이끌었다. 아날 학파는 정치 외교적 사건을 중요시하는 소르본 학파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역사학파다. 아날 학파는 통계 등을 활용하여 한 시대의 일상생활과 상업을 꼼꼼하게 다루고자 했다. 이런 아날 학파의 특징이 잘 드러난 저서가 바로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다.

 

교환이 문지방을 넘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1967년에 출판되었다. 원제목은 ’15~18세기 물질문명, 경제, 자본주의’다. 원제목이 보여주듯이 브로델은 15~18세기, 즉 1400년대에서 1700년대 사이의 유럽 역사를 물질문명, 경제, 자본주의의 순서로 다루었다. 브로델은 물질문명 위에 시장경제가 있고, 시장경제 위에 자본주의가 있다고 봤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이해하려면 15~18세기 유럽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 시기 유럽은 시대적으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였다.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획득한 시민계급이 출현했다. 시민계급은 상업 활동을 방해하는 중세의 질서에 반대했다. 이에 반해 귀족들은 중세의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특권적 지위를 누리면서 농민뿐만 아니라 시민계급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고자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계급과 귀족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절대왕정이 등장했다. 절대왕정은 귀족과 손을 잡고 중세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상업에 대한 자유를 일정 부분 허용하여 시민계급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스페인을 필두로 프랑스, 영국 등의 절대왕정은 발전한 항해술을 바탕으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렸다. 절대왕정 국가들은 식민지 수탈을 통해 막대한 금과 은을 모았다. 그리고 이 무렵에 산업자본이 출현했다. 중세에는 가내수공업에 머물던 공업이 공장제수공업으로 발전하면서 자본-노동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대되어나갔다. 마르크스는 이 시기를 자본의 시초 축적 시대라고 불렀다.

브로델은 이 시대의 물질문명, 즉 일상생활을 지배한 것은 자급자족이라고 했다.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고 공장제수공업이 발전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자급자족 경제가 지배적이었다. 브로델은 물질문명을 건물에 비유해 1층이라 했다. 브로델은 “교환이 문지방을 넘으면서” 1층 위의 2층, 즉 경제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자급자족과 다른 시장경제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물질문명과 경제생활이 만나는 접촉면은 연속적이지 않다. 이 두 세계는 무수히 많은 아주 작은 연결점으로 연결된다. 시장, 좌판, 상점 등이 그 연결점이다. 이 연결점을 경계로 두 세계가 나누어진다. 한쪽에는 경제생활이 있고 …… 다른 한쪽에는 물질문명, 즉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비경제생활이 있다. 교환이 문지방을 넘으면서 숙명적으로 경제생활이 시작되었다.

 

시장과 반대되는 곳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하다

그러면 자본주의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브로델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구분했다. 건물로 비유하면 자본주의는 경제생활, 즉 시장경제의 위층이라고 했다. 브로델에 따르면 시장경제는 투명한 영역이다. 즉 시장경제는 수요와 공급과 가격이 행위자들의 예상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놀랄 만한 일이 생기지 않는 영역이다. 시장이 투명한 이유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시장을 규제하는 법규, 제도, 문화를 지키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골의 재래시장, 도시의 상점, 행상 등이 시장의 영역이다. 규모가 큰 국제무역일지라도 오랫동안 일상화된 거래가 일어나 투명한 곳은 시장이다.

그런데 시장의 상층으로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소수의 덩치 큰 선수들이 참여한다. 그 선수들은 영악한 술수를 부리고 힘을 휘두르며 법규나 규범을 무시하고 높은 이익을 독차지 한다. 브로델은 경쟁의 원리가 작용하지 않는 시장의 상층부를 ‘반시장’이라고 했다. 이 영역은 시장이라 할 수가 없다. 경쟁과 규범이 아니라 독점과 지배가 힘을 쓰는 곳이므로 시장경제와 정반대되는 곳이다. 브로델은 이 영역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산업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브로델이 말하는 덩치 큰 선수란 대형 상인을 의미한다. 대형 상인이 노는 곳은 아메리카 신대륙, 인도, 중국 등지를 오가는 원거리 무역이다. 브로델은 대형 상인들이 행사하는 경제적 힘의 원천을 두 가지로 보았다. 첫째, 대형 상인들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거리를 갈라놓음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 둘째, 대형 상인들은 막대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브로델은 첫 번째를 주요한 원천으로 보았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규제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15~18세기 원거리 무역에 종사하던 대형 상인들은 200퍼센트가 넘는 이익을 독점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자본을 축적했다. 브로델은 이렇듯 소수가 독점 이익을 올리는 ‘반시장’의 영역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는 경제 시스템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브로델의 주장은 독특하다. 자유주의 경제학이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가 자유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다고 본다. 또한 독점은 비정상적인 특수 현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브로델의 주장은 정반대다. 브로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경쟁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경쟁이 없는 ‘반시장’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독점은 경쟁의 특수한 형태가 아니라 참여자가 다른, 완전히 딴 세계일뿐이다. 또한 브로델은 자본주의가 전체 사회 시스템의 꼭대기인 상층에 해당한다고 본다. 즉 자본주의는 ‘상부구조의 현상이고 소수의 현상이고 높은 곳의 현상’이다. 그래서 브로델은 말한다. “자본주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익이 콸콸 쏟아지는 곳에서만 존재한다. …… 달리 말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산업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반시장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다.”

히드라와 싸우는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가 히드라의 목을 하나 칠 때마다 두 개의 목이 새로 생겼다.

브로델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브로델은 자본주의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브로델의 주요 관심사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400년 동안 발견된 현상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브로델은 자본주의의 실체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자본주의를 “머리가 100개쯤 달린 변화무쌍한 히드라 같은 존재”라고 했다. 히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큰 뱀으로 머리가 아홉 개 달렸는데, 머리를 한 개 자르면 그 자리에 머리가 두 개 생겨났다고 한다. 브로델이 자본주의를 히드라에 비유한 이유는 자본주의를 어느 하나로 특정해서 정의 내리는 것은 오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브로델은 자본주의를 경제 시스템으로만 이해하는 것에 반대했다. 브로델은 비록 자본주의가 경제 영역에 속하기는 하지만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침투하여 그 영역의 것들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머리가 100개 달린 히드라와 같다고 보았던 것이다.

 

브로델은 자본주의가 히드라와 같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최악의 오류는 자본주의를 경제 시스템으로만 여기고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사회질서를 통해 생존하면서 애초부터 육중한 상대였던 국가와 대등한 지위에서 맞서기도 하고 공모하기도 하는 존재다. 또 사회구조를 지탱해주는 문화의 역할도 이용한다. 왜냐하면 문화란 것이 서로 상충하는 조류로 나뉘고 불평등하게 분포하더라도 종국적으로는 기존 질서를 떠받치는 것이 그 본연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또한 여러 계급과 결탁한다. 지배계급은 자본주의를 방어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하게 된다.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서양 근대 초의 경제적 삶을 물질문명, 시장경제, 자본주의의 3층 구도 속에서 파악한다. 물질 문명은 자급자족의 하부경제이며, 그 위에 투명하고 규칙성을 지닌 교류의 장소인 ‘경제생활’이 있고, 맨 위에 불투명한 독점의 세계인 자본주의가 있다. 일상생활의 구조를 경제사 에 결합시키고 자본주의를 특이하게 ‘반(反)시장’으로 보는 동시에 ‘세계 경제’라는 총체적 시각을 제공한다. – 최갑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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