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마침내 망월동에 가다.
글쓴 이 : 이은주(일동초 교사)
5.18이라고는 공부모임에서 황샘에게 들은 것이 전부다.
윤상원, 박기순, 윤한봉, 박효선 밖에 모른다.
1980년 꽃다운 나이 스무 살이었건만 나에겐 그날의 현장 경험이 없다.
수십 년 간 교단을 지켜왔지만
오월에 대해 난 아무 것도 모른다.
5.18은 나에게 조각조각 잇댄 보자기다.
20년간 망월동에 살면서
묘역을 지나 고개 넘어
호준이 아기 때부터
할머니 집에 맡기고 데려오던 길.
호준이는 할머니 집 가기 싫어
차안에 동그랗게 앉아
자는 척 체념한 듯.
눈감고 넘어갔다.
식구들 뒤치닥거리 끝난 아침.
혼자서 가는
출근길은 예쁘고 조용했다.
(집은 석곡동이고, 직장인 일동초등학교는 일곡동이다.
그래서 매일 망월동 국립묘지 앞을 지나간다)
구묘역에서 가끔 번갯불이 반짝이고
밤이 늦어도 무섭지 않은 길.
누군가 지켜 줄 것 같아
가슴 내밀고 목 제낀 채
운전하던 그런 길.
묘역입구 포장마차 꽂 집 주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한정 없는 손님을 기다리고.
꽃을 팔아 밥벌이가 될까?
조화로 알록달록한 꽃 한 다발.
죽은 자에게 산자들은
산자에게 죽은 자들은
어떤 의미일까?
순간을 클로즈업해서 이 풍경을 시로 써보고 싶다
생각하며 지나갔다.
5월이면 태극기가 날리고
하얀 이팝 꽃 눈 내리는 그 길이
더욱 더
환해지고 숙연했다.
5월만 되면 동네가 복작거리고
유명 정치인들이 왔다 갔다 해서
나도 함 가보기로 했다.
올해 처음 기념식에 갔다.
밖에서 안으로.
지척을 앞에 두고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가는
출입국 절차처럼 무시무시했다.
핸드백이 검역대로 들어가고
내 몸을 무기검색대로 샅샅이 훑고.
산자들을 위한 의식이 진행되고..
접수처에 초대장을 내밀고 비옷과 뺏지를 받았다.
한손에 우산을 또 한손에 가방을 든 채
엉거주춤 비옷을 입고 뺏지를 왼쪽 옷가슴에 달았다.
다시 줄을 서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큰 아들이 사준 손가방을 비에 젖을까봐
비옷 속으로 넣어 보듬어 안고 기다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간편한 걸로 챙겨 올 걸….
우산에 비옷에 앞이 잘 안 보인다.
줄이 점점 짧아져서 다가가 보니
공항 출입국 관리대에서 보던 검색대가 떡하니 서 있다.
검색대 안으로 들어간 앞 사람의 가방이
저쪽 구멍으로 나와 비에 젖은 바닥으로 나 딩굴었다.
나는 더 가방을 움켜쥐고 쏟아질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고 단단히 여민다.
앞사람이 핸드폰을 들고 나가다 검색 요원이 다시 가져가는 걸 보고
나는 손가방에 모든 소지품을 다 넣고 검색대에 최대한 바른 자세로 넣었다.
다행히 가방이 똑바로 나오고 나는 다시 몸 검색하는 사람 앞에 섰다.
“몸에 뭐 넣어 둔거 없지요?”
“네. 없습니다.”
“이상 없습니다. 들어가세요.”
몸의 앞뒤를 검색기로 훑어 내리고
양팔을 벌리게 한 다음
겨드랑이까지 샅샅이 검색기로 훑던 여자 검색원이.
“들어가세요.”
한다.
순간 마음이 놓인다.
잔뜩 흐린 날씨에 비는 내리고
하얀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유령들처럼 보인다.
우산을 든 사람들 때문에 앞이 안 보인다.
어두운 색감의 우산들 사이로 내가 들고 있는
고흐의 아몬드꽃이 핀 풍경 그림의 화사한 하늘색 우산이 멋쩍다.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다시 헤메다.
그래도 이왕이면 앞에 앉아야지 하고 앞으로 계속 나가다가
앞자리가 많이 비어 있어 들어가려고 하니
경호요원인 듯한 남자가 막는다.
줄을 사이에 두고 앞쪽만 빼고 뒤로 가서 아무데나 앉으라고 한다.
부랴부랴 자리를 찾으니 중간 쪽의 앞자리는 비어 있는 곳이 없다.
뒤로 다섯, 여섯 번째 줄 통로 쪽 자리가 마침 한 자리 비어있다.
비에 젖은 플라스틱 의자를 닦아내지도 못하고
비옷으로 엉덩이를 감싼 채 앉았다.
우산들이 앞을 가려 앞이 안보여 답답하다.
그나마 통로 쪽이라서 작게나마 무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앞쪽 왼편에서 소란스럽다.
순간 앞으로 ‘황교안 물러가라’는
손 플래카드를 들고 선 사람들이 보인다.
카메라들이 일제히 위로 향하고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사진을 찍는다.
여기저기서 앉으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고
왼쪽 옆 통로로 중년의 남자 한 사람이 떠밀려 나왔다.
무섭고 걱정이 된다.
난동을 부린 사람이 있나?
내가 접어들고 있던
고흐의 아몬드 꽃이 핀 파란색 우산을 의자 밑쪽으로 놓았다.
비에 젖을까봐 손가방을 책보자기로 덮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기다린다.
조금 있으니 내 앞 오른쪽 통로로 누군가가 마주 오고 있다.
아직도 자리를 못 잡았나? 하고 있는데.
“씨발놈이 오지 마란께. ….한국당 새끼들이 여길 왜 와?”
가까이 와서 쳐다보니 아까 왼쪽 옆 통로로 밀려 나온 그 남자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다들 가만히 있다.
긴장감이 흐른다.
“씨발…” 하며 뒤쪽으로 나간다.
신기하게도 식이 시작되려고 하니 비가 멈추기 시작한다.
사회자가 우산을 접어 달라고 당부한다.
이제 비도 그치고 차분히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통로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보니
비옷 사이로는 잘 몰랐는데 가슴에 단 뺏지 색깔이 다 다르다.
하늘색, 보라색, 초록색.
어떤 구분일까?
난 하늘색 뺏지다.
저 앞으로 심상정 의원이 뒤쪽의 우리들을 보며 웃으며 지나간다.
얼른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순간 지나가 버렸다.
1년 전, 이곳에서 만난 노회찬 의원이 떠오른다.
기념탑 앞에서 같이 사진도 찍었는데..
너무 안타깝고, 아깝고, 아쉽고..
또 많은 정치인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정면 사진을 찍었다.
동고송이랑 공부모임, 아들, 딸들 카톡으로 보냈다.
유미정 샘으로부터 답이 오고.
막내아들(자칭 ‘부료 막시무스’, ‘모가 베레나쓰’ 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음)에게 대통령 왔어? 라는 문자가 오고
어제부터 비가 와서 초대장을 들고 기념식 갈까 말까 망설이는걸 보고
“내일 대통령도 온다던데..” 라고 은근히 힘을 주던 아들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기다린다.
경호 요원들이 갑자기 가운데 통로를 정리하더니.
‘이런 행운이…’
문재인 대통령이 내가 앉아 있는 통로를 지나서 들어온 것이다.
일어서지 못하게 해서 앉은 채로 얼른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대통령이 입장하였다.
그룹사운드 블랙홀의 ‘마지막 일기’
전남 도청 앞 무대 위에서 부르는 모습을
양옆 대형 스크린으로 보여 주면서 식이 시작되었다.
노랫말과 곡이 가슴에 새겨지는 것처럼 또렷하게 감동으로 와 닿는다.
모르는 가수인데… 노래가 시처럼 경건하고 웅장하게 들린다.
개식 선언,
국민의례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다.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대표로 헌화와 분향을 했다.
정춘식 회장이 518 민주화 운동 경과보고를 했다.
166명이 죽고 112명이 다치고…
내가 난청인지 마지막 글을 읽는데..
오늘 날짜를 2017년 5월 18일 로 읽는 것으로 들렸다.
80년 5월의 영상을 보여 주었다.
안종필 모친의 사연이 나오고
눈물이 계속 나온다.
황교안 같은 사람도 보면서 느끼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날이 오면’ 이라는 노래를 듣고 영상을 보며 또 울었다.
기념사가 시작되고 대통령이 기념사 중 울먹이고..
여러 차례의 박수소리 때문에..
기념사가 중단되고..
대통령은 또 기다리고..
시원하고 감동적이다.
기념사가 끝나고 모두 일어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사회자가 폐식 선언을 하며
대통령이 묘역 탐방을 하니까 퇴장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한다.
혼자서 쭈뼛거리고 서성이다가
기념사진이나 찍으려고 기념탑 앞으로 나갔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 좀 찍어 달라고 했다.
또 언제 이런 기념식에 또 올 수 있을지 모른다.
‘39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라는 배경 글자가
내 얼굴에 가려 보이지 않아서 다시 찍어 달라고 했다.
………….
그냥 한번 갔다.
신기하다.
기념식 전
비가 오다 그치고..
울고
박수치고
끝나고 나오다가
나익주샘 만나고
정해직샘 만나고
대구 샘들 무더기로 만나고.
묘역 돌며 설명 듣고.
같이 덩달아 신나서
나도 그동안 공부한 거 덧붙여 곁들여 설명하고.
같이 관광버스 타고 따라가
같이 점심 먹고.
연락처 주고받고.
사진 보내주고.
강연 의뢰받고.
동고송 소개하고..
진짜 신기하다.
쌤~ 이번 글은 좀 기네요~;