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 주자, 주자
아침 6시인데 긴장이 몸을 감싼다. 오전 9시에 화순에서 <주자학술대회>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화순에 가는 것은 서울에 가는 것만큼 어려운 여정이다. 먼저 일곡동에서 버스를 탄다. 버스를 타고 지원동을 지나 소태동에 내려 다시 택시를 바꿔 타야 화순에 갈 수 있다. 일찍 출발해야 9시에 도착할 수 있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몇 분이나 학술대회에 참석할까?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라도 정시에 참석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안내판도 없고, 프래카드도 없었다. 안내실에 가서 물으니 저쪽으로 가란다. 안내원도 없고 엘리베이터도 없다. 겨우 4층에 올라섰다. 행사가 있긴 있나 보다.
동고송을 대표하여 당당히 서명을 하였다. 자료집을 들고 회의장에 들어섰다. 어라. 여수 시의원 주종섭씨가 있었다. 나랑 같이 젊음을 진보정당운동에 바친, 아끼는 후배였다. “종섭이 자네가 이런 데를 어이 왔능가?”부지불식간에 나온 인사말이었다. “선배님이 이런 데를 오시다니요?” 종섭이의 인사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가 주자를 찾다니, 이거 재밌는 사건인데요?” 종섭이의 발언에 대해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5년 전에 <운사유고>를 번역했다는 이야기, 조선 5백년 선비들의 간찰을 다 읽었다는 이야기, 주자를 모르고선 퇴계와 율곡을 알 수 없어 <주자대전>을 읽었다는 이야기, 작년에 <공자와 논어>를 집필했다는 이야기, 주자에 대해 한 권의 책을 출간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아직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아 이곳에 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알고 보니 종섭이는 그의 성씨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한다. 여수에 朱씨 종친이 3천명인데 그 종친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단다.
이종범 원장이 연설을 하였다. 연설의 서두는 미약하였으나 연설의 후반은 성대하였다. “군주와 신하가 협의하여 정치를 이끌자는 신권정치 사상이 주자로부터 시작되었고, 정도전이 이 사상을 실천하였으며, 조광조가 또 이를 실천하려다 죽었다. 이발 역시 그런 인물이었으니 왜 호남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성지인 까닭은 이런 데 연유한 것이다.”고 말할 때 이원장의 목소리는열정적이었다.
김태완은 주자의 이론과 실천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뼈있는 발언을 하였고, 김경호는 정도전과 정몽주와 권근이 조선 초 성리학의 세 대표라고 말했으며, 김용흠은 주자의 도학에 기초한 개혁 정치가 정암 조광조에 의해 실천되었으나 정암이 실패한 이후 조선성리학은 도학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에 대한 반발이 실학이라는 통찰을 주고 단상을 내려왔다.
청중은 100명을 넘었을 것이다. 세 학자들의 주자 연구가 청중들에게 얼마나 전달되었을 지는 의문이다. 학술대회가 끝나고 우리는 인근 수림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공부 모임의 조세경씨, 정수연씨, 김정희씨를 이런 데서 보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2019년 5월 31일 황광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