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는 향원익청] 김덕령과 취가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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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익청>을 다시 읽으며

한겨레 신문 연재기사에 이어 책으로 나온 <향원익청>을 다시 읽고 있다. 처음에는 아무 데나 펼쳤는데, 이제 ‘순서’를 잡았다. 이미 가 보았거나 앞으로 가볼 곳부터 읽는다. 그 중에서도 아들 녀석과 함께 한 곳이 제일 먼저다. 나름 심화학습을 해볼 요량이다. 그 첫번째가 김덕령과 취가정이다. <향원익청> 1에 “김덕령_취해서 부르는 노래, 듣는 이 없구나”[관련링크]라는 소제목을 단 글이 있다. 당분간 이 글을 중심으로 관련 학습을 한다. 참, 공부를 ‘촉발’해주신 곽병찬 저자께 감사의 인사 올린다.

<학습계획>

1. [내가 읽는 향원익청] 김덕령과 취가정(1)_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속의 김덕령
2. [내가 읽는 향원익청] 김덕령과 취가정(2)_ 『조선왕조실록』 속의 김덕령
3. [내가 읽는 향원익청] 김덕령과 취가정(3)_ 「취가정기」 등 취가정 현판 번역
4. [내가 읽는 향원익청] 김덕령과 취가정(4)_ 석주 권필
5. [내가 읽는 향원익청] 김덕령과 취가정(5)_ 김덕령 설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속의 ‘김덕령’

 

일러두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는 정조 연간에 편찬된 책이다. 조선 태조로부터 숙종 때까지의 주요 인물에 관한 사항을 항목별로 나누어 편집한 인명록·인물지이다.

* 이 글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집부에서 펴낸 『국역 국조인물고』 ‘김덕령 전(傳)’에 나온 기록을 옮긴 것이다. 원전은 『국조인물고』권56 왜난시 정토인(倭難時征討人)이다.

 

『국역 국조인물고』 ‘김덕령 전(傳)’

장군의 이름은 덕령(德齡)이고, 자는 경수(景樹)이니,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 사람이다.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고, 조부는 김익(金翊)인데,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모두 현달하지 못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유업(儒業)에 종사하여 장군도 소시에는 향교(鄕校)에 노닐면서 유아(儒雅)를 쌓았다.

일찍부터 자부심이 강하고 강개한 기질을 가졌으며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잘 숨어 지내면서 스스로를 신칙(申飭)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는 이가 없었다. 사람됨은 그리 장대(長大)하지는 못했으나 용맹이 아주 뛰어나 어릴 때에 이웃집의 감이 익자 장군은 몸을 솟구쳐서 입으로 실컷 따먹고 내려오곤 하였다. 또 두어 길 되는 칼을 즐겨 써서 술기운이 있을 때면 말에 올라 산비탈을 달려 지나가면서 칼을 좌우로 휘둘러서 자르고 달리니, 지나는 곳마다 큰 소나무가 어지럽게 쓰러져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듯하였다. 또 항상 한 쌍의 철퇴를 차고 다니면서 좌우로 휘둘렀는데, 그 무게가 각각 1백 근이나 되었다. 더러는 말을 달려 방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몸을 날려 말을 거꾸로 타고 나오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지붕에 올라가서 몸을 옆으로 하고 굴러 처마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기 전에 몸의 자세를 바꾸어 방으로 뛰어들기도 하였다.

일찍이 맹호(猛虎)가 대밭 속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자 장군이 먼저 활을 쏘아 화를 돋우니 호랑이가 놀라고 성이 나서 입을 딱 벌리고 사람을 삼킬 듯이 하므로, 장군이 창을 빼어들고 맞아 찌르니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데, 이러한 일들은 매우 많았다. 매양 스스로를 조운(趙雲_촉한(蜀漢) 때의 조자룡)에게 견주었는데, 일찍이 시를 지어 ‘군병을 거느리고 적을 무찌르고는 갑옷을 벗고 강호(江湖)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읊었으니, 그 의중을 짐작할 수 있겠다.

만력(萬曆_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임진년(壬辰年_1592년 선조 25년)에 왜구가 크게 쳐들어오자 선조께서는 용만(龍灣_의주(義州))으로 파천(播遷)하였고 이듬해에는 명(明)나라 황제가 군사를 보내어 구원하여 연이어 삼경(三京_서경인 평양, 중경인 개성, 남경인 한양)을 수복하였으나 적은 영남에 머물면서 날마다 군병을 증가시켜 재침을 노리는데, 관군과 의병들은 도처에서 무너지고 명나라에서 보낸 장리(將吏)들 역시 주저하며 관망만 하고 있었다.

그때에 장군은 모친의 상중(喪中)이어서 집에 있었는데,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과 장성 부사(長城府使) 이귀(李貴)가 서로 방백(方伯)에게 천거하였으며, 이경린은 또 군장(軍裝)까지 주면서 권유하여 싸움에 나가도록 하였다. 방백이 이에 의거하여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특별히 형조 좌랑을 제수하였다. 장군의 자부(姊夫) 김경회(金慶會)는 기개가 있고 뜻이 큰 의사(義士)였는데, 대의(大義)로써 장군을 개유(開諭)하여 11월에 마침내 상복을 벗고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수천 인(人)을 얻었다. 원수(元帥)는 영남에 있으면서 그 군대를 초승군(超乘軍)이라 표방(標榜)하였고 세자(世子)는 전주(全州)에 있으면서 장군의 기병(起兵)을 듣고 익호장군(翼虎將軍)이란 칭호를 내렸으며, 이듬해에는 선조께서 군병을 보내어 장려하고 또 군호(軍號)를 충용(忠勇)이라 내렸다.

정월 26일에 장군은 군병을 거느리고 담양을 출발하면서 영남에 고유(告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의(正義)에 의거하면 아무리 위태롭더라도 반드시 흥(興)하고 순리(順理)를 범하면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반드시 멸망하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수(淝水)가에서 진(晉)나라의 적은 군대는 능히 부견(苻堅_오호(五胡) 중의 하나인 전진(前秦)의 군주)의 대군을 무찔렀고 독부(督府, 송 고종(宋高宗) 때 우윤문(虞允文)의 수군(水軍)을 지칭)의 수군(水軍)은 오히려 금(金)나라 군주 양(亮)의 군병을 꺾었으니, 이 사실은 역사에 실려 있고 때는 고금(古今)에 다름이 없다. 이제 출사(出師)의 시기도 길괘(吉卦)를 얻었으며 정기(旌旗)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병사들은 정예하고 병기(兵器)는 예리하여 군사들의 사기가 한창 왕성한데, 저들 가마 속의 물고기가 어찌 잠시인들 지탱할 것인가?” 하였다.

남원에 도착하여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있을 때에 이 고을에 사는 사인(士人) 최담령(崔聃齡)을 얻어 별군(別軍)으로 삼고 2월에 영남 지경으로 진출하니 군성(軍聲)이 크게 떨쳤다. 왜적이 장군의 위명(威名)을 듣고 석저장군(石底將軍)이라 부르며 벌벌 떨면서 감히 나오지를 못하였고, 적장 청정(淸正)은 남몰래 화공(畵工)을 보내서 장군의 형상을 그려 오라 하여 그 그림을 보면서 이르기를, “참으로 장군감이다.” 하고 병졸을 거두어 노략질을 못하게 하는 한편 여러 작은 진지를 철폐하고 병졸을 취합하여 대기하게 하였다. 장군은 도원수를 찾아뵙고 그 절도(節度)를 받았다.

또 장군 곽재우(郭再祐)에게 서찰을 보내서 원수를 함께 토벌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조정에서 제도(諸道)의 의병을 혁파하고 장군 휘하에 전속시키므로 마침내 장군은 병졸을 영솔하고 나아가 일본에 격문을 발송하니, 이에 원근에서 향응(響應)하고 진동하였으며 휘하 장졸들도 용기백배하여 날뛰면서 전의(戰意)에 충만하였고 관군과 명군(明軍)으로 왜적들에게 포위되어 몸을 숨기고 있는 자들도 모두 장군에게 의중(倚重)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에 조정에서는 이미 화의(和議)를 받아들여 제장(諸將)에게 경계하여 교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장군은 부득이 진주(晉州)에 주둔하면서 크게 군병을 집결시키고 밤낮으로 더욱더 전비(戰備)를 수치(修治)하고 널리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전수(戰守)할 계책을 세우고 누차 조정에 출전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고, 또 장군의 위명(威名)을 시샘하고 성공을 꺼려하는 자가 있어 백방으로 저해하였다. 장군은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화(禍)만 닥칠 줄을 알고서 마음에 격렬한 울분이 쌓여 날마다 술만 마시다가 마침내 마음의 병을 얻게 되었다. 그때에 군중에 죄를 범한 자가 있어 장군이 참(斬)하였는데, 혹자가 무죄한 자를 죽였다고 무고함으로써 장군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라 명하였으나 대신이 힘써 구하여 풀려났다. 임금께서 장군을 소견(召見)하여 위로하고 어구마(御廏馬)를 내리면서 속히 본진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 뒤에 이몽학(李夢鶴)이 호서(湖西)에서 반란을 일으켜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때에 뜬소문이 돌기를, “김(金)·최(崔)·홍(洪)이 함께 반역하였다.” 하였는데, 김은 장군을 가리키고 최는 장군의 별장인 최담령이요, 홍은 이천(利川)의 장사 홍계남(洪季男)을 이른 말이다. 또 적당(賊黨) 한현(韓玄)이 체포되어 문초한 결과 그 뜬소문이 실제라 하였고, 또 곽재우·고언백(高彦伯)도 그의 복심(腹心)이라고 말하였는데, 모두 일시의 명장들이었다. 그때에 충청병사(忠淸兵使) 이시언(李時言)과 경상병사(慶尙兵使) 김경서(金景瑞)가 더욱 장군을 꺼려서 시기를 이용해 죽이려고 밀계(密啓)하여 장군이 반역할 정상이 있다고 말하고,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이시언 등의 말에 동조하니, 임금께서 대신들과 의논하여 장군을 체포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앞서 도원수 권율(權慄)이 장군을 보내서 호서의 역적 이몽학을 토벌하게 하므로, 운봉(雲峰)에 이르러 이몽학이 이미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고 진주(晉州)로 환군하였는데, 얼마 안 돼 장군이 체포되어 함거(檻車)에 실려 서울에 오게 되었다. 장군이 말하기를, “나는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어 맹세코 적을 격멸하고자 하는데, 어찌 역적을 추종하여 반역을 꾀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만일 딴 뜻이 있었다면 처음에 어찌 도원수의 영을 받들어 이몽학을 치려고 운봉까지 갔겠으며, 이몽학이 생포된 뒤에 또 어찌 병을 인솔하고 본진으로 돌아갔겠습니까? 다만 신은 상중(喪中)임을 불고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재공(才功)이 없어 충의를 펴보지 못하고 되려 효도만 손상케 하였으니, 이는 신이 죽을 죄를 지은 것입니다. 또 신은 죽는다 해도 최담령은 죄가 없으니, 청컨대 신 때문에 최담령까지 죽이지는 말아주십시오.” 하였다.
임금께서 제신(諸臣)에게 물으니, 정탁(鄭琢)공과 김응남(金應南)공 등은 “김덕령이 틀림없이 반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힘써 말하였으나 영상 유성룡(柳成龍)만은 대답이 없었다. 임금께서 괴이히 여겨 물으니 유성룡이 대답하기를, “이 뒤에 만일 어떠한 생각지 않았던 일이 생긴다면 김덕령같이 용맹한 자를 놓아주었다가 다시 잡아들일 수 있을는지는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엄형을 가하여 마침내 옥중에서 죽으니, 나이는 29세요, 때는 병신년(丙申年_1596년 선조 29년) 8월이었다. 국인(國人)이 슬퍼하고 애석해 하기를 마치 송(宋)나라 사람들이 악 무목(岳武穆, 악비)을 슬퍼하듯 하였다. 최담령과 곽재우 등도 옥에 갇힌바 되었으나 뒤에 모두 풀려났다.
처음 장군을 체포할 때에 조정에서는 장군이 명령에 따르지 않을까 의심하여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음밀한 일로 불러 영내(營內)에 들어오면 포박하게 하자, 승지 서성(徐渻)이 말하기를, “김덕령은 반역할 사람이 아닙니다. 사자(使者) 한 사람만 보내서 잡아오게 하면 될 것을 구태여 사계(詐計)까지 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니,
임금께서 서성이 말을 쉽게 하는 것을 의아스레 여겨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네가 가서 잡아오너라.” 하였는데, 서성이 도착하니 이미 진주옥(晉州獄)에 갇혀 있었다. 장군이 도착하자 조정에서는 더욱 의심하여 철쇄(鐵鎖)로 묶고 큰 나무를 끼웠는데 장군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만일 반역하려고 한다면 이따위로 어찌 나를 금족(禁足)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몸에 불끈 힘을 주니 철쇄가 모두 끊어졌다.

처음 장군이 기병(起兵)할 때에 서석산(瑞石山) 골짜기에서 큰칼을 만들었는데, 칼이 만들어지자 산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울리고 흰 기운이 산골짜기에서 하늘까지 뻗치어 며칠간을 사라지지 않았다. 그 고을에는 옛 고려 명장 정지(鄭地)의 무덤이 있으며, 자손이 대대로 정지의 철의(鐵衣)를 간수하고 있었는데, 장군이 그 철의를 입고서 칼을 차고 정지의 묘소에 가서 제사를 올리는데, 그때 차고 있던 칼이 저절로 풀려 땅에 떨어지기를 세 번이나 하니 사람들이 모두 괴이히 여기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였다. 진주에 있을 때에 목장 안에 사나운 말이 있어 한번 뛰면 나는 듯하여 사람들이 얼씬도 못하였는데, 장군이 그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굴레를 씌워 올라타니 말이 매우 길들여진 듯하였다. 그 뒤에 장군이 처음 체포되었을 때에 말이 며칠 전부터 먹지를 않더니 재차 체포될 때에도 또 열흘이나 먹지 않아 사자가 아직 오지 않았으나 장군은 이미 화가 닥칠 것을 미리 짐작하였다.

그때에 당화(黨禍)는 이미 일어났었고 거기에다 병란까지 겹쳐 국가는 곧 망하게 되었으나 붕당을 하는 자들은 그래도 틈을 만들어 더욱 심하게 치고받았으며, 선비로서 외방에 있는 사람도 서로 끌어들여 미워하고 저해(沮害)하게 하였다. 장군은 비록 당인(黨人)은 아니었으나 자부(姊夫)로서 공을 권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했던 김경회(金慶會)공과 장군은 모두 정송강(鄭松江, 정철(鄭澈))과 같은 고을 사람이고 김경회는 또 우계(牛溪) 성선생(成先生, 성혼(成渾))의 문인이었다. 그때에 송강과 우계는 모두 당화(黨禍)를 입은 우두머리였으므로, 이 때문에 김경회 역시 동시에 무함을 당하여 체포되어 거의 죽게 되었다가 다행히 모면하였는데, 장군은 더욱 일시 제장(諸將)들의 꺼리고 미워한 바 되었는데다가 집정자(執政者)가 안에 있으면서 거들었기 때문에 마침내 면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장군이 죽은 뒤로 제장들은 각기 자신들이 보전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의심하여, 곽재우는 군병을 해산한 다음 세상을 등지고 은둔 생활을 하여 화를 피하였으며, 이순신은 한참 승전할 즈음에 스스로 적환(敵丸)을 맞고 죽으니, 호령(湖嶺) 사이에서는 부자 형제가 서로 의병에 가담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는데, 적이 장군의 죽음을 듣고는 비로소 날뛰고 즐거워하면서 이르기를, “김덕령이 죽었으니, 더는 두려울 것이 없다.” 하였다.

장군은 아들이 없다. 효종(孝宗) 때에 이르러 설원(雪寃)하고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장군의 형 김덕홍(金德弘)은 고경명(高敬命)공을 따라 금산(錦山)에서 전사하였고, 장군의 처 이씨(李氏)는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병란을 피하여 담양(潭陽)에 있다가 적을 만나 심하게 꾸짖고는 굴하지 않고 죽었다.

논(論)하기를, 김 장군이 군사를 일으킨 지 4년에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하고 결국은 무함을 받아 죽었으니, 어찌된 일인가? 대체로 장군은 위명(威名)이 너무 성하여 이르는 곳마다 적은 군병을 거두고 먼저 피해버려 끝내 한 번의 교전도 하지 못하였고, 안으로는 꺼리고 미워하여 해치려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화의(和議)와 당화(黨禍)도 그 사이에 끼어들었으니, 공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장군이 군중(軍中)에 있을 때에 화란(禍亂)이 꼭 닥칠 것을 염려하고 아우인 김덕보(金德普)에게 이르기를, “너에게 만일 나의 용맹이 있고 나에게 혹 너의 지혜가 있었다면 몸도 면할 수 있고 공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하니, 어찌 장군이 충용(忠勇)을 스스로 떨칠 뿐 보신(保身)하는 지혜는 강구할 겨를이 없었으리오?
비록 그러나 응후(應侯)가 백기(白起)를 죽이니 소왕(昭王)은 걱정하는 빛이 있었고[각주 1], 송인(宋人)이 단도제(檀道濟)를 죽이니 위병(魏兵)이 양자강(楊子江)에 이르렀으며[각주 2], 진회(秦檜_송 고종(宋高宗) 때 금(金)과의 화의(和議)를 주장했던 재상)가 악 무목(岳武穆)을 죽이니 송(宋)나라는 그로 인해 망하였는데, 꼭 당자가 모두 꾀에 공교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아! 이 어찌 천운이 아니겠는가?

 


각주

  1. 응후(應侯)는 전국 시대 진 소왕(秦昭王)의 재상이었던 범수(范睢)를 이른다. 당시에 장군 백기(白起)가 주위의 나라들과 싸워 공격하는 곳마다 탈취하여 무려 70여 성(城)이나 되는 등 명성을 떨쳤는데, 뒤에 범수와 틈이 생겨 죽임을 당한 일을 말한다.
  2. 단도제(檀道濟)는 남북조 시대 송 무제(宋武帝)를 도와 많은 전공(戰功)을 세워 인민이 복종하였으며, 무제(武帝) 때에 위(魏)나라를 정벌하고서 전군(全軍)을 보전하여 돌아와 사공(司空) 벼슬에 임명되자, 조정에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거짓 조서(詔書)를 내려 불러들이어 주살하였는데, 위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즐거워하며 ‘단도제가 죽었으니 꺼릴 것이 없다.’고 하더니, 얼마 후 위군(魏軍)이 공격해 왔던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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