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안에 매몰되지도 말고 벗어나지도 마라
_ 원효,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疎》
원효, 파계하다
원효(元曉)는 어느 날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나에게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나,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아마도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은가 보구나. 나라에 현명한 학자가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당시에 요석궁에는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칙명을 받들고 원효를 찾고 있을 때 원효가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다가 만나게 되었다. 원효는 일부러 물속에 떨어져 옷을 적시었다. 궁리는 원효대사를 요석궁으로 안내하여 옷을 말리게 하니, 그곳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을 낳았다.
원효(元曉, 617~686)가 파계를 했다. 뜻밖에도 큰 깨달음을 얻은 직후였다. 원효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그것을 알려면 당시 신라 사회를 살펴보아야 한다. 신라는 성골, 진골, 육두품, 오두품 등으로 이어지는 골품제(骨品制)를 가진 엄격한 신분 사회였다. 원효는 육두품 출신으로 활동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원효의 파계는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시도이자 큰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요석공주와 일이 성사된 후 원효는 궁전을 떠나 길거리로 나왔다. 이름을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바꾸었다. 광대들로부터 큰 박을 얻어 무애(无涯), 즉 ‘자유로움’이라 이름 짓고, 박으로 추는 춤을 배웠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백성들과 어울려 박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민중 불교를 개척하다
원효의 행동에 대해 《송고승전(宋高僧傳)》은 이렇게 전한다.
그의 발언은 미친 듯 난폭하고 예의에 어긋났다. 행동은 상식의 선을 넘었다. 그는 거사와 함께 주막이나 기생집에 들어가고 지공과 같이 금빛 칼과 쇠 지팡이를 가지기도 했다. 어떤 때는 주석서를 써서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당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즐겼다. 때로는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때로는 산수에서 좌선하는 등 계기에 따라 마음대로 해 일정한 규범이 없었다.
원효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승려 중의 한 사람이다. 백성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고 존경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만약 그런 파격적인 행동만 했다면 원효는 시쳇말로 ‘땡중’일 뿐이다. 그가 존경을 받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원효가 무엇을 깨달았는지부터 살펴보자.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두 사람은 황폐한 언덕길을 가다가 밤이 되어 무덤 사이에서 자게 되었다. 한밤중에 원효는 심한 갈증이 나서 굴 안의 샘물을 손으로 움켜 마셨는데 달고 시원했다. 그런데 날이 밝아서 보니 마신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갑자기 원효는 토할 것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유학을 포기했다.
당시 중국 유학을 한 승려들은 귀족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세속오계(世俗五戒)로 유명한 원광(圓光), 율법의 대가 자장(慈藏) 등이 대표적이다. 의상 역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귀족 불교를 지배하는 인물이 되었다. 귀족 불교는 왕실을 떠받드는 불교다. 의상의 불교 사상이 귀족 불교의 사상을 표현한다. 의상은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라고 했다.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바로 모든 것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다’라는 의미다. 하나는 임금이고, 모든 것과 많은 것은 백성이다. 백성은 임금에게서 비롯되었으니 임금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존중하자는 말이다.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귀족 불교와 다른 길을 걸었다. 왕족과 귀족 중심의 불교가 아닌 민중 불교를 개척했다. 그것이 원효의 큰 깨달음이었다. 원효의 파격적 행동은 깨달음의 실천, 민중 불교의 실천이었다.
원효, 통찰하다
원효는 백성들과 어울리는 일만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백성들과 어울리다가 밤이 되면 연구와 저술을 하는 초인적인 생활을 했다. 원효는 청소년기부터 대단한 결심을 한 사람이다. 십대 중후반기에 쓴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의 한 구절을 보자.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시리더라도 불기운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주린 창자가 마치 끊어지듯 하더라도 음식을 구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100년도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않는다 말할 것이며, 수행하지 않고 놀기만 할 것인가.”
원효는 치열하게 경전 연구에 몰입했고, 여기에 백성들의 지혜를 보탰다. 혜공(惠空)과의 일화를 보자. 어느 날 원효와 혜공이 시냇가에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대변을 보았다. 혜공은 그것을 가리키며 “자네가 눈 똥은 내 물고기”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똥처럼 더러운 것이 물고기처럼 깨끗하다는 말이다. 혜공은 어릴 적부터 신통력이 있어 승려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승려가 된 이후에는 매일 술에 취해 거리에서 놀았다. 그러니 혜공은 학식이 높은 승려가 아니다. 그럼에도 원효는 혜공으로부터 배우고자 했다. 혜공은 매일 길거리에서 백성과 어울리며 백성들의 삶과 지혜를 보고 들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혜공은 원효에게 그것들을 가르쳐주었다. 원효는 경전을 연구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백성의 삶과 지혜로 풀어보고자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위대한 통찰을 이루어냈다.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 관한 얘기에서 원효의 통찰력을 알 수 있다. 아무도 《금강삼매경》을 해설할 사람이 없어 원효를 초빙해야 했다. 원효는 황룡사에서 왕과 신하 그리고 수많은 승려들을 모아놓고 강의했다. 또한 바다용이 권유하자 《금강삼매경》 해설서를 길가에서 소의 두 뿔 사이에 붓과 벼루를 놓고 지었다. 길가에서 지었다는 말은 단숨에 해설서를 썼다는 얘기다.
화쟁의 사상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이하 《소(疎)》)는 인도의 승려 마명(馬鳴)이 지었다는 《대승기신론》를 해설한 책이다. 《대승기신론》은 불교 문학의 걸작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승기신론》에 관해 여러 사람이 해설하고 주석을 달았다. 원효는 이전의 해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소(疎)》에서 이렇게 말했다. “종래 이 논(論, 《대승기신론》을 가리킴)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 논의 근본정신에 대해 조금씩 파악했지만 각자 자기가 배운 것에만 사로잡혀 있거나 문구에만 매달려 논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을 파악하지 못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의의에 대해 이렇게 썼다. “심오하면서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 주장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스스로 그 주장을 버린다. 다른 주장들을 모두 타파하면서도 그 주장들을 다시 허용한다.” 원효가 《대승기신론》의 해설을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자신의 주장이 옳지만 틀릴 수도 있고, 다른 주장들이 틀리지만 옳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런 자세가 근본적 진리를 알아가는 올바른 자세다. 이것이 그 유명한 ‘화쟁사상(和諍思想)’의 방법론이다. 원효는 상대를 말살하려 하지 않았다. 뜻이 다르면 적이 되는 세상에서 상대를 인정하고 화합을 이루자고 했다. 같은 것은 다른 것이고 다른 것은 같은 것이며, 같은 것 안에 다른 것이 있고 다른 것 안에 같은 것이 있다.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근본적인 진리와 그 진리를 찾아가는 길에 대해 썼다. “마음의 근원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홀로 깨끗하다. 진리를 찾아가는 길에는 귀한 것과 속된 것이 융합되어 있다. 귀한 것과 속된 것, 그 둘은 융합했으나 하나는 아니다. 홀로 깨끗하여 가장자리를 떠났지만 가운데가 아니다. 가운데가 아니면서 가장자리를 떠났으므로, 만물의 이치가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가 아닌데도 둘을 융합했기 때문에 귀하지 않은 세상이 속되지도 않고, 속되지 않은 이치가 귀하지도 않다.”
마음의 근원, 즉 근본적인 진리는 가장자리를 떠났지만 가운데가 아니고, 가운데가 아니면서 가장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머무는 자리가 없다. 즉 근본적 진리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왜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는가.
진리를 찾아가는 길에는 귀한 것과 속된 것이 융합되어 있다. 귀한 것은 이치, 즉 진리이고 속된 것은 세상이다. 그 둘이 융합되어 있다고 했다. 세상 속에 이치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은 속된 것만은 아니다. 이치 또한 세상과 떨어져 있는 귀한 것만도 아니다.
세상 속에 있는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원효는 말한다.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그것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바르게 생각하고 관찰하면 그것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하나의 울타리 안’이란 일상생활을 말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일상생활에 매몰되지도, 벗어나지도 않으면서 바르게 생각하면 근본적 진리, 즉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민중 불교다. 원효는 그 진리를 깨우쳐주고자 바가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전국 방방곡곡의 백성과 축제를 벌였다.
일연(一然)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원효의 업적을 이렇게 평가했다. “가난하고 무지한 무리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된 데에는 원효의 교화가 컸다.”
Tip.생각 플러스
원효는 당대에 지배적이었던 귀족 불교와 달리 백성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귀족 불교는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을 받았던 불교로, 깨달음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를 구분하여 생활 속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밝히지 못했다. 반면 원효는 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민중 불교의 길을 열었다. 다음 글을 읽으며 어떤 점에서 두 주장이 갈리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 진리가 ‘하나냐’, ‘여럿이냐’ 하는 의심이 있다. 만약 하나라면 다른 진리는 없게 되고, 다른 진리가 없으면 모든 중생들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 만약 진리가 여럿이라면 부처와 나는 각기 존재하는 것이니, 어떻게 같은 본체로 자비를 베풀 수 있겠는가. …… 이런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일심법(一心法)을 세웠다. 진리는 오직 일심뿐이니 자신이 무지하여 일심이 미혹될 뿐, 일심의 바다에서 벗어나지 않고 일심을 움직이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 …… 중생의 마음 자체를 법(法)이라고 한다. 지금 대승 가운데 있는 모든 법에는 별도의 본질이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일심이 대승의 본질이므로 법은 곧 중생의 마음이다. 이것은 마음이 모든 것을 포섭한다는 의미이고, 소승법과 대승법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진실로 마음이 모든 것을 포섭한다. 모든 것이 오직 일심이다. -《대승기신론소》 중에서
- 석가여래의 가르침에는 세 종류의 세계가 포함되어 있다. 이른바 세 종류의 세계란 첫째가 물질의 세계이고, 둘째가 중생의 세계이며, 셋째가 깨달음의 세계다. 깨달음의 세계에는 부처와 보살이 있다. 이 세 종류의 세계가 법을 모두 포괄하고 있으므로 나머지는 논하지 않는다.
-의상, <화엄일승법계도> 중 ‘석문(釋文)’
원효, 《대승기신론소》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논서인 마명의 《대승기신론》을 주석한 것으로 한국적 불교 사상 전개의 단초가 되는 책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을 주석하면서 기존의 현학적인 주석에서 벗어나 모든 인간의 내면에 불성이 내재해 있다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의 본정신을 잘 살리고 있다. 우리는 불교 종파 간의 갈등 해소와 대중 불교의 전개라는 이론적,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한 원효의 정신을 이 책을 통하여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허남진,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