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비코, 《신학문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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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만 안다_ 비코, 《신학문의 원리》

 

시대를 앞질러 달린 석학

다윈은 자연의 기술의 역사, 즉 동식물의 생활을 위한 생산도구로서 동식물 기관의 형성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본래적인 의미에서 기술의 역사, 바꾸어 말하자면 사회적 인간의 생산적 기관들의 형성사도 똑같은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이 형성사 쪽이 한층 더 용이하게 제공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비코도 말하고 있듯이 인간의 역사가 자연의 역사와 구별되는 것은 전자는 우리가 만든 것이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자본론(Das Kapital)》에서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를 인용하며 비코가 인간의 역사를 자연의 역사와 분리한 점을 높게 평가했다. 비코는 마르크스도 지적하듯이 자연과 사회를 엄격히 구분했다. 자연은 신이 만든 것이고, 사회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비코는 자연과 사회를 구분함으로써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었다. 유럽의 중세시대에는 모든 것이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연과 사회를 구분하는 일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베이컨(Francis Bacon), 데카르트 등은 자연과 사회에 관한 진리를 찾으려고 했다. 즉 신의 계시가 아닌 방법으로 진리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베이컨은 실험과 관찰의 방법을, 데카르트는 명증한 명제에서의 연역적 추론의 방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비코의 생각은 달랐다. 비코는 ‘지식=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자연은 신이 만든 것이므로 신만이 자연에 관한 진리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개연성에 불과하다. 즉 인간이 자연에 대해 깊이 깨닫는다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 사회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에 대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비코는 사회를 연구하는 ‘새로운 학문’을 하자고 했다.

비코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비코는 바톨라의 후작 로카의 두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가정교사로 지낸 몇 년간을 제외하고는 고향을 떠난 적이 없었다. 비코는 나폴리 대학의 법학 교수가 되고 싶어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비코는 평생 나폴리 대학의 수사학 강사로 지냈다. 비코는 베이컨에게서 철학과 역사에 대해 사사를 받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에게서 법률학 연구의 단서를 얻는 등 두 사람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신학문의 원리(Principi di una Scienza Nuova d’intorno alla commune natura delle nazioni)》는 1725년에 출판되었다. 그 책의 원제목은 ‘민족들에게 공통된 자연 본성에 대한 새로운 학문의 원리’다. 본래 비코는 당시 추앙받던 사상가들, 예를 들면 그로티우스, 홉스(Thomas Hobbes), 로크(John Locke) 등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을 썼다. 그러나 출판 지원을 약속했던 코르시니 추기경이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자신의 재산을 팔아 출판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재산으로는 책 전체 분량의 4분의 1밖에 출판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비코는 책 분량을 4분의 1로 줄여서 출판할 수밖에 없었다.

비코와 동시대 사람들은 《신학문의 원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신학문의 원리》가 프랑스어,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고향인 나폴리에서도 ‘비코 붐’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비코를 가리켜 ’19세기 태동기 자체’라고 했다. 또한 영국의 역사학자 콜링우드(Robin George Collingwood)는 ‘즉시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나 시대를 앞질러 달린 석학’이라고 비코를 평가했다. 자연과 사회를 구분하자는 비코의 주장이 19세기에 태동한 사회학, 역사학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인간의 방법으로 자연을 알 수 없다

비코는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데카르트는 증명할 필요가 없는 명확한 진리로부터 출발하여 엄밀한 연역 규칙에 의해 결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에게 증명할 필요가 없는 명확한 진리는 수학이었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명증한 진리가 없는 역사학과 인문학을 잡다한 정보를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역사학과 인문학에 한두 시간쯤 할애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신중한 사람이라면 그것들을 일생의 연구와 사색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비코는 이런 데카르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비코는 수학적 지식이 전적으로 타당하고 수학적 명제들이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비코는 “우리가 기하학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기하학을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비코는 《이탈리아인 태고의 지혜》에서 기하학적 방법으로는 자연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하학적 방법을 통해 얻은 진리는 물리학에 대한 참된 진리가 아니라 개연성에 불과한 것이다. 물리학의 원리를 알기 위해 필요한 방법은 기하학이지만 기하학적 방법에서 도출된 물리학의 진리는 기하학의 공리처럼 확실하게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하학의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 명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물리학의 명제를 증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에서 물리학의 명제를 만든 것이 된다.

물리학의 대상인 자연을 우리가 만들었어야 자연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을 만들지 않았다. 자연은 신이 만든 것이다. 따라서 신만이 자연에 대한 진리를 알고 있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아는 것은 우리가 만든 명제로 증명해낼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연의 내밀한 부분까지 알아낼 수 없다.

비코는 세계를 실재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로 구분한다. 신이 만든 자연은 실재의 세계다. 인간이 만든 수학은 가상의 세계다. 신은 실재 세계의 왕이고 인간은 가상 세계의 왕이다. 왜냐하면 실재 세계는 신이 만든 것이고 가상 세계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실재 세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유일한 진리이자 유일한 길은 신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코의 철학은 플라톤의 철학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설정하여 이데아의 세계만이 실재 세계이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었다.

인간은 자연의 진리를 완벽하게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에 대한 진리를 추구해야 할까? 비코의 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만든 것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면 된다. 인간이 만들었음으로 인간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코는 데카르트가 잡다한 정보의 무더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역사학과 인문학을 연구하자고 했다.

 

민족은 단계적 발전을 해왔다

비코는 인간이 만든 세계인 ‘사회’에 주목한다. 비코는 《신학문의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고의 암흑 속에서 의심할 여지없는 영원불멸한 진리의 빛이 하나 빛나고 있다. 사회라는 세계는 분명히 인간이 만든 것이다. 따라서 사회에 관한 여러 원리는 우리 마음의 여러 형태 안에서 찾아낼 수 있는 진리다. …… 기하학이 여러 요소로 양(量)의 세계를 구성하여 연구하는 경우 기하학은 그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학문은 여러 민족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인간 행위에 관한 여러 원리가 점이나 선 그리고 도형과 같은 기하학의 원리보다 실재적이므로 새로운 학문의 실재성이 기하학보다 훨씬 크다.

비코는 여러 민족이 걸어온 길을 연구했다. 민족의 역사에서 신적 원리가 역사적 법칙의 기원이 된다. 그렇지만 역사 그 자체에 내재한 고유한 법칙이 있다. 민족은 그 법칙에 따라 발전해왔다. 인간이 유년기, 청년기, 성년기를 거치며 성장하듯이 민족은 신의 시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를 거치며 발전해왔다.

신의 시대는 가부장들이 통치한 시대다. 가부장들은 연합하여 방랑하는 약탈자 무리와 대항해야 했다. 그리하여 최초로 공동 정착지가 만들어졌다. 힘센 자들의 폭력이 두려운 연약한 자들은 가부장들이 연합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보호를 요청했다. 이렇게 하여 노예 계급이 생겨났다. 따라서 최초의 사회는 가부장들이 연합하여 통치하는 소규모 과두체제였다. 가부장들은 엄격한 법으로 여자, 아이, 노예를 다스렸다.

영웅의 시대는 귀족들이 지배를 했던 시대다. 신의 시대의 가부장들은 처음에는 신중하게 통치했지만 나중에는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사회적 갈등이 생겨났다. 귀족과 평민의 갈등에 노예들의 투쟁이 겹쳐지면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공히 적용될 수 있는 권리들이 규정되었다. 신의 시대에 비해 평민의 지위와 권리가 향상된 것이다.

인간의 시대는 평민의 권리가 더욱 신장된 시대다. 평민들은 여전히 열등한 자신들의 지위에 불만을 가지고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며 권리 쟁취를 위한 투쟁을 일으킨다. 귀족들의 정치는 타파되고 민주적 정의의 규칙이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인간의 시대에 이르러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전하고 신앙심과 통일적인 믿음이 파괴되면서 마침내 국가가 와해되고 ‘최악의 폭군인 인민의 무제한적인 자유’로 귀결된다. 이런 상태는 강력한 개인이 사회 전체를 장악함으로써 해소되기도 하지만 회복 불능의 무정부 상태에 이르러 다시 야만 상태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역사는 다시 순환한다.

비코의 역사관은 순환론이다. 그렇지만 비코는 역사가 단계적 발전을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역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Tip.생각 플러스

비코는 인간이 자신이 만든 세계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즉 물리학과 기하학의 법칙으로는 신이 만든 세계인 자연을 이해할 수 없는 반면에 인간이 만든 세계인 사회는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기하학자들이 사용하는 아주 간단하고 쉬운 논증의 방법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다음의 두 글을 읽고 두 사람의 생각 차이를 생각해보자.

  • 태고의 암흑 속에서 의심할 여지없는 영원불멸한 진리의 빛이 하나 빛나고 있다. 사회라는 세계는 분명히 인간이 만든 것이다. 따라서 사회에 관한 여러 원리는 우리 마음의 여러 형태 안에서 찾아낼 수 있는 진리다. …… 기하학이 여러 요소로 양(量)의 세계를 구성하여 연구하는 경우 기하학은 그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학문은 여러 민족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인간 행위에 관한 여러 원리가 점이나 선 그리고 도형과 같은 기하학의 원리보다 실재적이므로 새로운 학문의 실재성이 기하학보다 훨씬 크다. -비코, 《신학문의 원리》
  • 가장 어려운 증명에 도달하기 위해 기하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아주 간단하고 쉬운 논증에 대해 성찰한 끝에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와 유사한 논리적 방식으로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사람들이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보지 않고 논증의 순서를 따르기만 한다면 도달할 수 없는 아주 먼 진리란 없으며, 또 발견하지 못할 만큼 깊이 감추어진 진리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를 찾는 데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장 간단하고, 가장 알기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러 학문에서 진리를 찾았던 사람들 가운데 수학자들만이 확실하고 분명한 추리와 논증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수학자들이 출발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 가장 간단한 일반적인 원리에서 출발했으며, 내가 발견한 각각의 진리들은 다른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하나의 규칙이 되었다. 그래서 매우 어려운 것으로 여겼던 여러 난제를 해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미해결의 문제가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데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주어진 문제에는 하나의 해답만이 있으며, 누가 발견하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 수 있음을 감안할 때 내 방법이 전혀 헛되어 보이지는 않을 것으로 믿는다. …… 이러한 방법이 만족스러웠던 이유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그 방법을 통해 모든 것에 대해 이성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hode)》

 


비코, 《신학문의 원리》
근세 초기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수학에 입각한 학문의 이념에 대해 동시대의 이탈리아인인 비코는 역사의 내적 법칙의 인식 가능성을 주장하면서 역사과학의 확립을 제창하고 있다. 인간과 각 민족들의 정신이 구조적인 친연성을 가진다는 가정에 입각하여 역사의 이해와 그 해석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는 이 책은 고대 수사학 전통의 근대적 부활이며, 이후 크로체(Benedetto Croce)나 독일 낭만주의를 거쳐 현대의 가다머(Hans-Georg Gadamer)에 이어지는 인문학 이론의 전통에 강력한 영향을 주고 있다. -김남두 서울대학교 석좌교수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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