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스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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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스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2019년 5월 25일 토요일
유미정

 

아침에 서둘러 운정동(옛 망월동) 5·18 국립묘지로 향했다. 가는 길에 늘어선 가로수와 산등성이 녹음이 짙푸르렀다. 5월 양광(陽光)이라더니 어느덧 여름이 다 되었다.
노성태 선생님을 묘지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일전에 <동고송> 선생님들 몇 분이 모여 노성태 선생님에게 해설을 요청하였다. 노선생님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한 희생된 분들의 사연을 많이 알고 계셨기에 묘지 참배와 더불어 순례 해설을 듣기로 하였다. 오늘이 그날이다.
10시 즈음 노성태 선생님, 이은주 샘, 황 샘이 시간에 맞추어 오셨고, 나익주 샘, 문월식 샘은 미리 와 계셨다. ‘님을 위한 행진곡’에 맞춰 행진을 하니 그날의 함성이 가까이서 들려온 듯하였다. 묵념을 올린 후 높다란 5월 광주민중항쟁 추념탑을 바라보았다.
추념탑은 우리 전통의 당간지주를 본떴다고 한다. 당간지주는 큰 절 앞에 세웠던 단단한 버팀목을 말한다. 탑 가운데 오목한 곳에 동그란 알까지 품고 있다. 그 알은 부활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제 오월은 당간지주처럼 단단하게 부활하여 다시 살아날 것이다.
묘역을 오르는 길 좌우를 둘러보니 번호를 새긴 비석들이 끝없이 보였다. 그 앞에 놓인 하얀 국화의 빛이 선연하였다. 노성태 선생님은 5·18 당시 처음 희생된 분의 묘지로 우리 일행을 안내하였다.

  1. 김경철의 묘 : 김경철은 5·18 최초 사망자이다. 어릴 때부터 청각장애가 있는 장애인으로 광주 국제양화점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당시 결혼하여 딸을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1980년 5월18일 금남로 제일극장 앞에서 계엄군에게 걸려 하나, 둘, 셋이라는 구호소리를 듣지 못하고 장갑차에 올라가지 않자, 2명의 계엄군이 특수살상용 곤봉으로 그를 마구 구타했다. 결국 그는 전신타박상으로 나이 29살에 숨을 거뒀다.
  2. 류동운의 묘 : 한신대학교 79학번 학생. 류동운은 경북에서 태어났지만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류동운은 시위 도중 계엄사에 체포되어 머리는 깨지고 온 몸은 멍이 들었다. 그의 마지막 일기에는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이 역사를 위해 한 줌의 재로 변합니다. 이름 없는 강물에 띄워주시오.” 계엄군이 도청을 함락한 뒤 그는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아버지는 그 치아만으로 아들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아버지 류연창 목사는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3. 황호걸의 묘 : 황호걸은 1980년 5월 23일 지원동 주남마을에서 총상으로 사망했다. 당시 그는 광주일고 부설 방송통신고 3학년생이었다. 5·18 당시 희생된 광주 학생들은 16개 학교 학생 18명이다. 황호걸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방통고에 진학했다. 도청 지하실에서 시신에 묻은 피와 오물을 닦아주다 관이 부족해 화순으로 관을 구하러 가다가 매복해 있던 군인들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황호걸은 구한말 의병대장 황병학 선생의 손자이다. 노성태 선생님은 “의로운 죽음엔 끌텅(근거)없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역사적 인물들을 곁들여 설명하였다.
  4. 방광범의 묘 : 방광범은 80년 5월 24일 진월동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그는 당시 전남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5. 전재수의 묘 : 안장된 묘 가운데 사진도 놓이지 않는 묘가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전재수의 묘이다. 너무 어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아니 아버지가 가슴이 아파 아이의 유품을 모두 태워 없애 그랬다고도 한다. 전재수는 80년 5월 24일, 마을에서 놀다 계엄군의 총소리에 놀라 뒷동산으로 뛰어올랐다. 어머니가 사준 새 고무신이 벗겨지자 뒤돌아 주우러 가다 가슴에 총을 맞았다. 당시 인근에 11특전 여단, 7특전 여단과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이동 중이었다고 한다.
  6. 문재학의 묘 : 문재학은 광주상고 2학년생으로 80년 5월 27일, 항쟁의 마지막 날에 안종필 학생과 조대부고 3학년 박성용 학생과 함께 사망하였다. 문재학은 도청에서 최후 항쟁을 하였다. 문재학은 계엄사 4-3, 묘지번호 104, 관 번호 94번으로 당시 전남일보 사망자 명단에 실렸다. 안종필도 도청에 있다가 새벽 2시경 총상으로 사망하였다. 안종필은 유품으로 며칠 전 맞춘 교복 영수증과 돈 오백원을 남겼다. 박성용은 “광주공원에 친구가 갔는데 아무래도 죽은 것 같다”며 자취하는 친구를 걱정하다 26일 나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7. 박금희의 묘 : 박금희는 ‘오월의 꽃’으로 불린다. 박효선 작, <금희의 오월>이라는 연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80년 5월 21일은 집중사격이 있었던 날이었다. 이날 어린 학생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춘태여상(지금 전남여상) 3학년생이었던 박금희는 혈액이 부족하다는 방송을 듣고 오후 5시,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고 기독교 병원으로 가서 헌혈을 했다. 헌혈을 마치고 나오는 도중 헬기 사격으로 요부와 복부를 관통당해 사망했다.
  8. 신영일의 묘 : 노성태 선생님은 신영일의 묘 앞에서 “5·18 이전에는 박관현이 있었고, 5·18 가운데는 윤상원이 있었으며, 5·18 이후에는 신영일이 있었다라고 나는 과감히 말합니다.”라고 하였다. 신영일은 1978년 6월 29일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당한 후 박기순과 함께 ‘들불야학’의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전남대 교내시위를 주도하고, 구속수감 후에는 5 18민중항쟁 진상규명과 교도소 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40여 일간 단식투쟁하였다. 그때 박관현은 숨지고 신영일은 병보석으로 출소하였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과정 속에서 과로로 쓰러져 운명하였다. 그의 묘비문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졌다. “청년이여, 청년의 모범이여, 살아서 민중의 방패 죽어서 민중의 창이 되다. 홀로는 불꽃으로 숨 쉬며 어우러져서는 들불로 타오르다. 어둠의 산하를 헤쳐 새벽의 보람찬 세상을 함께 가고져.”

 

5·18 묘역에 묻힌 어느 영령인들 그 죽음이 고귀하지 않으리오만은 오늘은 몇 분만의 묘역을 둘러보았다.
묘역에서 바라보이는 <역사의 문>에서는 오늘 들불열사합동기념식과 들불상 시상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들불 7열사란 5·18민중항쟁을 전후로 산화한 박기순, 윤상원, 박용준, 박관현, 신영일, 김영철, 박효선 등이다. 올해는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 개정(김용균 법)을 이끌어내어 비정규직 노동문제의 해결의 단초를 마련한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님이 들불상을 받는다고 한다.
함께 그 자리에 참석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여 곧 이 묘역에 도착한다는 이규 샘의 연락이 있었다. ‘한양대 민주동우회’ 회원들과 함께한다고 했다. 노성태 선생님과 나는 신묘역과 구묘역을 돌며 그들을 안내하였다.


(동고송 선생님-문월식 나익주 이은주 황광우 노성태 유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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