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청련 회고록>을 만드는 까닭?
황광우
*이 글은 <?????>에 실린 글입니다.
지난 1월 18일 스무 여 명의 젊은이들이 ‘오월의 숲’에 모여 들었다. 한청련 회원들의 회고록을 읽고 토론하기 위한 집담회가 처음 열렸다. 이후 3월 22일까지 도합 다섯 차례의 모임을 가졌는데, 모임은 진지했고 유익했다.
<윤한봉 평전>을 출간하기 위해 나는 안재성 작가와 함께 2016년 1월 태평양을 건넜다. 엘에이와 시애틀, 시카고와 뉴욕 등지를 10일의 여정으로 돌파하는 것은 몹시 힘들었는데, 평소 내가 ‘알아왔던 미국’과 ‘가서 본 미국’은 많이 달랐다. 돌아와 마침내 <윤한봉 평전>을 발간하였다.
이후 나는 한청련 백서 발간을 나의 미션이라 설정하였다. 윤한봉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청련이었다. 따라서 한청련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야말로 윤한봉의 삶과 실천을 오롯이 드러내는 일이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축장되어 있던 녹취록을 다시 열었다. 원고 5천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글을 1천매로 줄였다. 다듬었다. 힘들었다. 근데 재미가 있었다. 점점 빠지는 거다. “내가 너무 몰랐구나, 합수에 대해 너무 몰랐구나.”
한청련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 분이 장광선씨였음을 나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장광선씨는 고향이 장흥이다. 1946년생이니 합수 보다 나이가 위이다. 그런 그가 합수를 선생이라 호칭한다.
미국에서 사는 한국 청년에게도 5.18은 충격이었다. 그러니까 합수가 미국으로 망명가기 전, 장광선과 같은 뜨거운 가슴이 미국에도 있었던 거다. 신문사에게 광주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초조하게 물었다. 전두환이 정권을 강탈하기 위해서 학살했단다. 떠도는 얘기로 2천명이 죽었단다, 기가 막혀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장광선은 광주민중항쟁 테입을 입수하여 콜롬비아 대학의 한인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광주 2주년을 맞아 뉴욕에서 대학 강당을 빌려 2주기 추도식을 했다. 그때 이름을 탈상식이라고 불렀단다. “우리는 3년을 기다릴 수 없다. 빨리 탈상을 하고 투쟁을 하자.”라고 광고했다.
장광선은 필라델피아에서 독서 모임을 이끌었다. 윤한봉이 와서 이 독서 모임을 한청련으로 전화시킨 거다. 이후 필라델피아 한청련은 활동가를 배출하여 전 미국으로 인재를 공급하는 한청련 양성소 역할을 하였다. 장광민이 시카고로 갔고, 임용천이 뉴욕으로 갔으며, 신소하가 엘에이로 갔다.
임용천은 목수다. 그에 증언에 의하면 황석영씨나 임진택씨, 고은씨나 백기완 선생님이 오시면 강연장을 준비했고, 모금을 했다고 한다. 5.18 행사 때엔 캐나다 맥길(McGill University) 대학에서 나온 비디오를 주로 틀었단다. 임용천의 꿈은 여행이었다. 장광선을 만나 한청련 회원이 되었고, 뉴욕과 엘에이를 매 년 오갔으니 꿈의 절반은 이루어진 셈이다.
문화패의 리더, 정승진도 필라델피아에서 한청련과 인연을 맺었고, 이후 뉴욕으로 옮겼다. 그는 윤한봉의 헌신성에 감동한다. “합수 형님께서 즐겨 쓰시던 단어가 ‘날 좀 보소가 되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먼저 행하거든요. 그게 놀랍죠. 민족학교에서 한 번은 변기가 막혔는데 아무리 해도 안 뚫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이 딱 손을 걷어붙이고 손을 집어넣어 파내는 거요.”
장광민은 장광선의 동생이다. 고교 시절에 한청련에 입회한 소년 회원이었다. 그는 조직이 부르면 달려갔다. 필라에서, 뉴욕으로, 뉴욕에서 시카고로 갔다. 시카고 한청련의 주축이 되었다. 이재구는 시카고에서 한청련 회원이 된 한청련의 막내이다. 합수가 곶감을 좋아했나 보다. 이재구는 광주에서 합수가 “곶감 맛 있지?” 하며 스페셜 프레즌트(special present)로 곶감을 주었다면서 다정다감한 아저씨 합수를 회고한다.
이길주, 엘에이 민족학교의 꾀꼬리 이길주 여사는 가계가 범상치 않다. 아버님이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제공한 의사였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해인사 주지가 되었다. 그녀 역시 합수를 만나 의식이 깨인 분, 합수를 만나 삶의 의미를 찾은 분이었다.
김수곤은 1934년생이다. 그의 삶이 한국현대사였다. 일제시대, 해방 정국, 한국전쟁을 몸으로 겪은 분이다. 정신과 의사이다. 동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이시고, 한국인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분투하셨다. 한국인 학교를 세워 역사를 가르쳤고, 전통 풍습을 가르쳤다. 1980년엔 맨하탄 중앙도서관 층층대에서 시위를 했다고 한다. 그는 말한다. “내가 윤한봉 선생을 그때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분 만나가지고 정치적으로 잠에서 깬 거요.”
최용탁은 문화패의 짐꾼이다. 그는 말한다. “저는 유럽에 짐꾼으로 뒤치다꺼리 하는 역할로 따라갔어요. 합수형님이 뒤치다꺼리가 젤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서혁교는 코리아 리포트의 책임자였다. “한청련 회원들은 10년 동안 함께 삶을 살았거든요. 같이 생활하고 같이 공부하고 서로 결혼도 하고. 그렇게 하나의 삶을 살았어요. 합수 형이 큰 역할을 한 거죠. 큰 지도자, 큰 형님이었어요.”
김희숙은 합수의 제자를 자처한다. 그녀는 말한다. “윤 선생님은 삶에서 실천을 강조하시는 분이었어요. 내가 바뀌지 않는데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느냐. 설거지 같은 걸 해도 안에만 쓱쓱 닦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데까지 끝까지 닦아야지 운동가지.”
임경규는 1.5세대인 지라 한국말이 서툰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합수가 구사하는 그 난해한 전라도 사투리를 다 알아들었단다. “역사학습을 시작했는데, 갑오농민전쟁을 마치 어제 일처럼 흥분하시면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때 제가 우리말 실력이 부족했고 그런데도 그 열정이 느껴지니까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머가 있었어요. 생동감이 넘치는 언어로, 육두문자 섞어가면서. 그 우울한 시절을 살면서 생기를 느낀 거에요. 그리고 공동체 분위기도 좋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