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기억을 걷다] 용두동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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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천년 역사 고도, 광주

남도 유일의 북방식, 용두동 고인돌

 

고인돌(支石墓, Dolmen)은 크고 평평한 바위를 몇 개의 돌로 괴어놓은 고대의 거석 구조물을 가리킨다. 계급 분화가 시작된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자(족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돌화살촉, 민무늬토기, 비파형동검, 곱은 옥 등이 부장품으로 발견되어 제작 시점을 알려준다. 고인돌은 납작한 판석이나 덩이돌 밑에 돌을 괴여 지상에 드러나 있는 ‘괴여 있는 돌’이란 뜻의 괸돌이나 고임돌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은 겉모습의 차이에 따라 북방식(탁자식) 고인돌과 남방식(바둑판식) 고인돌로 나뉜다. 북방식 고인돌은 탁자 또는 탁상 모양의 고인돌로, 보통 돌멘이라고 불리는 멋쟁이 고인돌이다. 네 개의 판석을 세워 평면이 장방형인 돌방을 구성하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것으로 돌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2~4미터가 보통이나 8미터가 넘고 무게가 수십 톤이 나가는 것도 있다. 주로 한강 이북에 분포하며 전북 고창이 남방한계선이다. 남방식 고인돌은 매장 시설의 주요 부분이 지하에 설치되어 북방식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판석 또는 할석이나 냇돌을 사용하여 지하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려놓는다. 남방식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지만 전라도, 경상도 등 한강 이남에 주로 분포한다.

고인돌은 가장 위에 놓인 덮개돌과 이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굄돌), 밑에 마련된 석실인 무덤방과 무덤방을 덮는 뚜껑돌로 구성된다. 무덤방에서는 사람 뼈나 부장품이 발굴되는 경우도 있다. 덮개돌이나 뚜껑돌에는 별자리 모양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별자리 모양은 석기시대 이전부터 토속신앙의 상징으로 고대 한반도의 기복신앙이나 고대 천문학의 기원으로 추정된다. 여수 오림동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신앙을 나타내는 암각화가 그려진 고인돌도 확인된다.

이러한 고인돌은 스칸디나비아반도로부터 지중해 일대까지의 유럽 지역, 인도, 동남아, 중국 동부 해안지대, 한국, 일본 등지에 널리 분포한다. 한국에는 약 3만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전남에는 2만여 기가 분포하고 있어 세계적인 고인돌 왕국을 이룬다. 그중 200톤이 넘는 세계 최대 크기의 고인돌과 덮개돌을 떼낸 채석장을 간직하고 있는 화순 효산리·대신리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만여 기가 분포하는 고인돌 왕국 남도에서 광주도 예외일 수는 없다. 광주의 고인돌은 광산구 29곳, 남구 15곳, 서구 13곳, 북구 6곳, 동구 3곳에서 수백 기가 확인된다. 주로 도시의 외곽지대인 광산구에 많이 분포하고 있어 얼른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광산구 삼거동에는 반경 200미터의 구릉 안에 49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어 광주 지역 최고의 밀집도를 자랑한다. 광주의 고인돌 유물은 매월동에서 출토된 완형의 석검과 석착(돌로 만든 끌)을 제외하면 무문토기 편 등 매우 빈약하다.

용두동 북방식 고인돌

이러한 상황에서도 축조 시기 및 유적의 하한 연대를 알려준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인 점토대토기가 출토되었다. 또한 서구 용두동에서는 북방식(탁자식) 고인돌 1기가 확인되었다. 이는 북방식의 남방한계선이 전북 고창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음을 확인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광주를 대표하는 고인돌 유적 중 하나는 북방식 고인돌이 확인된 서구 용두동 학동 마을이다. 광주~송정 간 도로의 극락교 앞에서 왼쪽길로 접어들어 서창동사무소를 지나 대촌동사무소 쪽으로 가다 고개를 넘으면 바로 왼쪽 송학산(209m) 기슭에 있다.

학동 마을은 5가구 정도가 사는 아주 조그마한 마을이다. 입구에 난 작은 길을 따라 70미터쯤 가면 고인돌을 만날 수 있다. 고인돌은 남북으로 3열로 배치되어 있는데 우측 열의 보존 상태가 가장 완전하다. 현재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10기이며, 덮개돌이 없는 굄돌 7개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2~3기가 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용두동 고인돌의 덮개돌은 높이가 대부분 50센티미터 정도이나 입구에 자리 잡은 고인돌은 가로 140센티미터, 세로 120센티미터, 폭이 50센티미터로 가장 크다. 주변에 채석장이 없는 것으로 보아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인근 송학산에서 채석해 온 것으로 보인다.

용두동 고인돌군의 가장 큰 특징은 남도 유일의 북방식 고인돌 1기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3호 고인돌로 불리는 이 고인돌은 모두 3기의 굄돌이 있는데, 대부분의 북방식 고인돌에 비해 그다지 높지 않은 변형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강화도 고인돌과는 달리 남부 지방으로 내려올수록 북방식 고인돌의 굄돌 높이가 짧아지고 크기도 작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평하지 못한 두꺼운 모습의 덮개돌과 날씬하지 못한 뭉뚝한 모양의 굄돌은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북방식 고인돌이 있는 학동 마을은 뒤에 송학산이 위치하며 마을 앞 가까이에 극락강이 흐른다. 배산임수지인 송학산 자락은 청동기인들의 최적의 취락지가 아닐 수 없다. 학동 마을 가까이에 갈판과 갈돌이 출토된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송암동 주거지가 있음도 그 증거이다. 용두동 북방식 고인돌은 송학산에서 채석한 덮개돌을 옮기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 남도의 소중한 문화 원형이다. 그 문화 원형 가까이에 전국 최초로 향약을 시행했던 부용정, 88올림픽 식전 행사를 장식한 고싸움의 마을과 고경명 사당인 포충사도 있다.

용두동 북방식 고인돌의 모습이 어쩐지 외로워 보인다. 남방식 고인돌이 대부분인 남도에서 유일하게 북방식이기도 하지만, 모습 자체도 어쩐지 불안하다. 외로워 보이는 이유는 또 있다. 만귀정, 금당산 등과 함께 서구 8경으로 선정되어 있는 오늘의 문화재임에도 관리가 너무 허술하기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 화순 고인돌

남도에서 고인돌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유물이다. 우리나라 고인돌 3만여 기 중 2만여 기 이상이 남도에 있기 때문이다. 남도의 고인돌 밀집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영남 4,800여 기, 강원 2,000여 기, 충청 1,000여 기, 전북 2,000여 기, 북한 4,000여 기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2만여 기가 넘는 남도 고인돌 중 화순 효산리·대신리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계곡 사이에 입지해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둘째는 고인돌의 축조 과정을 알 수 있는 채석장이 함께 존재하고 있으며, 셋째는 거대한 고인돌이 다수 있고, 넷째는 크고 작은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공존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축조 연대를 알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화순 대신리 고인돌에서 나온 목탄의 방사성 탄소 연대가 기원전 2500±80년으로 측정되어 기원전 2500년경에 고인돌이 축조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채석장 아래에서 아가리 부분에 삼각문과 점열문이 있는 토기도 출토되어 기원전 10세기 이전의 유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핑매바위라 불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돌

화순 고인돌 유적의 명물은 길이 7미터, 두께 4미터, 무게 200톤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고인돌로 알려진 핑매바위다. 마고할미가 운주골에서 천불천탑을 세운다는 소문을 듣고 치마에 돌을 싸가지고 가는데, 닭이 울어 탑을 다 쌓았다고 하자 돌을 버리고 발로 차버렸다고 해서 핑매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핑매바위 위에는 구멍이 있는데 왼손으로 던져 그 구멍에 돌이 들어가면 아들을 낳고, 들어가지 않으면 딸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노성태
'다시 독립의 기억을 걷다', '광주의 기억을 걷다' 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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