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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0일과 11월 3일
1950년 음력 11월 10일은 내가 장성 삼계면 발산리 대무동에서 태어난 날이고, 일주일 전 11월 3일은 선친이 피난지 황룡에서 장성 경찰서로 자수하러 나가신 후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날이다. 그러니까 나는 유복자인 셈이다.
1950년 6․ 25 한국전쟁 중, 삼계면에 사는 주민들은 모두 피난을 떠나야 했다. 삼계면은 인근 장성읍에 비해 2달 후에 국군에 접수된 적성지역에 해당되던 곳이다. 우리 가족은 장성 황룡면 북촌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피난민들 중 부역한 사실이 있거나, 젊은이들은 경찰과 군인, 청년단들의 검문 검색을 피해 몸을 숨겨야 했다.
며칠 후 피난 나간 우리 동네 청년 세 명(오OO 20세, 오OO 23세, 진OO 26세)이 군경 토벌대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 동네 이장과 백부님은 나의 선친(당시 48세)과 장형(당시 23세)에게 경찰서에 가서 자수할 것을 권유하였다. 만일 자수하지 않으면 우리 가족은 물론 큰집, 작은 집까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큰 형은 다음날 아침 의복을 잘 갖추고 가슴에 태극기를 품은 채 집을 나섰다. 이 후 우리 가족은 두 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3남 일근형의 죽음.
다음날 가장과 장남이 돌아오지 않은 우리가족은 깊은 시름에 젖어 있을 때, 숙부님은 삼계면으로 가야한다고 하여 황룡면을 나선다. 전날 학살된 청년 중 한명도 사촌형이었다. 혹한의 추위에 우리가족 8명과 작은집 가족 5명은 30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피난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어머니는 만삭의 배(나)를 움켜쥐고, 머리에는 피난 보따리를 이고 가야하는 힘든 귀향길이었다. 19살 큰딸, 16살 아들, 14살 아들, 12살 딸, 9살 아들, 6살 딸, 3살배기 아들까지 주렁주렁 매달리는 가족의 행렬이었다.
10여리를 걸었을 때, 3남인 일근 형은 “아버지와 큰형이 없는데!… 집에는 왜? 가요!~ 난 절대 갈 수 없어요, 난 안 가!!”
막무가네로 떼를 쓰는 동생을 둘째 형이나 누나들이 아무리 달래봤자, 허사였다. 숙부님의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 난간을 잡고 버티는 것이었다. 해는 벌써 서산에 걸렸다.
할 수없이 우리 가족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고, 산 귀퉁이를 돌아가며, 애타게 부르는 가족들의 메아리만 남긴 채 3형은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한참을 걸었을 때, 30여명의 무장 군인들이 지나갔다. 3형은 틀림없이 이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이다. 휴전 후 전해들은 소문으로만 안다. “우리 아버지는 오*자*자이고요, ***을 지냈어라! 우리 아버지를 내놓으시오!” 일근형이 군인들에게 외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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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자(遺腹子)의 탄생
피난처에서 돌아와서 본 우리 동네는 처참하였다.
걷기가 힘들었던 노인들 7~8명은 마을에 남겼는데, 이분들은 모두 그동안 토벌대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얼굴이 모두 사색이 되어 있었다. 마을은 온통 불타버렸고, 폐허가 되어 있었다. 다행이 우리 집은 남아 있었고 어머니는 다행이다 싶어 이곳에서 몸을 풀 요량으로 “나가라”는 토벌대 군인들의 위협에도 버티었다.
그러나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동네 주민들이 모두 나가고 우리 가족만 남아 있을 수만 없었다. 2~3일 더 버티다가 “니들이 여기 남아서 반란군 밥해 줄라고 그러지?! 이 빨갱이 새끼들! 빨리 나가! 여기 있으면 다 죽여버린다!” 금방 해산할 지도 모르는 어머니의 사정을 아무리 말해도 군인들은 총부리를 들이대고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우리 7식구는 먹을 것 몇 되만 챙겨 사창으로 피난 길을 떠나 비좁은 방에 들어갔다. 방 하나에 열 몇 명이 자야하는, 발을 뻗지도 못하고 쭈구려 앉아서 자야하는 피난처였다.
다음날, 어머니는 “순애야(19세)!, 나 애기 낳을것 같다. 곧 애기가 나올라 한다…. 집으로 가자!”
피난처 그 방에서는 도저히 해산할 장소가 아니었다. 강추위에 한 방에 열 명이 넘게 기거해야 하는 방이었다.
우리 식구는 다시 길을 나서 대무동으로 떠난다. 2km 남짓한 산골인지라 몇 십 미터마다 보초가 서서 검색을 한다. 꼬치 꼬치 묻고 짐을 풀어보고…. 어린 자식들은 고사하고 만삭이 된 어머니는 해산의 고통을 참느라 식은 땀이 줄줄 흐른다.
몇 시간을 걸려 집에 도착한 산모는 쉽사리 몸을 풀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다가 밤 9시가 넘어서야 겨우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나다. 모든 문에는 이불이나 거적으로 불빛이 새나가지 못하게 방광막을 쳤다. 호롱불 하나만 요강 속에 숨긴 채…
만약에 불빛이 새어 나가면 미군 폭격기가 즉시 폭격을 가해 버리니까…
19살 큰 딸이 어머니 탯줄을 자르려는데… 가위가 없어서 이빨로 태를 끊었다. 그래서 나는 명이 길거라고 누나가 말해 주었다.
다음날 또 토벌대 군인들이 들이 닥쳤다. “이것들은 뭐야? 또 언제 기어들어 왔어? 빨리 문 안 열어? 다 죽여 버릴테니까! 빨리 다 나와!~” “우리 엄니가 어젯밤에 얘기를 낳았어요!” 사정하는 딸의 말에도 군홧발로 문을 걷어차고 협박이다.. “내가 얘를 낳서 피가 이렇게 질질 흐르는데, 어떻게 나가요! 며칠만 참아 주시오” 할 수 없이 어머니는 있는 힘을 다해 사정을 하신다. 군인들은 이제 막 해산한 산모를 보고서야 한발 물러섰다.
3일 후 우리 가족은 다시 사창으로 피난처를 옮겨 혹독한 추위가 심했던 그 해 겨울을 짚으로 둘러친 움막에서 살아 남는다. 당시 피난민 어린 아이들은 많이 죽어 나갔다.
이듬해 봄, 군인들이 무서워 불야 불야 시집을 보내버린 큰 누나가 집에 와보니, 나는 작은 누나의 등에 엎혀 있었는데, 고개도 못 이기고, 몸이 빼빼 마른 요즘 TV에서나 보는 아프리카 난민 같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